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수연| 만남'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3.03.11 ‘어우동’의 산실, 능소원
  2. 2013.02.18 겨울 바다
  3. 2013.01.25 터미널 풍경
  4. 2013.01.14 지우야, 사랑해
  5. 2013.01.08 혼자만의 하루
  6. 2012.12.21 엔딩노트
  7. 2012.11.19 택배 사절
  8. 2012.10.04 비둘기 소동
  9. 2012.09.20 가을이 가기 전에
  10. 2012.08.01 한 여름밤의 옥상파티

 

스터디 모임을 마친 후 강동구 둔촌동에 위치한

‘도원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장소 선택은 내가 했다.

 

 

일전에 남편과 함께 갔다가 문이 닫혀 있어

헛걸음질 한 경험이 있기에

언젠가 다시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참이었다.

다섯 명의 일행과 함께 찾아간 그 식당자리는

소설가 부부의 살림집이자 방기환 선생의

그 유명한 고전소설 <어우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밥을 먹으러 갔다기보다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가게 된 것이다.

보훈병원 정문 왼쪽 켠에 자리한 이 식당은

한때 ‘능소원’이라는 이름으로

방기환과 그의 아내인 소설가 임옥인 선생이

20년 넘게 살던 집이었다.

 

 

우리나라 소설가 1세대에 해당되는 이들 부부는

아내가 남편보다 14살이나 연상이었고

문단에서는 내로라하는 잉꼬부부로,

로맨티스트로 통했다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부부는 능소화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기 집 호를 능소원이라 지었고 집 주위를

능소화로 뒤덮었다고 한다.

 

 

또한 <어우동> 소설에 등장하는 기생 이름도 능소화였으니

이들 부부의 능소화 사랑이 어떠했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장마철에 등처럼 환한 능소화가 온 집을 밝힌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작가의 집 ‘능소원’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도 유명했다.

 

 

70년대 초, 방기환은 저작권료로 받은 돈으로

당시에는 꽤나 변두리인 서울의 동쪽 끝 둔촌동에

땅 천여 평을 사서 갖가지 나무와 화초를 심고

한쪽 마당을 잔디밭으로 만들어 문우들의

세미나나 토론장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가끔씩은 문단의 가난한 후배나 제자들이

그곳에서 결혼식도 올렸단다.

그런데 동네에서 작은 공원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던 이 집은 보훈병원을 지을 때

길을 내느라고 집 앞 절반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1993년과 1995년 작가 부부가 차례로 세상을 뜬 후,

능소원은 대중음식점으로 탈바꿈했다.

 

 

처음에는 콩나물국밥집이었다가 다시

‘도원 식당’이라는 고깃집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나는 신혼 초부터 둔촌동에서 오래 살았기에 이렇듯

능소원의 영욕의 세월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전에 콩나물국밥집일 때는 몇 번 드나들었지만

고깃집으로 바뀐 후에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내가 1980년 초반부터 둔촌아파트에 살았으니

능소원의 실체를 진작에 알았더라면 오며가며 내가 좋아하는 꽃,

능소화를 실컷 보고 혹여 그들 부부와도 마주치지는 않았을까...

그곳은 우리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번씩 가는 약수터길 중간에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했을 것 같다.

 

 

류시화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 제목이 다시금 떠오른다.

식당주위는 겨울이라 삭막함이 더했고

월요일 저녁이라서 손님도 없었다.

 

 

게다가 언제 손을 봤는지 식당 입구 아치형의 철 대문은

녹이 잔뜩 슬어서 ‘여기가 정말 능소원 자리가 맞나?’ 싶었다.

능소화의 전설만큼이나 애틋한 능소원.

 

 

문학의 산실, 작가의 산실로서 이름만이라도 명맥을 이었으면 좋으련만

고깃집으로의 변신은 매우 안타까웠다.

 

 

척박했던 시절, 그래도 <어우동>이라는 고전소설이

탄생한 자리가 아니던가.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면 문학작품과 관련된 명소들이 참 많다.

 

 

전남 장성에 가면 홍길동의 고향으로 알려진 홍길동 마을이 있고

강원도 봉평에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생가가 있다.

해마다 9월이면 메밀꽃 축제가 열려 전국의 관광객들이 몰려드는데

봉평은 문학작품을 가공해서

엄청난 관광수입을 올리는 본보기 마을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경기도 양평에 ‘소나기 마을’이 건립되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서 영감을 얻어

지은 문학 테마 파크이다.

거기에는 황순원 문학관이 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장면들을 재현해 놓았다.

소년이 소녀를 업고 건넌 징검다리, 오두막, 수수볏단 등이

소나기 마을 곳곳에 배치돼 있다.

 

 

사실 양평은 황순원 선생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런데도 선생의 문학관이 양평군에 들어선 것은

작품 속에서 소녀가 양평으로 이사 간다는

 말 한 마디 때문이라고 하니

약간의 억지가 가미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21세기는 문화의 시대, 그래서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문화의 고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렇게 안간 힘을 쓰는데

문학의 역사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능소원은

왜 그냥 버려두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각박할수록 스토리가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

그러니 이제라도 그 공간은 관할 구청인 강동구에서 사들여

인근의 일자산과 더불어 지역주민에게

문화와 휴식이 있는 쉼터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그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고기에다 청국장까지 먹고 나니 적당한 포만감에,

노소녀(老少女)들의 눈가에는 천진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배도 부르고 옆에는 나이 들어

세월을 함께 해준 고마운 벗들도 있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쓸쓸했다.

 

 

하긴 살면서 허허롭지 않은 날이 얼마나 될까?

 

 

 

 

KACE:  www.ka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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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

|함수연| 만남 2013. 2. 18. 12:29

새해 벽두부터 전국을 꽁꽁 얼어붙게 했던 동장군의

기세가 주춤해졌을 무렵 우리는 겨울 바다를 보러

동해안을 찾았다.

 

 

 

 

사실 겨울 바다를 찾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들뜨고 환상적인 일인데 오고 가는 여행길에서

문학적 감성까지 덤으로 얻는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나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남편의 의도는 나와 달리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동해안 최북단 항구인 대진 항에 가서

새해에 못 본 일출을 볼 것이며

싱싱한 명태와 도루묵도 실컷 먹고

오겠다고 단단히 별렀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예상과는 달리 아무리 찾아도 명태와 도루묵은

보이질 않았는데 저녁을 먹으러 찾아간

식당 아저씨가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자기도 선주(船主)인데 명태 잡아본 지가

언제인지 모른다며 대진 항에 명태 씨가 말라버린 것 같다고

혀를 쯪쯪 찼다.

아, 남편의 실망스런 표정이란...

 

 

세 시간 넘게 달려오면서,

중간에 배고픈 것도 참고 오매불망 얼큰한 명태찌개만 떠올렸는데

현지 사정이 이렇다니 어쩌겠는가.

차선책으로 그 지역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백촌 막국수 집을 찾아갔으나

거기는 이미 영업시간이 종료된 상태.

“내일 다시 오세요!”라고 소리치는 주인 여자가 야속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다시 화진포로 와서

숙소를 잡은 다음 국수 한 그릇으로 대충 저녁을 때웠다.

항구에 어둠이 내리니 아무 것도 할 게 없었다.

