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어서 아침 먹고 학교 가야지.”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요. 애들이 다 나를 싫어한단 말이야.”

“그래도 가야지. 너는 교장이잖니.”

 

 

아이들도 선생님도 학교 가기 싫어하는 모양이다.

즐거워야 가고 싶은데 즐겁지 않으니 누가 가고 싶을까.

그저 합격과 성공만이 유일한 목적인, 철저하게 경쟁적인 틀 속에 몰아넣고

견뎌내라고 하는 건 폭력이다.

주먹질하는 것만 폭력이 아니다.

그러니 전쟁터 같은 학교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교육의 내용이나 방법도 폭력적(?)이다.

질문도 발칙한 상상도 허용하지 않는 건 이미 폭력이다.

오로지 텍스트 추종만 요구할 뿐이다.

아무리 제도를 바꾸고 온갖 연수니 교육이니

마련하지만 변하는 건 없고 오직 자조와 체념만 남는다.

 

 

텍스트 추종의 일방적 교육이 본격적으로 공고하게 되는 건 중학교부터이다.

모든 수업은 각각의 전공 담당 교사가 맡는다.

수학 시간에는 오직 수학만, 미술 시간에는 오직 그림만 배운다.

그러면서 전 과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즉 텍스트 추종 능력을 확실하게 보여야 합격하고 성공한다.

그리고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텍스트에 대한 더 높은 충성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자기 성공과 권위는 오로지 텍스트에 대한 충성에서 오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기존의 인식과 가치 규범이다.

따라서 그걸 따르는 사회구조는 오로지 그것에 대한 순응만 요구할 뿐이다.

 그게 우리 학교 교육의 폭력성이다.

 

 

그 무모한 틀을 깨고 ‘전문적 바보’나 ‘텍스트 권력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교육은 불가능한 것인가?

통합교육이니 전인교육이니 하는 것들은

 그저 선언적 가치에만 머물고 있을 뿐이다.

교육은 ‘자유로운 개인’을 배양하고 텍스트를 통해 보편적이고

검증된 지식을 배우되 그 틀 안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콘텍스트로 확장하는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깰 수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은 초등학교에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거의 전 과목을 다 가르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새로운 르네상스맨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서의 통합수업은 의외로 간단(?)하다.

40분 수업 10분 휴식인 까닭은 교육과학기술부의 수업지침에 따르기 위해서고,

그것은 균형 잡힌 수업 체계를 위해서이다.

하지만 꼭 그걸 고수할 까닭은 없다.

예를 들어 일주일에 한 번쯤은 그런 시간의 구획 틀 없이 수업을 해보는 거다.

 

 

모든 책상을 뒤로 물려놓고 바닥에 둘러 앉는다.

 “우물가에 올챙이 한 마리~” 신나게 노래 부른다. 음악 수업이다.

 노래만 할 수 있는 곡이 아니다.

들썩들썩 몸을 움직이며 율동이 따른다.

무용 수업이고 체육 수업이다.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그리고 외워야 한다는 강박은 전혀 없다.

 

 

노래와 율동이 끝나면 올챙이와 개구리의 생태에 대해 배운다.

자연이고 과학수업이다.

이번에는 “개구리 두 마리와 올챙이 네 마리가 있어요.

다리는 모두 몇 개일까요?”라고 묻는다.

그게 산수고 수학수업이다.

 “그런데 왜 우리 동네 개울에는 올챙이가 없을까요?”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사회수업이 될 수 있다.

올챙이와 개구리의 특성을 살리는 그림을 그려보게 할 수도 있다.

미술수업이다.

마지막에는 올챙이나 개구리가 등장하는 동화, 애니메이션, 영화, 소설 등을 찾아본다.

이때도 아이들 스스로 그 자료들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

도서관, 컴퓨터실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자료를 찾아서 모인다.

 

 

어떤 책은 함께 읽고(이때 간단하게 읽기, 듣기, 받아쓰기 등을 실시할 수 있다),

 만화영화도 보며 각기 느낀 바를 설명한다.

