지우는 엄마가 동생을 낳고 조리원에 가 있는 동안 3주에 걸쳐 주말마다 우리 집에 왔다. 3주 차 외가에서 맞는 일박이일, 낮에는 그런대로 잘 먹고 잘 노는데 항상 밤이 문제였다. 오늘은 낮에 할아버지와 손잡고 마트에도 다녀오고 옥상에서 술래잡기도 하면서 바깥놀이를 많이 하여 낮잠도 건너뛰게 되었다. 그래, 몸이 피곤하니까 밤에는 틀림없이 잘 잘 거야... 회심의 미소를 날리며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아이를 데리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아이는 여러 차례 거실로 뛰쳐나갔다. 목이 마르다느니, 배가 고프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할아버지와 합세하여 겨우겨우 재웠는데, 깊은 잠을 못 이루고 새벽 두시쯤 깨서는 엄마가 보고 싶다며 징징댄다. 처음에는 숨죽여 훌쩍이다가 나중에는 소리 높여 서럽게 운다. 참으로 난감하다. 지금은 깜깜해서 안 되고 날이 밝으면 데려다 준다고 타일러도 한번 터진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쉽게 잠자기는 글렀고 그렇다고 한밤중에 딱히 할 게 없어 우는 아이를 꼭 끌어안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줬다. 예전에 우리 두 딸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 <호랑이와 곶감> <선녀와 나무꾼> <할머니 손은 약손> 두 세대가 흐르는 동안 꽁꽁 묶어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헤쳤다. 내 가슴 속에 안긴 아이는 조금씩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더니 울음을 그쳤다. 자꾸자꾸 해달란다. 귀를 쫑긋 세워 진지하게 들어주는 아이가 귀엽고 대견해서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30년 만에 되살아나는 옛이야기에 우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둘 다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지우는 책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옛날이야기도 좋아하는구나?”

“응!”

“그런데 지우야, 할머니가 너무 졸립다. 내일 또 해주면 안 될까?”

“알았어. 나도 잘 거야!”

 

 

어라, 이렇게 쿨할 수가? 옛날이야기가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했네. 어찌 보면 옛날이야기는 모녀간이 아닌 조손간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옛날이야기는, 사람은 물론 동물 식물 심지어 똥바가지까지도 주인공이 되는 늘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계였다.

어렸을 적, 지금처럼 책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우리는 할머니 무릎에 앉아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민초들의 삶을 입과 입으로 계승 시킨 이른바 구전(口傳)문학. 신비로운 판타지 세상을 꿈꾸며 듣기 능력은 물론 풍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다. 안정적 애착형성은 평생을 살아가는 힘이라던데 어쩌면 나이 먹은 사람들의 안정된 정서는 그 옛날 할머니의 무릎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그나저나 내일은 지우에게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담? 민담책이라도 꺼내서 읽어봐야겠다. 이렇듯 아이는 나에게 늘 거룩한 숙제(?)를 안겨준다.

 

 

요즘 지우가 즐겨 쓰는 말이 있다.

“나, 지금 바뻐! 피곤해!”

“배 고프다메? 아프다메?”

 

 

워킹맘인 제 엄마의 말투를 흉내 내며 배운 것 같다. 원래 말이란 주인이 없이 모방하고, 공유되기 마련이어서 어른이 즐겨 쓰는 어휘나 말투를 아이들은 그대로 따라 하기 마련이다. 어느 날은 느닷없이 “할머니, 왜 갑자기 슬픈 얼굴을 하고 그래?” 하면서 자못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내 얼굴에서 무슨 낌새를 알아 차렸는지, 아이는 상대의 표정이나 감정까지도 읽어낸 것이다.

 

 

가끔씩 아이가 하는 말을 듣노라면 꼭 무엇에 홀린 듯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아이의 어록(語錄)이라도 만들어 두고 싶다. 어차피, 절대로, 도대체 같은 부사어는 물론 그런데, 그래서, 왜냐하면, 같은 접속사도 적재적소에 잘 쓴다. 도대체 그 많은 말들을 하고 싶어서 얼마나 참았을까... 공수표도 자주 남발한다.

 

“할머니, 문제없어! 지우가 다 해줄게.”

애교가 넘치고 재치 만점인 이런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그게 비록 공수표일지라도 그런 수표라면 언제든지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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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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