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머리로 염색한 딸이 전철을 타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걸 보고는 나는 집으로 가는 대신 인근 대형마트로 향했다. 지난주 놓쳤던 딸의 생일 선물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전자제품, 자동차용품, 등산용품 가게에 머무르고 있는 자신에게 뭐하고 있느냐?’고 채근하고는 의류, 악세사리 코너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발길이 머문 곳은 시끌벅적한 장난감 코너 그리고 사각의 박스 속에서 손짓하고 있는 인형들이 줄 서있는 매장이었다. 언제나처럼 그곳에는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는 로봇 박스를 고집스레 집어 드는 꼬마도 얼핏 보였다. 이런 풍경 속에서 선물을 고르던 때가 문득 그리워졌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는 자고 있는 딸의 얼굴을 뜯어보면서 맹랑한 들창코를 빨름거리며 똘망똘망하던 유치원 입학사진속의 얼굴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딸의 과속(?) 성장에 불만이 있는 것일까? 돌이켜보면 아이가 커오는 동안 늘 곁에서 지켜보면서 함께 해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대학생이랍시고 밤늦도록 싸돌아 다니는 녀석의 현재 세계를 잘 알지 못하다보니, 내 마음속 보석상자에는 아직도 유치원 딸아이의 사진이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녀석에게 뭘 선물해주면 좋을지 얼른 생각나지 않는 게 아닐까? 지난 주말엔 동네 미용실에서 공개질문도 했었다. “21살 짜리 딸에게 생일선물로 뭘 해주면 좋겠느냐?”. 그러자 내 머리를 커트하던 분이 자기 피부를 살펴보라며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자기 얼굴이 좀 자연스럽게 윤기가 나지 않느냐면서 펄 크림이라는 화장품을 추천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게 얼굴을 내던져가면서까지 설명해주는 성의는 대단히 고마웠다. 익히 예상했던 뭐니 뭐니 해도 현금이 최고라는 답변도 빠지지 않고 나왔다. 미용실 사장이었다. 사실 내가 고른 목걸이나 넥타이를 상대방이 좋아하리라고 장담키 어렵다. 그러니 선물로 상대방이 느낄 행복감을 최대화시키려면 물품을 사지 말고 그 선물을 살 돈을 현금으로 주는 것이 경제논리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 실제로 미국의 펜실베니아 대학의 조엘 왈드포겔(Joel Waldfogel)이라는 경제학자는 크리스마스 선물의 자중손실에 대한 연구(The Deadweight Loss of Christmas)’라는 논문에서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고받음으로써 생기는 만족도는 그만큼의 현금으로 느꼈을 만족도보다 20% 포인트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을 읽어보지 않았을 테지만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선물대신 현금을 선물한다.
 

 

하지만 현금은 안된다가 내 답이다. 지난 주말, 선물로 옷을 사주겠다는 아내의 말에 케익의 촛불을 끄던 딸이 생필품 같은 옷이 무슨 선물이 되느냐고 거절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딸이 세상에 나온 것을 기뻐하면서 딸의 인생을 축복해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과연 돈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선물이란 받는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또 주는 사람의 지불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선물을 통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서로 교감하고 공통의 경험을 나누는 거다. 만약 국가에서 운영하는 자판기에서 일년에 한번씩 생일 선물을 받는다면? 상상만 해도 기분이 칙칙해진다. 선물은 물건이나 쓸모가 아니라 마음또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봤던 코레일의 광고 당신을 보내세요!”가 감동적이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일 터이다. 나는 딸이 아빠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그 물건을 만들거나 골랐는지, 자신의 21살 생일에, 기억하기를 바라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이다.
 
김혜준 ()함께하는아버지들 대표
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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