그러니 다음 날 일출이나 기대할 수밖에.

 

 

이튿날 아침 7시 반이 조금 넘자 한겨울을 박차고

찬란히 솟아오르는 태양, 수평으로 쏟아지는 붉은 빛에

기(氣)가 똘똘 뭉쳐있는 느낌이다.

갑자기 내 가슴이 요동을 친다.

“야호, 너무 멋져! 장관이다!” 나는 함성을 터트렸다.

 

 

 

그런데 이렇게 흥분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그 차가운 바닥에 앉아서 오랫동안

땅과 해의 기운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성스럽기까지 했다.

저 광활한 우주 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걸 깨닫는 행복,

자연과 마주치면 누구든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으리...

 

 

하지만 낭만적인 감상에 오래 잠겨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웠다.

부지런한 어선들이 아침 바다를 헤쳐 가는 풍경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차 안에서 잠시 몸을 녹인 후 서둘러 화진포 바닷가로 향했다.

 

 

산과 바다와 호수가 어우러지고 울창한 송림이 펼쳐진 곳.

호숫가 갈대들은 추운 탓에 보석 같은 얼음을 달고 있었고

갈대숲은 철새들로 넘쳐 났다.

 

 

백로, 청둥오리, 천연기념물 201호라는 고니까지.

산과 나무들 그리고 지나가는 시간마저도 호수로 빠져드는 듯했다.

화진포에는 한때 남북 최고 권력자들의 휴양지도 있었다.

1954년 지었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에는

그가 생전에 애용했던 물품들이 주인을 대신해서 자리 잡고 있었고

호숫가 맞은편에 있는 김일성 별장 입구에는 그의 가족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곳 역시 6.25전쟁 전까지 김일성 가족들의 여름 휴양지였다는데

전망만큼은 이 대통령 별장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았다.

 

 

3층 전망대에 올라서니 탁 트인

동해 바다와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 바다를 향해 뻗어진 바위들의 기이한 파노라마가 절경이었다.

바람과 파도가 경연을 벌인 그것들은 전형적인 풍화 현상이 빚은

 천연의 조각 작품이 아니던가.

 

 

둥글고 평화로운 것이 있는가 하면

각지고 날카로운 것,

벌집 모양을 이룬 것, 또 어떤 바위는 바닷물이 쳐서

그대로 얼어붙어 마치 하얀 띠를 두른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바람과 파도는 걸작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내 눈은 날씨와는 반대로 뜨겁기만 했다.

 

 

다음 여정은 건봉사. 대진 항이 동해안 최북단 항구였다면

건봉사는 민통선에 있는 최북단 사찰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민간 통제구역이었고

아직도 곳곳에는 철조망과 지뢰밭 표시가 있어 긴장감이 돌았는데

그래서일까 들어가는 절차도 꽤나 까다로웠다.

 

 

거기에는 사명대사 동상과 수많은 부도 탑이 있었고

오래된 절에서 풍기는 시간의 냄새가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건봉사가 유명한 건 부처님 진천사리를 만나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절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 진천사리는 사명대사가 일본까지 가서 찾아왔다고 했다.

절 입구에는 불이문(不二門)이라고 쓰여 있었다.

 

 

두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면 번뇌의 세계에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일까?

내 멋대로 해석하다가 남편에게 물으니 그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폭설이 내린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천지 사방에는 파란 하늘과 눈부신 설산뿐이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이 생각났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건봉사 주변은 그야말로 눈의 고장이었다.

 

 

인적 없는 평화로운 산사에서 역사를 회상하면서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자신을 돌아보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길들이 여러 갈래로 펼쳐져 있었는데

청정한 그 길이 우리에겐 상쾌한 산책로였지만 스님들에겐 참선의 길이었다.

 

 

마침 스님 한 분과 마주쳤다.

추운데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는 스님의 권유가 있었지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그냥 나왔다.

남편은 진작부터 와 보고 싶은 절이었는데 소원을 풀었다며 좋아했다.

유레카(eureka 찾았다는 뜻)라도 외치고 싶을 정도라고 한다.  

 

 

버리는 자는 진정 평온을 얻는다고 잠시나마

 내면의 욕망을 털어버린 듯했는데

그러나 남편은 아직도 명태에 대한 미련은

못 버린 듯 이번에는 거진 항으로 가잔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상 무리였다.

 내가 우겨서 곧장 서울로 차를 몰았다.

 

 

남편의 아쉬움을 달래 주고자 중간에 원통 오일장에 들렀다.

제일 먼저 생선 파는 곳으로 갔으나 거기에도 생태는 없었다.

하여 생태 대신 동태를, 그리고 도루묵과 임연수를 샀다.

사실 겨울 바다 구경을 핑계로 해서

싱싱한 생선과 회를 먹겠다고 야심차게 달려갔건만

이틀 동안 우리가 먹은 거라곤 막국수와 순대국 한 그릇이 전부였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동태찌개에다 도루묵조림으로 포식을 했다.

 

 

막걸리도 곁들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은 본의 아니게 참 알뜰한 여행을 한 셈인데

남편은 건봉사 절을 찾은 것이 가장 큰 의미였다고 말한다.

 나는 일출 본 것?

 

 

 언제 어느 때 만나더라도

늘 신비로운 자연과의 교감!

벌써 남녘에는 봄이 움틀 준비를 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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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라도 올 것 같은 잔뜩 흐린 날씨,

구미협의회에서 강의를 끝내고

터미널에 도착하여 동서울 행 차표를 끊었다.

 

 

출발 시간까지는 아직 40분의 여유가 있어

커피 한잔을 사들고 의자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다.

 

 

 

대합실 안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히터 주변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이들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빛바랜 주황색 의자에 앉아서

잔뜩 웅크린 채 TV만 보고 있었다.

 

 

겨울날 터미널 근처는 바람이 더 맵고 을씨년스럽다.

예전 같으면 난로라도 있어서 훈기를 더했을 텐데

넓은 대합실에 난방 기구라고는 작은 히터 한 대뿐,

냉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버스터미널에 가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있다.

특히 계절이 바뀌면 계절병이 도져 서울의 바짝 마른

회색 빌딩 숲을 떠나고픈 욕구를 주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떠날 때가 많은데

장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곳이 지방의 작은 도시여도 좋고 시골이어도 좋다.

한적한 어촌이면 더욱 좋다. 다만 혼자여야 한다.

남들은 청승맞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가끔씩은 일상의 치열함에서 한 걸음 물러나 생각을 정리하고 오면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요즘 힐링이 대세라는데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그러려면 외롭더라도 나 홀로 여행이 제격인데

처음이 어렵지 몇 번 시도하다 보면

혼자만의 여행에서 얻는 매력이 의외로 많다.

 

 

한편 터미널에 가면 꼭 누군가가 나를 찾아서

먼 길을 달려와 방금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나에게 달려올 것만 같은 생각도 든다.

 

 

하여 누가 온다는 약속도 없는데

괜스레 인파에 휩쓸리는 숱한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원초적인 본능이 아닐까.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되는 그 곳,

거기에는 행복한 여행도 있고

오랜만에 마주한 친지과의 설레는 상봉도 있겠지만

때로는 멀리 떠나는 가족을 배웅하고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터미널을 빠져 나가는 사람도 있으리라.

