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입니다.

만나고 헤어짐은 삶의 필연입니다.

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는 불가의 가르침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지요.

 

 

삶은 가족과의 첫 만남으로 시작해서

가족과의 작별로 마감되는 것이라지요.

그러니 받아들여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온전하게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쉰네 해를 함께 살아온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정확히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실감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전화하면 받으실 것만 같고,

찾아가면 손을 잡아주실 것만 같습니다.

아흔의 수(壽)를 누리셨고 다행히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삶을 마감하셨으니 복된 일입니다.

문상객들도 호상이라고 위로했습니다.

물론 듣기 좋으라고 아픈 마음 덜라고 하는

 위로의 말이지만 저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어느 죽음인들 호상이 있겠으면 하물며 나아주신 어머니의 죽음에

호상이라는 객쩍은 말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만

그래도 저와 함께 쉰네 해를 마련해주셨으니 고마운 일입니다.

 

 

고작 열셋의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무섭고 서럽기만 했습니다.

유난하게 막내아들을 사랑해주셨고 다섯 살 때부터

당신의 다방 순례에 동반자로 데리고 다니시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던 아버지였기에 그 부재를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대여섯 살 때쯤 쏟아질 듯한 별을 바라보며 별자리 이야기를 해주시다가 갑자기

 “저 별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너보다 아름답진 않단다. 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단다.”

하시면 제 머리를 꼭 껴안아주셨던, 그래서 그 때는 그저 닭살스럽다고만 여겼던

그런 아버지였기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 시절에도 다정다감했고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했던,

그리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진보적 생각을 지니셨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부재가 어린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하지만 그 날 별을 보며 제게 해주셨던 말씀이

지금 이 나이까지 저를 버티게 한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아버지는 저의 가슴에 살아있다고 느끼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두 분이 다투시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빼어난 미인이셨던 어머니가 홀로 남아 여섯 남매를 거둬야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던 외삼촌은

어머니께 재가하라고 여러 차례 설득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였지요.

외삼촌은 그날 밤도 어머니께 간곡하게 설득했습니다.

저는 자는 척하고 있었지요.

어머니가 뭐라 응답할지 어린 저로서는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마디로 그 두려움이 사위었습니다.

“오빠, 나는 김 서방하고 살아온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남들 백 년 함께 살아도 그런 행복 못 누려요.

남은 삶 그 행복을 되새기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 뒤로는 외삼촌도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도 매제인 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하셨던 분입니다.

하지만 누이동생이 겪어야 할 삶의 신난(辛難)이 안쓰러워

그러셨음을 알기에 아무도 당신을 야속하게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다행히 저희 남매가 큰 허물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의 깊은 사랑 덕분이었을 겁니다.

당신들의 바람대로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이 나이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두 말의 힘 때문이었다고 늘 기억합니다.

 

 

개성이 다른 남매들이 제 나름의 삶을 선택할 때마다

반대하지 않으셨던 어머니였습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겠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그러시더군요.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해야지.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너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 거다.”

그렇게 당신 속에는 늘 아버지가 함께 계셨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쉰 해 넘게 혼자 사시면서도

외롭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야속하고 미울 때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늘 저희들의 의사를 먼저 존중해주셨지요.

그리고 그 판단은 아버지와 함께였음을 저는 압니다.

 

 

저도 어른이 되어 두 아이를 키우다보니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신 혼자 힘으로 더 많은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때론 매섭게 때론 자애롭게, 당신 힘들 때마다 그만큼 자식들이 큰다는 걸

 유일한 위안이자 힘으로 여기며 살아오셨음을 압니다.

 

 

그런 어머니가 여러 해 자리보전 하시다가

저희들과 작별하셨습니다.

고맙고 행복한 작별이었습니다.

당신과 쉰네 해를 함께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행복한 일입니다.

 

 

한 줌의 작은 재로 마감한 어머니.

그러나 이제 당신이 늘 가슴 속 깊은 곳에

 함께 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제는 전화를 드려도 응답할 수 없고 찾아가도

만날 수 없는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요.

그립고 서럽고 고마운 마음이겠지요.

‘살아계실 때 조금 더 잘 해 드릴 걸’ 하는 회한은 품지 않으렵니다.

어차피 눈멀어도 못 다 갚을 고마움입니다.

그래도 우리와 작별한 어머니가 그토록 사랑하시던 아버지와

따뜻한 해후를 누리셨을 거라는 안도가 저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여전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당신이 떠나셔서

제 마음 깊이 아름답게 살아계시게 되었으니

행복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러운 행복, 아쉬운 기쁨으로 어머니를 보내드립니다.

 

 

그런데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

유난스러운 이 여름의 염천(炎天) 때문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스무 날 뒤 당신의 생신에는 당신의 자식들이 대신 촛불을 불어드릴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엄마, 고맙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아서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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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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