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자존감 낮았던 때가 초등학교 시절이 아닌가 싶다.

호적이 잘 못 되는 바람에 한 학기를 늦게 입학했고

집에는 부모님이 안 계셨으니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나는 외톨이 신세였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에 와서 낮잠을 자다 깼는데

사방이 뿌연 게 꼭 아침 같았다.

얼른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당시에는 2부제, 3부제 수업을 했던 터라

학교는 오후 늦게까지 학생들로 북적였다.

 

 

정신없이 뛰어가 우리 반 교실로 들어갔는데

내 자리에는 딴 아이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선생님도 반 친구들도

전혀 익숙한 얼굴들이 아니었다.

 

 

그때의 황당함이란!

나는 울면서 돌아왔고 오는 길에 위로라도 받을까 싶어

가게에 들렀는데 엄마는 위로는커녕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사냐며 혼쭐을 내셨다.

그래서 더욱 서럽게 울었던 기억.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치매감에 빠져 있던 그때의 그 장면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한편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집에는 할머니와 일하는 언니가 있었는데도

하루 두 번씩이나 학교에 가는 나를

왜 붙잡지 않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실수투성이에다 공부에 흥미도 없으니

학교생활이 자연히 싫어질 수밖에.

요즘 말로 하면 나는 학습지진아내지는

학습부적응아였다.

하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한참 뒤처지는 나를

담임선생님들은 나름 귀여워해주셨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시험지나 문구류를

우리 지물포에서 죄다 갖다 썼고

아마도 사장인 아버지는 돈을 안 받거나

무진장 싸게 공급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긴 하지만...

당시 아버지는 청량리 전차 종점 부근에서

지물포와 운수업을 동시에 운영하고 계셨다.

게다가 전교 1.2등을 다투었던

언니 오빠들이 다 우리 학교 출신이 아니던가.

 

 

형제들이 많다보니 우리 집은 날마다 전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내가 유치원 다닐 때

제일 맏이인 큰오빠는 대학원생이었으니

일곱 형제가 전부 학생인 때가 있었다.

 

 

매일 아침, 먹는 일에서부터 차비며

준비물 살 돈을 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일찍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을 주셨다.

나이에 따라 차등을 두었는데 초등학생인

나는 1000원쯤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 돈의 개념을 몰랐고 돈 쓸 일도 별로 없어서

나는 그걸 꼬박꼬박 모아두었다.

그때 언니들은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용돈이 나보다 훨씬 많았을 텐데도

월말만 되면

나한테 돈을 꾸어달라고 자주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는 세상에 공부하는 놈하고

저축하는 놈한테는 못 당한다며

어려서부터 돈 관리(?)를 잘하는 나를 보고

이담에 아주 잘 살 거라고 하셨다.

그랬다면 오죽 좋으랴...

 

 

암울했던 초등학교 시절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사건이 있었으니

5학년 말에 내가 쓴 동시 한 편이

학교 신문에 실린 것이다.

한번도 남의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특히 아버지가 많이 기뻐하셨는데

그 시를 오려서 안방 금고 안에다

보관해놓고 우리 집에 놀러오는

어른들에게 보여주셨다.

 

 

 내게 오죽 자랑거리가 없으면 저러실까 싶어

어린 마음에도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어

이후 나는 동시(童詩)와 한자(漢字)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도 때도 없이

뭔가를 끄적거리는 아이로 변하게 되었다.

 

 

거의 낙서 수준이었지만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기록물이 쌓여가니 뿌듯했고

국어시간이 더욱 좋아졌다.

특히 시 암송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대학은 국문과를 갈 것이며 국어선생님이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지면서 긍정의 에너지가 마구마구 솟구쳤다.

 

 

한편 어렸을 적에 우리 집 안방 벽장에는

먹을 것이 참 많았다.

계절별로 나는 온갖 과일과 셈베이,

약과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형제들이 가장 탐냈던 것은 바나나였다.

 

 

그것은 아버지만 잡수시는 음식이어서 더욱 탐을 냈다.

부드럽고 달콤한 노란색 열매,

냄새만 맡아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 당시 바나나는 꿈의 과일이었다.

 

 

오죽하면 그 바나나가 먹고 싶어서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세월이 변해 이제는 비슷하게 생긴 옥수수보다도

 싼 아주 흔한 과일이 되고 말았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변한 것이 어찌 그뿐이랴.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 학습지진아였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조금씩 만회가 되었지만

중학교 올라가서도 여전히 존재감 희박한 그런 아이였다.

그러다가 중3 때 고교 입시를 앞두고

당시 장안에서 유명한 안국동 과외 팀에 합류하면서

나의 인생 역전이 시작되었다.

 

 

여학생만 있는 학교와는 달리

남학생들과 함께 과외공부를 하면서

성적이 쑥쑥 올라갔다.

덩달아서 성취감도 올라갔다.

그 전까지 부모님은 내가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나 제대로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고등학교 일차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고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해서

국어과 중등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거의 학습지진아 수준이었던 어린 시절과

부모교육 강사 노릇을 하면서 평생교육의 길을 걷고 있는

현재의 내 모습을 견준다면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늦트인 나는

스스로를 대기만성 형이라고 생각한다.

 언니들도 그랬다.

나는 머리보다는 노력형이라고...

 

 

지난 3월부터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집 근처 구민회관에서 논술공부를 하고 있다.

올해 초, 중학교 교과서가 개편되고

융합형 인재교육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바뀐 학교 현장의 소리를 듣고 싶었기에 수강신청을 하였다.

 

 

정원이 25명인 수강생 대부분은

초등학교 학부형들이었고 중학교 학부형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두어 주가 지난 어느 날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엄마가 내게 물었다.

“연세도 있으신 것 같은데 세 시간씩 앉아 있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아뇨! 전혀 힘들지 않아요. 재밌어요.”

 

 

그 엄마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또한 겉모습으로 봐서는 요가 교실이나 갈 법한데

 뒤늦게 이런 공부를 왜 할까 하는 의구심도 서려 있는 듯했다.

 

 

나이 들면서 잃은 것은 시력이고

얻은 것은 심력이라고

나는 아직도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고 공부가 재미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자기주도학습이 잘 되는 편이다.

나의 다음 도전 과목은 ‘노인학’ 그 중에서도

자서전 쓰기와 웰다잉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다.

배움은 어느 한 장소에 꽂혀 나부끼는 깃발도 아니고

어떤 시간대에 꼭 새겨야만 하는 나이테도 아니기에

이순의 나이에도 배움의 희열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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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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