 

 

마침 내 앞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 한 쌍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각자 커다란 가방 하나씩을 갖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떠났다가 바로 되돌아 올 모양새는 아니었다.

 

 

가방의 크기로 봐서는 이박삼일이나 삼박사일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아님 해외여행?

뭐가 그리 좋은지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연신 웃음보를 터트리고

남자는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

 

 

찰랑찰랑하니 여자의 머릿결이 참 고와 보였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 함께 멀리 둘만의 여행을 떠나고 싶고

그리하여 함께 머물고 싶은 그런 간절함으로 손을 꼭 잡은 젊은 연인들.

 

 

겨울날의 오후, 칙칙한 터미널 분위기 속에서

청춘의 반란은 두드러져 보였다.

나에게도 저렇게 푸르른 시절이 있었나,

아무 근심 없이 해맑게 한껏 웃었을 때가...

 

 

미소를 머금고 젊은이들 사랑의 구경꾼 노릇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 껌을 팔아달란다.

70대 중반쯤 되었을까,

남루한 옷차림에다 깊은 주름살이 패어있는 할머니의 얼굴은

마른 검불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노란색의 쥬시후레쉬껌 한 통에 천 원이란다.

보아하니 개시도 못한 듯했다.

버스표 끊고 남은 잔돈 이천 원으로 껌 두 통을 샀다.

너무도 고마워하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보니 일전에 읽었던

오탁번 시인의 <해피 버스데이>라는 우스운 시가 떠올랐다.

 

 

해피 버스데이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해피 버스데이 투유!

 

 

실제 상황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훈훈해졌다.

다소 지루했을 40여 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드디어 탑승! 손님은 나까지 포함해서 고작 여섯 명.

서울 가는 기름 값도 안 될 적은 인원이었다.

승객이 적어서일까 기사는 얼어죽지 않을 만큼만 히터를 틀어주었다.

나는 외투를 단단히 여민 다음 팔장을 끼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위는 그런대로 견딜만했으나 발이 몹시 시려워 잠이 오질 않았다.

털장갑을 벗어서 발에다 꼈다.

구미에서 서울로 오는 세 시간 동안 나는 계속 그 자세로 있었다.

겨울이 점점 깊어가는구나...

버스가 구미 IC를 빠져 나오자

홍시 같은 노을이 천천히 서산마루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서울이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다시 일상이고 아파트 숲이다.

머릿속은 빠른 속도로 분주해지고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의 목록도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몹시 배가 고파서 당장은 밥 생각뿐이었다.

마중 나온 남편은 뭐라도 먹고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냥 가겠다고 했다.

어딘가 또 들러서 자리를 잡는다는 게 귀찮고 번거로웠다.

시간도 많이 늦었다.

“엄마, 아빠 어서들 오시와요!”

 

집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딸이 밥상을 차려놓았다.

메뉴는 뚝배기 불고기 일명 뚝불!

거기에다 막 썰은 포기김치와 구운 김이 전부였다.

아까 남편이 밥 먹고 들어가자고 했을 때

나는 식당 밥이 아닌 가정식 밥이 먹고 싶었다.

아침은 씨리얼, 점심은 수강자들과 스파게티를 먹었으니

쌀밥에 고기반찬이 반가울 수밖에.

 

 

<춘향전>에서 한양에 과거시험 보러 갔다가

상거지 차림으로 돌아온 이몽룡이 월매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밥아, 너 본지 오래다.” 하며 아귀아귀 먹던 그 장면,

내가 꼭 그 꼴이었다.

 

 

밥 한 공기에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나니

지친 몸과 마음에 다시 에너지가 차오르고 생기가 돌았다.

날마다 먹는 밥이지만 확실히 밥처럼 신축성이 강한 음식은 없는 것 같다.

 

 

사실 이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남편한테서 온

문자메시지가 생각났다.

‘결혼기념일 축하해요.

우리 앞으로 더 사랑하고 행복하게 삽시다!’

생전 문자메시지라곤 ‘그래’ ‘알았어’ 같은

단답형이 고작이었는데

글쟁이 마누라를 두시더니

어느 새 이런 수준급(?) 모국어까지 구사할 수 있다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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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녀 지우가 탈장 수술을 받고난 후

처음 병원에 가는 날이다.

오늘의 미션은 배에 차있는 물을

주사기로 뽑아내는 일.

 

 

그런데 병원에 대한 두려움이

큰 두살바기 아기가 침대에 얌전히 누워서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

나는 가기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회사에 반차를 내고 오겠다던 딸은

사정이 있어 못 오고

양쪽 할머니(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나서야 했다.

그래서 불안이 더 컸다.

 

 

 

 

딸은 계속 문자를 보내왔고

의사에게 물어보라는 주문도 많았다.

아이가 왜 갑자기 먹는 양이 줄었는지,

이제 통 목욕을 시켜도 되는지,

수술부위 매듭은 저절로 없어지는지 등등...

아마도 워킹맘들이 가장 가슴 아플 때가 이런 때이리라.

 

 

아무리 사회적 소신이 확고한 엄마들이라도

이렇게 아이가 아플 때에 함께 해주지 못한다는 시점에서는

갈등과 회한 속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아무튼 걱정을 해도 병원엔 도착했고,

담당의사의 수술 관계로 진료는 예약된 시간보다 30분 이상 늦어졌다.

한창 걸음마에 재미를 붙인 아이가 가만히 앉아있을 리가 없다.

고 짧은 다리로 종종거리며 병원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가 저를 쳐다보는 어른들에게는 빠이빠이 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이날 소아과 외래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힘없고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우리 지우가 제일 발랄해 보였다.

 

 

세상에 나온 지 이제 겨우 1년4개월,

아이의 인지구조에는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믿음이 굳게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누구든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애착형성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만 3세까지 형성된 안정된 애착형성이 평생을 간다고 하지 않던가.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그런데 병실 문을 채 들어서기도 전에

아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한다.

자지러지듯 우는 아이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두 할머니는 같이 우는 형색이었는데 의사는 아무 표정 없이

간호사에게 물 뽑을 주사기를 가져오라고 주문한다.

그때 안사돈이 말했다.

 

 

“선생님, 오늘 꼭 물을 빼야 하나요?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그러시겠어요? 그럼 일주일 후에 다시 나오세요.

그동안 물이 몸 안으로 조금씩 흡수될 수도 있으니까요.”

의사는 선선히 허락했다.

나도 안도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아이가 너무 가여워서 다음으로 미뤘는데

 마음 약한 할머니들이 일처리를 야무지게 못했다고

혹시 딸이 뭐라 하지는 않을까.

만일 딸이 같이 왔다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하라고 했겠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병실 문을 나서니 아이는 언제 그랬냐 싶게 다시 명랑해졌다.

울음 끝이 짧은 아이,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눈을 닦아주고

바나나 한 개를 까주었더니 단숨에 먹어치운다.

 

 

곁들인 우유 한 병도 원샷! 그리고는 몇 개 안 되는 앞니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다.

너무 귀엽다.

세상 어느 화가의 어떤 그림을 가져다 놓아도

이만큼 행복하고 평화로운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모유를 먹어서인지 한 점 물살이라곤 없는

탱탱함으로 똘똘 뭉친 작은 아이, 제 어미를 쏙 빼닮았다.