발표와 토론이다.

그건 바로 국어수업이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제안한다.

 “우리 오늘 이 중에 하나 골라서 연극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작품을 고르고 조를 짜서 연습하도록 시간과 장소를 배정한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의상도 만들어보고(종이건 뭐건 상관없다.

보자기 하나만으로도 의상도 되고, 막도 될 수 있다.

그걸 활용하는 창의력을 계발시킬 수 있다),

때론 적절한 음향효과(깡통이나 빗자루만으로도 멋지게 해낸다!) 등도 곁들인다.

최대한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그게 연극이 되고 누군가 그걸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영화가 될 수 있다.

 

 

굳이 40분 하고 10분 쉬는 틀을 따를 필요도 없다.

전적으로 아이들에게 맡기면 된다.

지치면 쉬자고 할 거고, 재미있으면 몰입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를 것이다.

아이들은 그 수업을 통해 자신들이 주인공이고 주체라는 걸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올챙이 하나를 가지고 전 과목 수업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게 바로 통합적 수업이고 좀 고상하게 말하면 학제적(學際的) 수업이다.

모든 걸 다 잘하지 않아도 서로 칭찬할 게 있다는 걸 익힌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춤에는 천부적인 아이, 목소리가 좋아 읽기를 잘하는 아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장점을 알게 된다.

선생님은 그 아이의 장점을 이끌어내주고 자신감을 키워주면 된다.

다른 수업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다.

 이미 아이는 자신의 장점이 수업 전체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즐거워서

즐겁게 다른 방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다른 방면에 뛰어난 아이들에 대해서도 칭찬하고 격려하는 배려도 배운다.

 

 

초등학교에서 이런 학습을 경험한 아이들은 중고등학교에서도

그런 수업을 그리워하거나 선생님께 요청할 수 있다.

아이들을 통해 통합교육의 힘을 깨달은 학부모들도 학교 일에 참여하여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만드는 데에 공헌할 수 있다.

그게 제대로 된 학부모의 역할이다.

그저 돈 모아 에어컨 사주고 커튼 달아주는 게 학부모회의 일이 아니다.

 

 

텍스트만 강요하는 학교, 따돌림과 폭력이 암약하는 학교,

쉬는 시간 잠시 앉아 휴식할 나무 그늘 변변치 않은 학교.

그런 학교가 즐거울 리 있을까?

 

 

우리는 가난한 시절 그렇게 그런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 새끼들은 그보다는 나은 학교에 다녀야 하지 않을까?

그 ‘새끼’들이 내가 낳은 자식만이어서는 안 된다.

 

 

내 자식이 아무리 훌륭하게 자라도 우리 새끼들이 험하고 아프게 자랐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학교가 살아야 사회가 산다.

내 새끼만 다른 아이들 밟고 넘어가

 텍스트의 ‘변종’ 트로피를 차지하는 게 행복이어서는 안 된다.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사회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게 우리 부모들의 책임이고 사명이다.

 

 

위에서 대책을 만들고 지침을 내려 보내는 방식으로는

결코 학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제는 현장에서, 그것도 첫 단추인 초등학교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존중하고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행복이다.

그 행복이 학교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길러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고민해야 한다.

 

 

학교와 교육 그 자체가 이미 폭력인 상황을 거부해야 한다.

아이들 주먹질만 막으면 될 일이 아니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른들이 망쳐놓은 것이다.

텍스트에 순응하는 법만 강요하는 교육은 폭력이다.

 

 

그걸 깨야 한다. 누가? ‘새끼들’의 부모인 우리가 해야 한다.

 내 새끼들이 아파한다. 학교 때문에 아파한다.

그렇게 아파하는 새끼들을 둔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우리 새끼들이 진짜 행복하도록 해야 한다.

 

 

“천천히 가도 되잖니. 지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넌 교장이잖니.”

“안 돼요. 빨리 가야 해요. 아이들이 함께 놀자고 기다린단 말이에요.”

그런 학교를 꿈꾸는 것은 너무 발칙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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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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