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의 친구 네댓이 대학로에서 만났다.

서른 해 넘게 알고 지내온 사이라서

서로 나이 들어가는 걸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예전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현재의 서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자연스럽게 젊은 친구들에게 시선이 쏠렸고

(거기서는 어디에 눈을 두건 그 친구들밖에 더 보이랴!)

부러운 눈길로 한참을 바라봤다.

 

“야, 나는 단 하루라도 저 나이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부럽기도 하겠지.

어찌 저 싱싱한 날것의 생동감을 모른 척 할 수 있으랴.

 

 

 

 

 

 

 

“내가 저 나이로 돌아간다면 죽자 사자 멋진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볼 거야.”

 

그렇게 말하는 너는 그런 연애 안 해봤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남의 일 시시콜콜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다.

 

 

“나도 노랗게 염색하고 귀에 구멍 뚫어 귀고리도 한 번 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속으로야 뭔들 안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며 또 뭔들 못하겠니.

 

“나는 단 하루도 저 나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도 모르게 흥취 다 깨먹는 어깃장을 놨다.

그 말에 이놈 저놈 입대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끔찍한 염세주의자가 아닌지,

내 인생이 그렇게 팍팍한지 몰랐다는 투요 눈치다.

 

 

“난 쟤들의 고민을 떠안고 살 자신이 없다.”

친구들은 내가 젊은 대학생들과 섞여 살아서 철딱서니가 없어서라거나

부럽다 못해 증오를 키워온 것 아니냐며

내 정신분석이라도 할 것처럼 득달같이 몰아세웠다.

 

 

“여기 대학로 근처에라도 얼씬하지 못하는 청춘들이 얼마나 많은데.

 용돈이라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해야지 영어 학원 다녀야지,

제 살 길 찾는 일에 치여 사는데 걔들이 불쌍하지 부럽냐?

우리 20대 때와 혼동하지 마.

 우리라고 뭐 딱히 멋진 청춘 보낸 건 아니다만.

쟤들 사는 거 보면 우리는 용꿈 꾸며 산 거야.”

 

 

누군들 젊음이 부럽지 않을 수 있으며

어느 누가 그 시절을 꿈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 하루도 그런 부러움 없이 살아본 적 있을까?

그러나, 정말 그러나 내가 지금의 청춘들처럼 살라고 하면 솔직히 난 자신이 없다.

 

젊음은 무모함과 열정과 실험정신으로 사는 것이라고

누구나 떠들지만 그건 최소한 삶에 대한 존중과 희망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오죽하면 그 아까운 목숨까지 포기할까!

우리 때라고 자살하는 청춘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아주 드물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해서,

혹은 실연의 상처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걸 낭만이라거나 순진함 때문이라고

폄하하는 것도 고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자식들 후배들인 청춘들은 인생이 힘들어서,

도대체 앞으로의 살길도 막막하고 지금 당장의 삶이 너무 힘들고 견딜 수 없어서

삶을 스스로 마감한다.

 

그게 하도 흔해서 이젠 뉴스 거리도 되지 않는다.

 

이들의 가슴이 얼마나 시렸으면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초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청춘은 약동하고 저항하고 스스로를 시험하는 도약의 시기다.

그런데 아픔은 먼저 겪는다.

그런 청춘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물론 그 책의 저자는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위로가 될까?

 

암에 걸린 환자에게 소화제를 주면서

더부룩한 속은 가라앉지 않았느냐고 묻는 꼴이다.

지금의 청춘들을 보면 억만금을 줘도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자신들은 더 힘든 시절을 견디고

이만큼 성장했다며 힘내라고 떠밀고, 때론 왜 그리 나약하냐고 질책한다.

 

우리는 과연 그 질곡을 견뎌낼 자신이 있는가?

나는 싫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면 당신이나 혼자 실컷 아파 보라! 청춘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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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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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둘째 아들 녀석이 중학교 2학년 때

무심코 내뱉었던 말을 가슴에 박힌 비수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녀석과 동네 산책 중이었는데

놀이터에서 네댓 살 아이 둘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보더니 아들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좋은 나이다. 실컷 놀아라. 언제 또 그렇게 놀 수 있겠냐. 저 나이가 인생의 황금기야, 황금기.”

 

 

그 말에 숨이 콱 막히고 등골이 서늘했다.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아들 녀석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지겨웠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싶어 민망했다.