되돌아 온 자리는 어디던가, 내 작은 몸으로 낳은 딸이

또 딸을 낳아 이렇게 세월의 산맥을 이루었구나.

 

 

요즘 와서 지우 덕분에 미소 짓는 날이 많아졌는데

아이와 함께 책 볼 때가 더욱 그렇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한다면 틀림없이

총명한 아이가 될 거라는 믿음 때문에

갓난아기 때부터 책을 통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싶었다.

 

 

다행히 아이는 책 보는 시간을 좋아했다.

책 볼 때만큼은 집중력을 발휘하여 다 읽을 때까지 지그시 앉아 있는다.

또 어떤 책을 가져오라고 주문하면 제 책이 꽂혀있는 곳으로 가서

그 책을 용케도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벌써부터 책을 밝히다니, 우리 지우는 천재인가 봐!”하며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지우의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죤 두이의 ‘공유된 경험’이 참으로 중요한 개념임을 깨닫는다.

지금은 모든 학습이 반복된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이니까...

그래서 오뉴월 하루 빛이 무서운 아이 시절에 가슴 속 환희를 공유하는 기쁨을

지우와 더 많이 나누고 싶다.

 

 

지우가 빨리 커서 공원도 가고 전시회도 가고 연극도 함께 보러 가는 날을

나는 손꼽아 기다린다.

어차피 제 엄마는 직장에 가서 할 수가 없을 테니

그 역할을 할머니가 맡을 수밖에.

그런데 아침에 엄마가 회사에 가고난 후부터 저녁 퇴근시간까지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따라 다니고는

저녁에 엄마가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는 시점부터 잠들기 전까지는

 제 엄마만 쫓아다닌다.

 

 

할머니는 안중에도 없다.

역시 엄마는 엄마다.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은 퇴근 시간과 맞물려 무척 복잡했다.

그러나 추운 거리의 어수선함과는 상관없이

지우는 친할머니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동요메들리를 즐기고 있었다.

 

 

가끔씩 율동(?)도 곁들인다.

그런 귀염둥이 손녀를 안고 있는 나는

온기 가득한 난로를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아플 때 옛날에는 친정어머니가

 ‘네 배는 똥배, 내 손은 약손.’ 하면서 배를 문질러 주셨는데

아이의 수술 부위가 하필이면 배꼽자리인지라 그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지우에게 속삭여 주었다.

“지우야, 세상은 경이롭고 신기한 것 천지란다.

그래서 끊임없이 도전하며 사는 거란다.

두드려보고, 눌러보고, 던져보고, 밟아보고, 하고 또 하고 해도 해도 또 하고 싶은...

하지만 병원 가는 일은 도전 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크렴. 힘내라 아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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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인데도 식구들이 다 나가고

혼자 있게 되니 무료했다.

남편은 새벽같이 강원도 홍천으로 놀러갔고

딸은 해외 출장 중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 나갈 사람도 없고

올 사람도 없는 이 시간.

늦잠이나 잘 요량으로

다시 침대 속으로 향하는데

때마침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언니! 나야, 다행히 집에 있었네.

 나, 다음달 12일 한국에 다니러 갈 거야.”

“그래? 잘 됐다.”

 

 

싱가포르에 사는 여동생의 전화였다.

곧 여름 방학을 맞는 두 아들과 함께 와서

시어머니가 계시는 수원에 머무를 것이며,

이번에 와서 꼭 해야 할 일,

그리고 선물은 무얼 사가면 좋겠냐는 등

꽤 긴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 밀려오던 잠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아무리 무료해도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할 필요까지는 없는 터라

찌뿌둥한 몸을 집안 일로 풀기로 하고 청소와 빨래부터 해치웠다.

 

 

 

 

 

아이들 방에 이불과 침대보까지

다 벗겨내서 세탁기를 두 번이나 돌렸다.

혹시 동생네 식구가

며칠 자고 갈지도 모르니까

 침구 정리는 미리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곤 쇠고기를 듬뿍 넣어 끓인 떡국으로

혼자만의 아침상을 차렸다.

반찬은 배추김치와 동치미가 전부였지만

부유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셨다.

 

 

혼자 마시는 커피는 더욱 향기로웠다.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잠시 여유롭고 격조 높은(?) 분위기에 취해 있다가

불현듯 누군가에게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그래, 어머님한테 편지를 쓰자.’

 

 

제주도에 사시는 어머님은 이사한 우리 집에 처음 오셔서

무엇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셨는지 4박 5일 동안

있는 듯 없는 듯 계시다가 가셨다.

팔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호기심에다

 말씀도 재미나게 잘 하셔서 늘 이야기보따리가 풍성했던 분이신데,

끼니때가 되면 차려놓은 밥만 말없이 드실 뿐 도통 말이 없으셨다.

 

 

‘내가 뭘 잘못 했나?’ ‘이사 와서 새롭게 장만한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거슬려서

그러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매일 수업해 가면서

혼자 이삿짐 꾸리느라 동분서주했건만 애썼다는 칭찬 한마디 없이

입 꽉 다물고 계신 어머니가 야속했다.

대화가 끊긴 채 한집에서 며칠을 지내자니

마치 사포 같은 것에 긁힌 듯 마음이 쓰라렸다.

 

 

시동생과 어머님이 제주도로 가시고 난 후

곧 바로 편지를 썼다.

이사하게 된 배경과 자금내역을 상세히 썼고

아울러 어머님이 무엇 때문에 그리 언짢으셨는지,

그간 불편했던 내 마음을 글로 정리해서 부쳤다.

 

 

물론 이런 내용들은 어머님이 우리 집에 계시는 동안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로 하면 감정이 실려 차분한 대화가 힘들 것 같아

문자언어로 대신했다.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 판단일 뿐,

이번에는 별로 유쾌한 내용이 아닌

편지를 받고 난 후의 어머님 반응이 염려스러웠다.

 

 

2주 후, 검정색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지 세 장 분량의 긴 답장이 제주에서 날아왔다.

거기에는 어머님이 오해하셨던 부분도 들어 있었고

당신의 지난날의 아픈 회상도 담겨 있었다.

없는 집에 맏며느리로 시집 와 고생 많았다는 이야기도 처음으로 하셨다.

 

 

그리고 사연 끝에다 그 동안 서로 앙금처럼 남아 있었던

섭섭한 마음일랑 다 잊자는 당부의 말과 함께

‘사랑한다!’는 말도 몇 번이나 덧붙이셨다.

 

 

코끝이 찡했다. 역시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말보다 글의 힘이 컸다.

만일 마주보고 이야길 했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그토록 쉽게 할 수 있었을까?

 

 

살다보면 이렇게 꼬이고 꼬인 매듭 같은 시간을 건너야 하는 일도 있는 법,

결국 그때의 일은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돼 이름다운 이해로 끝났다.

사실 내 편지를 받고 어머님이 더 노여워하지는 않으실까 걱정도 많이 했는데

다행히 며느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하여

 답장까지 보내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오랫동안 봉사하신 경험도 작용했던 것 같다.

생전 처음 받아본 어머님의 편지글.

황해도 해주에서 여고를 졸업하신 어머님의 글 솜씨는 훌륭했고 감동적이었다.

