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어느 토요일 아침, 마누라는 내 심기를 긁어놓고는 밥상을 차렸다. 겨우 수저질을 이어갔지만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머릿속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진정해. 식사는 즐겁게 해야지. 나중에 좋게 이야기하자.” “이건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야. 이렇게 꾹꾹 참다가는 먹는 거 다 체하겠어.” 결국 강경파가 승리했고, 나는 마누라에게 포문을 열었다.
일종의 승리(?)를 거두고 등산 배낭을 메고 현관을 박차고 나왔다.

 

숲속을 걸으며 몸과 마음은 깨끗이 리부팅됐다. 그렇게 상큼하게 돌아와보니, 조용한 가운데 집안이 말끔하게 정리정돈돼 있었다. 스트레스가 생기면 맹렬하게 청소하고 빨래하고 정돈하는 버릇이 있는
 마누라의 소행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참 애정이 가는 마누라의 습성이 아닐 수 없다.

 

뭔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칙칙칙 압력밥솥이 돌고 있었다. 흠…. 그러고 보니 가스레인지 위에 묵직한 놈 하나가 걸터앉아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고는 경악했다. 무지막지한 양의 카레,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천하의 ‘미스터 낙천’은 ‘에이 잘 됐다. 혼자만의 시간을 좀 가지자. 밀린 일도 좀 하고…’였다. 카레의 향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번째 카레라이스를 먹고 낮잠도 한숨 ‘때렸다’. 일어나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하다. 저녁엔 아이와 함께 두 번째 카레를 맞이했다. 서서히 카레 효과가 나타났다. 화장실 손잡이에 걸린 마누라 원피스를
보면서 그리움 비슷한 것이 울컥 올라온 것이다.
카레가 아니고서는 뼈대있는 가문에서 이렇게 쉽사리 분노가 그리움으로 돌변하는 건 설명이 안된다. 어쨌든 그렇게 일요일까지 카레범벅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 사건의 발단은 ‘존중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하는 일을 마누라가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시쳇말로 ‘꼭지가 돌았던’ 거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길 원한다.
존중받는다는 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것, 그것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런 욕구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 수많은 SNS다.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를 올리게 하고는 다른 사람의 긍정적
평가(‘좋아요’)가 몇 개나 달렸는지 수시로 체크하게 만든다. 하지만 실은 SNS가우리를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리의 욕구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리더십을 이야기할 때 많이 인용되는 미국 여성이 메리케이 화장품회사의 메리 케이 애쉬 회장이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직원들을 대할 때 그들의 가슴에 ‘나는 존중받고 싶다’라고 쓰여진 목걸이를 차고 있다고 생각한다.”
리더십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는 마음가짐이다.

 

우리 사회에는 메리 회장과 같은 ‘존중하는 마음’이 특히 부족해 보인다. 아랫사람을 향한 존중이 없으니 ‘갑질’이 난무하고, 위를 향한 존중이 결핍되다보니 권위와 질서가 제 자리를 지킬 수가 없다.
손가락질도 좋지만 이제 뭐라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예기(禮記) 내칙(內則)장을 보면 ‘예시어근부부’(禮始於謹夫婦)라는 말이 나온다. ‘예는 부부간에 조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이 말, 생각할수록 와 닿는다.

 

카레를 과다섭취한 그 때 이후 이상하게 마누라가 점점 더 이뻐 보인다. 틈만 나면 마누라 꽁무니만 졸졸 좇아다니게 된다. 덥다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지만 ‘좋은 걸 어떻게 하나?’ 카레의 부작용일까?
어쨌든 마누라도 요즘은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눈치다.

<2015.08 경상일보>
(사)함께하는아버지들  대표   김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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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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