 

 

 과외 공부하러 보낸 적도 없고 어쩌다 방학 때면

모자란 공부 채우러 학원에 보냈을 뿐인 녀석의 입에서 그런 한탄이 나오다니.

 

 

도대체 어째서 아비가 자랐던 그 끔찍했던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내 사랑하는 아이가 더 혹독하게 살아야 하는가 말이다.

이건 어른들이 뭔가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녀석들이 힘겹게 대학에 진학한들 뭐가 변할까?

대학의 낭만은 이미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전설의 고향에서나 간혹 나왔던 이야기일 뿐이다.

 대학생이 되는 순간 그들은 빚쟁이가 된다.

엄청난 액수의 등록금은 그야말로 등골을 부러지게 만든다.

아르바이트로 용돈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공부는 뒷전이고 일하느라 날 지샌다.

아무리 쌓아도 모자라기만 한 스펙을 갖추기 위해서

 학원에 다니느니 어쩌니 하면서 지내다보면

도대체 이게 대학생 생활인지 잡부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하도 뻔한 말이고 누구나 아는 세태라서 굳이 말할 의미도 없고 지껄일 힘도 없다.

 

 

그렇게 가장 아름다워야 할 사춘기와 청년기를 몽땅 쏟아 붓고

 대학에 진학한 뒤에는 다시 취업의 단단한 문 앞에서 좌절하는 걸 보면

 참담함과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게 혹독한 시절을 지내야 하는지!

19세기말 영국 맨체스터의 공장과 광산에서 겪었던 절망이나

20세기 초반 미국 전역을 휩쓴 대공황 시절의 참담함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위로할 것인가?

 

 

그러기에는 지금이 21세기라는 것이 부끄럽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지금 우리의 청년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단순히 생계를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직업이 아니라

그의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모멘텀으로서의 직업이라는 점에서 보면 더더욱 안타깝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에 따르면,

2010년 2월 졸업한 대학생 10명 가운데 7명이 갚아야 할 빚이 있고

이들의 1인 평균 부채 규모는 1,125만 원에 달한다.

등록금 때문이라는 응답이 무려 84.3%에 달했다.

게다가 가계 생활비라는 응답도 29.0%였다.

 

그런데 2년 뒤 같은 곳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졸업생 10명 중 7명이 1인당 평균 1,300만 원 넘는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년 전보다 무려 11.4%가 증가했다.

 

여전히 등록금 때문이라는 응답이 84.4%로 가장 많았고,

가정생활이 35.7%, 어학연수비 16.4%였다.

어학연수는 중산층 이상이나 되어야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본다면

이미 중산층 자녀들도 빚더미에 올라선 것이라고 봐야 한다.

 

 돈을 빌린 곳을 보면 제1금융권이 59%, 제2금융권이 14.3%, 학교 11.3%였으면

심지어 사금융권에서 돈을 빌린 경우도 3%에 달했다.

 제2금융권 이율에 버금가는 카드론이나 현금서비스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이것마저 적용하면 그 내용은 더 암담해진다.

 

 

그렇다고 이들이 취업이라도 되면 열심히 절약해서(그야말로 누구 말마따나 ‘숨만 쉬고 산다면’)

부채를 갚을 수 있겠지만,

취업은 대학 입학보다 몇 배나 힘들다.

 

 

무슨 희망이 있을 것이며 무슨 청춘의 낭만 따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행여 빈말로라도 내게 20대로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묻지 마시라!

도저히 그 압박과 체념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그런데 그런 세상을 우리 자식들에게 떠안기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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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자식들은 반대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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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만나면서 난 죄인이 된 느낌이 든다.

아니 느낌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

나는 죄인이다.

나를 비롯한 우리 어른들은 모두 죄인이다.

적어도 지금 이 나라의 어른들은 죄인이다.

저 피 끓어야 하는 청춘들이 좌절과 체념을 먼저 몸으로 받아들이고 절망하고 있는 한 죄인이다.

 

 

지금의 4,50대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은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때도 모두 마음먹은 대로 원하는 직장을 골라 간 건 아니었지만

어지간한 직장은 얻을 수 있었다.

그때는 대부분이 가난했다.

집에 자가용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TV도 없어서 만날 골목에서 떼 지어 놀다가

국가대표 청룡팀의 축구경기나 김일의 레슬링 시합이라도 보려면 만화가게로 달려가야 했다.