남편 말대로 글공부를 계속하셨다면 아마 박완서 못지않은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답장을 받고 나서 이젠 어머님께 가끔씩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화보다는 따뜻하고 정감이 있는 그런 편지를.

인터넷이 일반화 된 요즘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메일이나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글을 쓰고 읽지만

글을 써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속도감이 없어서인지 편지 쓰기는 점점 실종되어 가는 느낌이다.

 

 

편지를 다 쓰고 나서 TV 요리 시간에 소개된 ‘해물완자 전골‘을

만들기 위해 장보기를 했다.

보기에 재료와 요리법이 간단하면서도 푸짐해 보였다.

음식을 만들면서 언뜻언뜻 부엌 창문으로 지나가는 사람 구경도 하고

김치 볶음밥도 만들어 먹었다.

 

 

저녁엔 삶은 고구마로 식사를 대신하고

좀처럼 진도가 안 나가는 책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를 집어 들었다.

역시 더디다.

베란다 화단 옆 의자에 앉아 책을 건성으로 읽다가 장미꽃과 눈이 마주쳤다.

장미꽃에게 착하다는 눈인사를 해주었다.

게으름 피지 않고 주어진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자기 할 일을 다 했으니 말이다.

 

 

예쁜 꽃, 착한 꽃.

그런데 없는 솜씨 부려가며 만든 해물전골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은 왜 여태 소식이 없을까?

아무도 없는 텅 빈집에서 세끼 밥 다 찾아 먹고

빨래와 청소하고, 전화 받고, 편지 쓰고, 인터넷하고...

혼자 있는 시간은 길고도 풍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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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노트

|함수연| 만남 2012. 12. 21. 09:59

 

지난 일요일 ‘엔딩노트’라는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을

막내딸이 6개월간 쫓아다니면서

찍은 일본 영화인데 그 딸은 평소 가족의 일상을 찍어온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너무 슬퍼서

울게 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후반부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을 정도로

시종 잔잔했다.

 

간간이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파는 아니다.

끝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주인공은 월급쟁이로 일하다

은퇴한 69세의 스나다 도모아키 씨.

 

회사 임원으로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그는

건강검진을 통해 위암 4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43년간 가족 부양하면서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는 노후를 맘껏 즐기리라 생각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람! 전혀 예상치 못한 일.

수술도 못하고,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손 쓸 방법도 없이

그저 죽음을 바라보아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6개월의 시한부 삶, 그는 얼마간의 번민 끝에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를 대하듯

꼼꼼하게 본인의 죽음을 준비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본인과 남겨질 가족 모두에게

위안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퇴직 후 준비했던

인생 2막을 대신해서 엔딩노트를 쓰는 것이다.

 

스나다 씨의 엔딩노트는 말하자면 그의 버킷리스트이다.

결혼식장 물색이후 처음으로 아내와 식장(장례식장) 답사하기,

가족들과 바닷가 여행하기, 평생 거리를 두었던 신(神) 믿어보기,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손녀들 머슴 노릇해주기,

자신의 장례식 초청자 명단 작성하기, 예금과 부동산,

신용카드와 통장에서 자동이체 되는 것들을 정리하면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목록들을 기록해 나갔다.

 

얼핏 보면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이렇듯

그의 엔딩노트는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진솔했다.

엔딩노트에 적은 리스트를 하나 둘 시도하는 동안

그는 항암치료로 인해 몸은 점점 바스라져 갔다.

 

그럼에도 ‘아프다’ ‘슬프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아빠는 힘내고 있어.”라며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가족과 함께 노후를 즐기는 평범한 노인처럼 행동했다.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가족들 역시 슬퍼하기보다는

아빠의 마지막이 행복하길 빌며 함께 힘을 낼 수 있었으리라.

스나다 씨는 아픈 와중에도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

가족여행을 떠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유머감각도 잃지 않았다.

“장례식 중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물어보라”고

농을 건넬 정도로 씩씩했다.

“69년이나 행복하게 살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긍정적 생각의 결과이다.

영화에는 스나다 부부의 신혼 시절과

아이들 어릴 적 함께 놀던 장면, 직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중년 가장의 모습도 간간이 나왔는데

그들도 우리 부부와 비슷한 세대이기에 공감이 컸다.

늙으신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는 게

얼마나 큰 불효인지를 아는 스나다 씨는

그래서 죄송하다는 말로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특히 손녀를 지극히 아끼던 주인공이 임종을 앞두고

의식을 잃었다가 손녀딸들의 목소리를 듣고 의식을 되찾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절로 나왔다.

비록 어리지만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를 아이들은 알 것이다.

또한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우리가 흔히 듣는 주례사 중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랑하며 살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단순해서 그냥 흘려듣게 되지만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스나다 씨 부부는 뒤늦게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들 부부는 오랫동안

각방을 쓰며 서로가 바쁘게 살았기에.

마지막 순간 아내와 자식 손녀들에게 둘러싸인 스나다 씨는

“이렇게 다들 모이니 여기가 천국”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리고 부인에게는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라는

마지막 고백을 남긴다.

반면 부인은 당신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어

미안하다고 화답한다.

일부러 감정을 쥐어짜지 않는데도 객석 곳곳에선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우리의 이별 장면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

앤딩 장면은 처마밑 고드름처럼 쨍하게 가슴을 찔렀다.

극장을 나오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영화 보신 소감은?”

“어머니를 나보다 먼저 잘 보내드리고

그리고 당신에게는 평생 머슴으로 살기로 했네!”

흐흐 내가 극장표 끊어주길 참 잘했네...

이 영화는 평소 잊고 살지만

누구에게나 닥칠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과연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가까운 이들과는 어떻게 이별해야 할까,

지난해 10월 개봉한 이 영화가 상영된 후

일본의 중, 장년층 사이에서는

‘엔딩노트’ 쓰기 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죽음은 벌이 아니라 긴 여행 끝 귀향이라고 했다.

대부분 무방비로 죽음을 맞으면서,

빠른 속도로 고령화돼가는 우리에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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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사절

|함수연| 만남 2012. 11. 19. 10:35

가을이 깊어지면서 본격적인 추수철에 접어들자

우리 집에는 각종 택배가 도착했다.

 

 

 

10월 중순 경에 청도 반시를 시작으로 해서

곶감, 현미찹쌀과 서리태, 메주콩, 유자차, 쌍화차, 꼬막까지,

거의가 농산물 아니면 수산물이었다.

 

 

종류만큼이나 지역도 다양했다.

횡성, 상주, 포항, 전라도의 고흥과 벌교에서 온 물건들.

남편이 지역 특산물을 총망라해서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배달을 시킨 것이다.

 

 

사나흘 간격으로 오는 물건들은 거의가 박스 주문이라

양도 엄청나게 많았다.

따라서 제대로 보관을 하지 않으면

돈만 날릴 판인데 우리 집 냉장고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남편은 다 못 먹을 것 같으면 주위에 나눠주라고 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양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남편에게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택배 사절을 선언했다.

 

 

남편이 가입한 ‘귀농 사모’ 카페에다 신청해서 받는 농작물들은

거의가 유기농이고 값도 싼 편이라

처음 잡곡류들이 배달돼 왔을 때는 나도 좋아했다.

곡물은 어차피 두고 먹을 일용할 양식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머지 물건들은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다.

