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 ;;

내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비둘기에게 시달린 생각을 하면

평화의 상징은커녕 완전 고통과 증오의 대상이다.

 

 

어느 날 베란다 바깥쪽에서

 “꾸르륵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소리는 계속 들려왔고,

그것은 사람의 신음소리 같기도 한

조금은 기분 나쁜 소리였다.

 

 

그로부터 한 사나흘이나 지났을까,

볕 좋은 날을 골라 이불을 말리려고

베란다 창틀을 열어젖히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베란다 밖에 붙어있는 에어컨 실외기 밑에

하얀 비둘기 알 두 개가 얌전히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엔 온갖 배설물과 깃털과 지푸라기들이 널려 있었다.

 

 

얼마나 긴 시간에 걸쳐서 작업을 했는지

그것들은 마치 시루떡에 고물을 얹어 놓은 것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에어컨 전선을 감아 놓은 검정색 비닐 테이프를

비둘기들이 전부 물어뜯어서 굵은 철사는 맨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날부터 비둘기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비둘기 털과 배설물을 방치할 수가 없었다.

일단 창가에서 끼륵거리는 소리가 났다하면 문을 열어 날려 보냈다.

하지만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날아왔다.

대개는 둘이나 넷씩 짝을 지어 다녔는데

아무리 인기척을 보내도 굳건하게 제 자리를 고수하는 놈도 있었다.

그럴 땐 지팡이로 에어컨 몸체를 세게 두드려서 내쫓았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도대체 이 골칫덩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보통 고민이 아니었다.

 

 

궁리 끝에 한번은 시장에 가서

바퀴벌레 약을 사다가 뿌려 보았다.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알은 세 개가 더 늘었다.

하여 알을 품느라고 비둘기는 더 비번하게 날아들었고

신음소리도 더 크게 들려왔다.

 

 

집에 있어도 불편했고 외출을 해서도 ‘비둘기를 쫓아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남편은 그냥 놔두라고 했다.

 

 

그런데 9월 반상회 때 비둘기 얘기가 나왔다.

알고 보니 5층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장 일을 맡고 있는 5층 아저씨는 끈끈이 쥐약을 사다 놓자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 짓은 못할 것 같아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옥상에 펼쳐 놓았던 고추를 걷으러 올라갔다가

 나는 또 한번 충격적인 장면과 마주쳤다.

빨리 마르라고 고추를 반으로 잘라서 널었더니

고추씨가 많이 떨어진 탓에 비둘기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씨를 쪼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인기척에 놀란 비둘기들이 날아간 후

자세히 보니 깔개 밑에 가지런히 누워있던 고추들은

시멘트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고

사이에는 깃털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오, 맙소사! 이곳 또한 비둘기 세상인 줄을 몰랐다니...

기왕에 고추 농사를 지었으니

빛 고운 태양초 고춧가루도 내손으로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일념으로 날마다 그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했건만 뜻밖의 훼방꾼이 숨어 있을 줄이야.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다음날에 119로 문의를 해봤다.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난 상담자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자기네가 도와줄 수 있는 사항은 아니라며 만일 비둘기가 다쳤다거나

날지를 못해서 구원을 요청하면 그때는 출동해서 수거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같은 경우는 사설로 운영하는 해충박멸협회에

연락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비둘기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최근 따뜻한 겨울이 지속되면서 대도시에 비둘기 수가 급증하고 있으며

1년에 4~5번 이상 번식하는 비둘기는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한겨울에도 알을 낳는다고 한다.

 

 

이렇게 번식률이 좋으니 개체수가 엄청나게 늘어갈 수밖에.

법제처에서는 비둘기가 ‘야생조류’라는 유권해석을 내렸고

이 때문에 비둘기를 전문으로 퇴치하는 업체가 여러 곳에 등장했단다.

 

 

비둘기 배설물과 털을 통해서 사람에게 유해한

세균이나 기생충이 전염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래서 최근 공장이나 가정에서 비둘기 퇴치 요청이

심심찮게 들어온다고 했다.

만일 말라붙은 비둘기 똥이 바람에 날리거나

비둘기의 잔해로 인해서 예기치 못한 전력 사고가 발생된다면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혼 초, 집들이라는 명목으로 남편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는 듀엣으로 ‘비둘기 집’을 불렀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 ~ ~”

정말 그때는 비둘기가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었으며

다른 새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지금도 생각난다.

88올림픽 개막식 때 잠실벌을 수놓았던 수천 마리의 비둘기 떼를.

 

 

비둘기 집도 참 예뻤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살았던 둔촌 아파트 저층 옥상에도

알록달록한 색깔의 비둘기 집이 여러 채 있었다.

 

 

아마도 관리사무소에서 별도로 지어준 것 같았다.

비둘기 집은 바로 우리 집 앞 동에 있었던 지라

우리는 날마다 비둘기가 들고 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가끔씩은 아이들이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 주기도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가 아파트 숲으로 바뀌자

서식지를 잃은 많은 새들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런데도 비둘기만큼은 계속 세를 불리고 있고

그로 인한 피해 또한 만만치 않으니 그 놈은 이미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그나저나 평화로운 방법으로 비둘기 퇴치할 묘안을 나는 아직도 찾질 못했으니 어쩐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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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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