 

그래도 70년대는 보릿고개를 넘어 기아와 가난의 질곡을 막 벗어났다.

모두 열심히 살았다.

우리의 부모들은 평균 대여섯 명 되는 자식들 굶기지는 않으려고

정말 뼈가 으스러지게 일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는 무사히 다닐 수 있었고,

 공부 열심히 하면 대학도 갈 수 있었다.

물론 그 뒷바라지 위해 소 팔고 논 팔며, 누이는 공장에 다니고 온 가족이 헌신했다.

 

 

그렇게 성장한 청춘들은 가진 것 없어도 미래의 희망이 보였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다가가 사귀자고 뻔뻔하게 제안할 수도 있었다.

개뿔 가진 것 없어도 취직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미래를 보고 수작도 부렸다.

결혼 때가 되면 여자 집에 가서 “결혼을 허락해주시면 굶기지는 않고 잘 살겠습니다.”

(40대는 이 진부한 대사에 익숙하지 않겠지만)라는 ‘대사’를 외워댔다.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승진도 하면서

가난과 작별하고 조금씩 풍요를 누리기 시작했다.

내 집도 마련하고, 꿈과 같던 자가용도 굴리게 되었다.

자가용이라니! 언감생심 꿈도 꿔보지 못하던 그 호사를 누리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이라고 다 평탄하게 살진 못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했다.

부모들처럼 뼈가 으스러지게 일하지는 않았지만

전투와 다름없는 삶을 살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만 부모 세대들보다는 훨씬 더 풍요로워졌고,

좀 더 문화적 혜택을 많이 누렸을 뿐이었다.

 

 

 ‘하면 된다.’는 저돌적인(사실은 무모한) 슬로건을 내걸고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조금씩 커지는 풍요가 거의 유일한 위로였다.

 

 

그러나 우리의 자식들은 어떤가.

그들은 태어났을 때는 풍요로운 환경이었다.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었다.

때 되면 유원지에 놀러가고 여름이면 온 가족이 여름휴가를 당연한 절차라며 즐겼다.

 

 

그 대신 그들에게는 자유는 없었다.

무한경쟁의 세상에서 살아온 부모들은

일찌감치 경쟁의 틀에 아이들을 가뒀다.

자신은 꿈도 꾸지 못하던 과외도 시켰다.

학원은 필수 코스였고.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을 몰아댔다.

 

 

조금이라도 낙오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양 아이들을 닦달했다.

사춘기를 겪을 틈조차 주지 않고 ‘사육’했다.

그러면서 그걸 교육이라고,

교육비 대는 부모 둬서 고마운 줄 알라며 볶아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한가?

묻는 일 자체가 민망한 일이다.

우리 자식들은 갈수록 자신들의 삶이 빈곤해지는 삶을 뼈 시리게 느낀다.

 

 

취업의 문은 꽁꽁 닫혀 있고,

아주 부유한 집 자녀 아니고서는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공부하러 대학 가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장학금? 돈 없는 학생들 열심히 공부하라고 주는 돈이 아니라

팔자 좋아서 일 하지 않고 공부만 해도 되는 부잣집 아이들 차지가 되기 십상이다.

 

 

물론 가난해도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 받는 학생들도 있지만.

 대학에서는 당국도 교수도 학생들의 처지를 일일이 헤아리기 귀찮으니

성적 순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려 한다.

그게 말썽도 없고 객관적이니까.

그러나 속내는 자기 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별로 없어서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따위는 제 소관이 아니다.

어차피 내 새끼도 아니다.

그저 내 새끼만 잘 키우면 될 뿐이다.

이미 이전부터 교육에 의한 사회적 양극화가 대학에 오면

그 꽃을 만개한다.

식충식물의 비겁한 향기를 폴폴 풍기며.

 

 

그런데 지금 우리는 나보다 못한 삶을 다음 세대가 누리지 못하는 걸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만 있다.

나는 했는데 너희들은 왜 하지 못하느냐,

나약해서 그런 거 아니냐며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그러면서 그저 수수방관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세대는 역사의 죄인이다.

아무리 더 큰 집 더 멋진 자동차 더 높은 자리 차지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청춘들이여, 미안하다.

부끄럽다.

 

청춘들이 나보다 못한 세상에서 살게 하는 건 어른들의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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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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