조금 비싸더라도 먹고 싶을 때마다 조금씩 사다 먹는 게

여러 날 냉동 보관했다 먹는 것보다 훨씬 신선하고 경제적이라는 걸

살림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리고 무조건 산지 주문이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남편에게 재차 말했다.

더구나 식구도 없는데 그건 분명 낭비였다.

어쨌든 협박과 읍소를 거듭한 끝에

다시는 택배 주문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데 작심삼일도 아니고 그로부터 이틀 후에 메주콩 한 말과

꼬막 한 상자가 또 왔다.

나하고 약속하기 전에 이미 주문했던 터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니 우리 집이 마트도 아니고, 너무 화가 났다.

나는 필요 없으니 환불하라고 했다.

헌데 남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도대체 메주콩을 어디에 쓸 거냐고 물었더니

두유도 갈아먹고 콩비지도 해먹을 거란다.

청국장까지 하시겠단다.

오, 맙소사. 지난 가을에 우리가 농사지은 무로 만든 시래기와 무말랭이가

아직도 잔뜩 있는데 이제 청국장까지 만들라니...

하긴 남편은 평소에도 된장 고추장을 직접 담가 먹으면 좋겠다고

내게 은근한 압력을 가해왔다.

 

 

언젠가 내가 하소연을 하니 언니가 말했다.

“너는 맏며느리인데다가 또 무엇이든지 재료만 갖다 주면 겁내지 않고 잘해내니까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보니 언젠가 친구 남편도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다.

 

“지현 엄마가 다 감당할 만하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이번 사건의 핵심은 남편의 무분별한 소비 형태

그것도 온통 먹을거리뿐인 과소비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

내가 일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원이 아니었다.

 

 

메주콩과 꼬막이 배달된 날,

나는 그것들을 현관문 앞에 그대로 놓아둔 채 집안에 들이질 않았다.

남편은 별 말이 없었다.

자기가 약속을 안 지킨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녁에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다말고 벌떡 일어나더니

저 멀리 벌교에서 왔다는 그 꼬막을 상자 째 들고 나가버렸다.

 

돌아온 후에도 꼬막을 어떻게 처리

했는지 나는 묻지 않았고

남편 역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음 날 저녁에 203호 아줌마가 찾아왔다.

“어제 꼬막 맛있게 잘 먹었어요. 아주 싱싱하던데요.”

 

 

그러면서 생닭 한 마리를 내밀었다. 토종닭이라고 했다.

“네, 꼬막이라고요?”

닭 봉지를 안고 내가 잠시 어리벙벙해 있는 사이에

남편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아, 맛있게 드셨습니까? 근데 뭐 이런 걸 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여자가 사들이고 남자들이 만류하는 입장이라는데

우리 집은 그 반대였다.

 

 

헌데 이상한 것은 남편의 소비가 어느 특정한 것,

예컨대 씨앗이나 화초, 먹을거리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기 와이셔츠라도 스스로 사 입으면 좋으련만

옷이라든가 신발 가구 따위들은 관심 밖이다.

 

 

남편의 관심은 오로지 먹는 것.

제철에 나는 질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뿐인데

농사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그 생각은 더욱 강화된 것 같다.

 

 

중학교 때 ‘엥겔계수’라는 걸 배웠는데 생활비 중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적을수록

 ‘선진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애들 학비도 다 끝났으니 이제 우리 부부는 먹고살 일만 남았다.

하지만 남편의 이런 음식물 과소비가 멈추지 않는 한

앞으로의 우리 생활은 시간으로 보나 비용으로 보거나

엥겔계수가 점점 높아지는  ‘후진형’이 될 것이니 이를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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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 ;;

내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비둘기에게 시달린 생각을 하면

평화의 상징은커녕 완전 고통과 증오의 대상이다.

 

 

어느 날 베란다 바깥쪽에서

 “꾸르륵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소리는 계속 들려왔고,

그것은 사람의 신음소리 같기도 한

조금은 기분 나쁜 소리였다.

 

 

그로부터 한 사나흘이나 지났을까,

볕 좋은 날을 골라 이불을 말리려고

베란다 창틀을 열어젖히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베란다 밖에 붙어있는 에어컨 실외기 밑에

하얀 비둘기 알 두 개가 얌전히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엔 온갖 배설물과 깃털과 지푸라기들이 널려 있었다.

 

 

얼마나 긴 시간에 걸쳐서 작업을 했는지

그것들은 마치 시루떡에 고물을 얹어 놓은 것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에어컨 전선을 감아 놓은 검정색 비닐 테이프를

비둘기들이 전부 물어뜯어서 굵은 철사는 맨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날부터 비둘기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비둘기 털과 배설물을 방치할 수가 없었다.

일단 창가에서 끼륵거리는 소리가 났다하면 문을 열어 날려 보냈다.

하지만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날아왔다.

대개는 둘이나 넷씩 짝을 지어 다녔는데

아무리 인기척을 보내도 굳건하게 제 자리를 고수하는 놈도 있었다.

그럴 땐 지팡이로 에어컨 몸체를 세게 두드려서 내쫓았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도대체 이 골칫덩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보통 고민이 아니었다.

 

 

궁리 끝에 한번은 시장에 가서

바퀴벌레 약을 사다가 뿌려 보았다.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알은 세 개가 더 늘었다.

하여 알을 품느라고 비둘기는 더 비번하게 날아들었고

신음소리도 더 크게 들려왔다.

 

 

집에 있어도 불편했고 외출을 해서도 ‘비둘기를 쫓아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남편은 그냥 놔두라고 했다.

 

 

그런데 9월 반상회 때 비둘기 얘기가 나왔다.

알고 보니 5층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장 일을 맡고 있는 5층 아저씨는 끈끈이 쥐약을 사다 놓자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 짓은 못할 것 같아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옥상에 펼쳐 놓았던 고추를 걷으러 올라갔다가

 나는 또 한번 충격적인 장면과 마주쳤다.

빨리 마르라고 고추를 반으로 잘라서 널었더니

고추씨가 많이 떨어진 탓에 비둘기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씨를 쪼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인기척에 놀란 비둘기들이 날아간 후

자세히 보니 깔개 밑에 가지런히 누워있던 고추들은

시멘트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고

사이에는 깃털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오, 맙소사! 이곳 또한 비둘기 세상인 줄을 몰랐다니...

기왕에 고추 농사를 지었으니

빛 고운 태양초 고춧가루도 내손으로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일념으로 날마다 그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했건만 뜻밖의 훼방꾼이 숨어 있을 줄이야.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다음날에 119로 문의를 해봤다.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난 상담자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자기네가 도와줄 수 있는 사항은 아니라며 만일 비둘기가 다쳤다거나

날지를 못해서 구원을 요청하면 그때는 출동해서 수거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같은 경우는 사설로 운영하는 해충박멸협회에

연락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비둘기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최근 따뜻한 겨울이 지속되면서 대도시에 비둘기 수가 급증하고 있으며

1년에 4~5번 이상 번식하는 비둘기는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한겨울에도 알을 낳는다고 한다.

 

 

이렇게 번식률이 좋으니 개체수가 엄청나게 늘어갈 수밖에.

법제처에서는 비둘기가 ‘야생조류’라는 유권해석을 내렸고

이 때문에 비둘기를 전문으로 퇴치하는 업체가 여러 곳에 등장했단다.

 

 

비둘기 배설물과 털을 통해서 사람에게 유해한

세균이나 기생충이 전염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래서 최근 공장이나 가정에서 비둘기 퇴치 요청이

심심찮게 들어온다고 했다.

만일 말라붙은 비둘기 똥이 바람에 날리거나

비둘기의 잔해로 인해서 예기치 못한 전력 사고가 발생된다면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혼 초, 집들이라는 명목으로 남편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는 듀엣으로 ‘비둘기 집’을 불렀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 ~ ~”

정말 그때는 비둘기가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었으며

다른 새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지금도 생각난다.

88올림픽 개막식 때 잠실벌을 수놓았던 수천 마리의 비둘기 떼를.

 

 

비둘기 집도 참 예뻤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살았던 둔촌 아파트 저층 옥상에도

알록달록한 색깔의 비둘기 집이 여러 채 있었다.

 

 

아마도 관리사무소에서 별도로 지어준 것 같았다.

비둘기 집은 바로 우리 집 앞 동에 있었던 지라

우리는 날마다 비둘기가 들고 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가끔씩은 아이들이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 주기도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가 아파트 숲으로 바뀌자

서식지를 잃은 많은 새들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런데도 비둘기만큼은 계속 세를 불리고 있고

그로 인한 피해 또한 만만치 않으니 그 놈은 이미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그나저나 평화로운 방법으로 비둘기 퇴치할 묘안을 나는 아직도 찾질 못했으니 어쩐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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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일 던져놓고

어디론가 떠나야만 할 것 같은 계절.

벌써 산간지방에는 첫얼음이 얼었다는데

더 늦기 전에 단풍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단풍과 낙엽과 추억이 함께 머문 곳,

나의 모교를 찾아 나섰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늦은 오후 시간의 대학로 거리는

젊은이들로 초만원이었고

수많은 공연장과 카페와 어지러운 간판들도 여전했다.

 

 

 더구나 이날이 빼빼로 데이라나 뭐라나.

편의점과 빵집 앞은 화려한 포장의 특정과자들로 넘쳐났으며

젊은 연인들을 향한 호객행위도 맹렬했다.

그러나 서운하게도 나에게 판촉활동을 벌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과자 회사의 얄팍한 상혼이라 비난해도

이날만큼은 나도 충분히 구매의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도 젊은 사람한테만 해당된다 이거지.

그래, 젊음도 낭만도 다 때가 있거늘 실컷 즐기려무나.’

 

 

애써 담담한 듯 걸어가는데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들의 발랄하고 거침없는 몸짓이

그들과 나의 연령차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갑자기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생각에

자연스레 ‘카사노바’를 떠올렸다.

그곳은 우리 과 친구들의 아지트라 할 만큼

 거의 매일 들렀던 찻집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간 다방, 야간 호프집이었다.

 

 

당시에는 명동이나 대학가에 통기타 문화를 대변하는

그런 형태의 라이브 카페가 대유행이었다.

우리들은 ‘카사노바’에서 자주 차와 맥주를 마시고

신청곡도 주문했지만 아주 가끔씩은 그래도

국문과 티를 낸다고 문학과 실존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그러나 십여 년 만에 찾아간 그 찻집은 CGV 영화관으로 바뀌었고

학교 바로 앞 ‘명륜 다방’ 역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변해버렸다.

 

 

차 마시기를 포기하고 교정으로 들어섰다.

내 젊음이 녹아있는 그리운 곳.

성균관이라는 교패를 보자 콘크리트 같던 마음에 비로소 피가 도는 것 같았다.

교문 입구에서부터 겨자색, 주황색, 밤색 등 형형색색의 나뭇잎이 어우러져

 캠퍼스 전체가 애니메이션 화면처럼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위에서부터 붉은 물이 들어 아랫부분의 초록과 대비를 이루는데

빨강도 아니고 초록도 아닌 중간 톤이 어찌 그리도 곱던지...

정녕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가을의 빛!

이보다 더 조화로운 색조를 그 누가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오랜 만에 가져보는 이 여유.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무리지어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낙엽들이,

살아있다는 기쁨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화단에는 황국(黃菊)도 피어 있었다.

그 옆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동아리 모임 후 뒤풀이라도 하는 걸까?

여남은 명의 남녀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봄날처럼 싱그럽고 정다워 보였다.

여름에 무성했던 풀들이 쇠락하여 누런빛을 띠는 것처럼

나 또한 저들처럼 번성한 시절이 있었거늘,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이제는 세상의 모든 사태를 조금 떨어져서 관조할 뿐이다.

 

 

쇠락과 번영은 고정된 바가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아는 나이가 되었으므로.

초입에서부터 더 이상 어슬렁거렸다가는 금세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

이번에는 마사이족처럼 빠른 걸음으로 문과대학과 여학생 회관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 역시 건물이 바뀌었거나 리모델링해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넓디넓던 금잔디 광장도 광장이라고 부르기엔 형편없이 작아 보였다.

대신 중앙도서관은 늠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캠퍼스 한가운데 턱 버티고 있었다.

 

 

잠시 은행나무 아래 걸음을 멈추고 호젓한 나만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은행잎 천지였다.

샛노란 은행잎은 사랑을 간직한 엽서 같았고 황금빛 축제장 같기도 했다.

나는 바람에 업혀 요리저리 맴돌다 떨어지는 은행잎을 몇 장 주워 수첩에 끼워 넣었다.

“잘 왔지?” 은행잎이 나긋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 포근한 낙엽의 잔치가 끝나면 머지않아

나무에는 눈꽃이 피어나고 매서운 바람이 불 것이며

어렵디 어렵게 봄이 찾아와 또 한바탕 꽃 잔치를 치르게 되겠지.

 

 

멀리 커피 자판기가 보였다.

반가웠다.

늦가을 오후에 캠퍼스 벤치에서 홀로 마시는 커피.

그런데 커피를 마시다가 나는 문득 지나온 기억의 아픈 계단을 밟아버린 듯 신음을 쏟았다.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 그리운 친구 경순이.

많은 세월이 갔어도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나의 화두로 출렁거렸다.

 

 

강의실, 도서관, 식당,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삼청공원 넘어가는 후문 앞 오솔길까지 친구와의 추억은 캠퍼스 곳곳에 서려 있었다.

나는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경순이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대학에서 처음 만나 연인들처럼 서로가 반해 버렸다.

학교 가는 목적이 공부보다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주저 없이 말하였고

하루라도 못 보면 궁금하고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요즘 같으면 동성애자로 오해 받을 수도 있었겠다.

얼굴이 하얗고 가녀린 외모의 그녀는 특히 복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덕분에 나도 그녀와 붙어 다니면서 남학생들에게 공짜 밥과 차를 많이 얻어먹었다.

 

 

더욱 기막힌 일은 졸업 후에 서로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각각 남자친구를 소개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 두 사람은 동갑내기에다 같은 직장 동료였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 맞아 떨어져서 아마 우린 전생에 부부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혼해서도 일주 일이 멀다고 느낄 만큼 자주 만났다.

 

 

그랬었는데, 부부끼리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예기치 않게 찾아든 불행의 그림자가 그녀의 안락한 삶은 물론

우리의 오랜 우정까지도 송두리째 앗아갔다.

 

 

뇌성마비 장애를 안고 태어난 첫아들,

남편의 방황, 별거, 이혼,

끝도 없이 잇따른 절망의 늪은 연약한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깊고 험했다.

 

 

결국 친구는 주변의 모든 인연과 손을 끊고 연락 두절 상태로 들어갔다.

백방으로 찾아 다녔지만 허사였다.

나중에는 친구가 극단적인 선택만은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너무 커서 배신감마저 들었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만은 그럴 수 없다고,

도저히 그럴 수는 없노라고!

 

 

다시금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20대 초반에서 몇십 년에 또 몇십 년이 더해진 고목 같은 우리들 나이를 생각할 때,

이제 다시 만난다면 세상 가운데 우뚝 서서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나무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으련만...

 

 

사랑도 우정도 끝내는 다 놓고 갈 것이지만

사는 동안 나는 얼마나 더 간절하고 연연해할 것인가.

깊어가는 이 가을, 그리움의 빈 잔에 사랑의 열매를 채우기 위해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허영자 시인의 ‘가을 기도’를 나직이 읊조렸다.

 

 

가을기도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 주십시오.

뜨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먼 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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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잦아들자

본격적인 무더위가 찾아왔다.

그래서 더위를 잠시나마 식히고자

우리 집 옥상에서는 작은 파티가 열렸다.

친정식구들과의 저녁 모임이었다.

 

 

옥상 파티의 기본 메뉴는 삼겹살과 소주

그리고 텃밭에서 금방 따온

상추와 풋고추를 곁들였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들이 조촐한 야외 식탁을 중심으로

파라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모여 앉으니

어디 여행이라도 온 기분이었다.

 

 

손바닥만 한 텃밭과 물탱크 하나밖에 없는

콘크리트 옥상이지만

밤의 옥상은 낮처럼 덥고 짜증나고

꽉 막힌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비록 빼어난 야경은 없더라도

답답한 실내 공간에서 벗어나 별을 보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거기에다 작게나마 흙냄새까지 맡을 수 있으니

 이날 형제들과의 저녁식사는

여느 호텔 만찬이 부럽지 않았다.

 

 

도시에 살면서 늘 전원생활을 꿈꾸던 우리 부부는

차선책으로 4년 전에 지금의 옥상 텃밭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야외용 식탁과 파라솔, 고기 굽는 화로 등을 갖추고

종종 지인들을 불러들여 오늘처럼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같은 아파트 주민들과  어울릴 때도 있었다.

작년 여름 복날에는 옥상에서 반상회를 연 다음,

뒤풀이 행사로 삼계탕과 오리구이 파티를 했다.

공동주택에 딸린 옥상은 우리 집만의 단독 공간이 아니기에

이웃들의 양해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가 마련한 것들을

아파트 공동 시설물로 쓰도록 했고

채소가 필요하거든 언제라도 좋으니 맘껏 따다 먹으라는 부탁(?)도 해두었다.

 

 

옥상의 작은 땅은 하늘이 지붕이다.

바람과 햇빛과 비, 그리고 넉넉지 못한 흙을 덮고도 채소들은 잘 컸다.

고추와 상추, 깻잎, 가지, 뭐든지 심기만 하면 무럭무럭 자라니

아무래도 흙 속에는 삶을 부축해주는 지팡이 같은 힘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화로 위에서 지글지글 고기 굽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울러 형제들이 부딪치는 술잔의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큰오빠가 한마디 했다.

 

“야, 이름난 갈비 집보다 여기가 훨씬 낫다.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 않겠는 걸!”

 

 

정말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마시는 술은 쉽게 취하지 않았다.

또 취한들 어떠랴, 집이라서 문제될 게 없었다.

운전이 걱정이라면 다음 날이 공휴일이니 자고 가면 된다.

모두들 식당도 집도 아닌 낯선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다고 했다.

나중에는 양주 한 병을 더 가져 왔다.

은박지에 싸서 고구마도 구웠다.

술자리는 점점 더 깊어졌고 형제들의 비눗방울 같은 웃음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우리가 자랄 때는 한집에서 두세 살 터울의 칠 남매가 복작거리니

동기간의 살가운 정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형제가 너무 많아 사랑은커녕 서로가 손해 본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나는 집에서는 오빠 둘, 언니 둘, 동생 둘 사이에서 특징 없는 칠 남매의 중간이었고,

학교에서는 특별히 잘하는 과목도 못하는 과목도 없는 존재 희박한 그런 학생이었다.

 

 

어린 시절 서로 부대끼며 컸던 여러 형제들이 중간에 잘못된 일 없이

다들 건강하게 커서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지근거리에 살면서 함께 나이 먹어가니 이보다 큰 축복이 어디 있으랴.

 

 

세월의 집요함을 함께 견뎌온 이들끼리의 동질감이랄까,

그래서 이렇게 가끔씩 한자리에 모여 웃고 떠드는 시간이

요즘 와서는 더욱 애틋하고 소중한 느낌이다.

 

 

또한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수연아!” “영일아!” 하며 이름을 불러주는

동기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세상 그 어디에 피붙이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있을까.

 

 

설핏 위안이 되면서도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행복한 시간이

언제까지 허락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

아직까지는 모두 그럭저럭 건강한 편이지만

언니 오빠들은 모두 지하철을 공짜로 탄다는 지공세대가 되었으며

막내도 어느덧 오십 줄에 들어섰으니 괜한 기우만은 아닌 것 같다.

그리하여 바라기는 형제들과 자주 어울려서 밥 먹고

 함께 여행도 다니며 더욱 즐거운 시간을 갖고 싶다.

 

 

어느 새 시원한 밤바람이 바베큐 화로의 연기를 다 몰아냈다.

따라서 술자리도 끝나고 차분히 담소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는데

누군가 자정이 넘었다는 말 한마디에 갑자기 돌아갈 채비들을 하였다.

 

 

“아니, 모두들 자고 갈 것처럼 그러더니 왜들 이래...”

“말이 그렇지, 이 많은 식구들이 어디서 다 자누?”

나는 재빨리 내려가 냉장고에 준비해 두었던

야채봉지를 꺼내와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언니들은 잘 먹고 가는데 뭘 싸가기까지 하느냐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말보다 손이 먼저 나왔다.

내가 정성껏 키운 농작물을 한줌씩 나누어 줄 때의 벅차오르는 기쁨이

이날은 몇 배로 더 컸다.

 

 

남편이 마무리로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아무래도 그냥 보내기가 서운한 모양이다.

“형님들, 우리 노래 한 곡 부르고 헤어집시다.

 근데 지금 이 시간에 노랠 부르면 주민들이 시끄럽다고 신고할지 모르니까

 모기만 한 목소리로 조용히 부릅시다. ‘고향의 노래’ 다 알지요? 시작!”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

남편도 취한 모양이다.

나는 한밤중에 뜬금없이 무슨 노래냐고 만류했건만

언니 오빠들은 군말 없이 잘 따라 불렀다.

 

 

아, 행복해! 라는 말이 저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비록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고향은 아니지만

형제들과 한때나마 웃음꽃을 피웠던 이날의 옥상 파티는

모두의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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