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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10 우리 학교는 개들도 행복해 한다? (2)







우리 학교에는 개가 많다. 일부러 데려다 키운 건 한 마리도 없다. 계절 따라 그 숫자가 조금씩 차이 있는데 가장 많을 때는 아무래도 봄 아닐까 한다. 울타리 없는 숲 속 작은 학교에 동네 개들뿐만 아니라, 어디서 온지 모르는 개들까지 네댓 마리가 떼로 몰려다닐 때도 있다. 대부분 집 안에서 키우던 애완견 같은 것들로 몸집이 작은 녀석들이다. 노인들만 사는 시골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개들이다. 아마 도시 아파트에서 키우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시골에 보내졌든지, 주인한테 버림받고 어떻게 흘러왔든지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그러다 자기들끼리 짝을 지어 새끼를 낳기도 하고.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면 개들도 늘어진다. 개가 어떻게 그렇게 네 다리를 뻗고 잠들 수 있는지 처음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개는 웅크리고 잠드는 줄만 알았다. 방심도 이만저만 아닌 그 자세를 우리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학교 주변을 산책하려는 기미가 보이거나, 저 아랫동네 버스를 타러 내려갈 때면 어느새 따라나선다. 우쭐우쭐 신나서 앞장서기도 한다. 들꽃 흐드러져 교실 밖 숲 속에서 수업할 때면 저도 한 자리 차지하고 수업을 듣는다.


‘레골라스’라는 개가 있었다. 이마에 털이 듬성듬성한 것이 당시 인기 있던 영화의 캐릭터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몇 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들과 가장 오래 가장 친근하게 지냈다. 생긴 건 비록 초라했지만 영리해서 아이들 사랑을 많이 받기도 하고, 아랫동네 내려가 연애도 곧잘 하는 녀석이었다. 입학할 때부터 학교에 살고 있었는데 졸업하고 놀러왔는데도 아직 그 모습 그대로 있는 레골라스를 보고 놀라워하던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던 그 녀석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늘 곁에 있을 것 같더니 어느 날부터 안 보이자 아이들이 몹시 궁금해 했다. 종적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 아이들 사이에서 전설이 하나 만들어졌다. 이 땅에서 목숨이 다한 줄 안 개 한 마리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개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는.


어느 핸가는 피부병이 심해 털이 숭숭 빠지고 그 자리에 진물이 흐르는 개 한 마리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몰골로 보아 주인에게 버림받은 게 분명했다. 마침 여학생 중에 동물조련사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었다. 어디서 피부병 약을 구해다 발라 준다, 식당에서 밥을 갖다 준다, 목욕시킨다, 정성을 다했다. 피부병의 고통과 배고픔에 떨면서 다른 개들 사이에도 끼지 못하던 그 녀석이 불과 며칠 만에 살아났다. 푸른 빛깔 도는 약을 바른 자리에 꾸덕꾸덕 딱지가 앉아 아이들에게 ‘부침개’라는 이름도 얻었다. 피부병이 다 나아갈 무렵 부침개의 엄마가 되어버린 그 아이는 옷만들기 시간에 예쁜 옷까지 만들어 입혔다. 모든 아이들의 귀염둥이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 학교에는 개들이 모여든다. 개들끼리 서로 통해서 친구들을 불러 모으는 모양이다. 온통 ‘개판’이 되었을 때, 아이들은 식구총회를 열었다. 개 문제로 안건을 삼은 적이 지금까지 두 번 있었다. 개들이 수업을 방해하거나 누구를 해치는 것은 아니다. 기숙사에서 곤히 자는데 갑자기 네댓 마리가 한꺼번에 짖어 대서 잠을 자주 깨운다든지, 방학에 학교를 모두 떠나게 될 때 그 개들은 뭘 먹고 살까 걱정스럽다든지, 이따금 떼로 몰려다니며 애써 가꾼 밭을 망쳐놓아 마을 할머니가 항의하는 일이 생길 때 회의는 열렸다. 회의는 사뭇 진지했다. 안 그래도 개판이 싫은 몇몇 아이들은 강경하기도 했다. 팔아버려야 한다, 그렇게 귀여우면 집에 데려가서 키워라, 학교에 못 오게 혼내줘야 한다, 등등. 그러나 결론은 늘 같았다. 강경파들도 말을 위한 말일 뿐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다. 개들도 학교가 좋아 모여드는데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 개들끼리 주고받는 말을 상상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거기 가면 우리를 옭아매는 목줄이 없어.”
“우리에게 억지로 시키는 게 없어.”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거기는 행복한 곳이야.”


우리 학교는 개들도 행복한(?) 곳이다. 잘은 모르지만 우리 아이들도 다른 곳 아이들보다 상대적으로 행복한 듯하다. 살아 있는 생명들에게 행복의 요건은 어쩌면 단순하다. 스스로 자발성을 발휘해서 제 존재 가치를 만들어 가는 일. 그리고 곁에서 그런 모습을 그대로 보아주고, 기다려주고, 놀라워해주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우리 학교는 그래서 ‘사랑과 자발성’을 큰 가치로 두고 있다.


보충수업, 야간자습, 학원 없이도 공부하고, 다른 재능들을 찾아내고, 아무 내세울 것 없는 아이도 사랑받고 존중받으면서 자신감을 갖는다. 열띤 토론을 통해 생활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가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기쁨도 느낀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교사들은 늘 설렌다. 한 학기, 일 년 사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에게서 배우기도 한다. 그저 지켜봐 주거나 얘기를 들어주거나 아이들 문제에 개입할까 말까 망설이는 게 교육의 전부다. 그래도 잘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놀라워 해주는 게 교사의 일이다.


나는 사실 교육에 대해서 잘 모른다. 이십년 남짓 아이들 앞에 섰으면서도 그렇다. 다만 어떻게 하면 교육이 잘못된다는 것을 대강 짐작할 뿐이다. 어떤 것들이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무기력하게 하고, 마음을 병들게 하고, 폭력적이 되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까지 할 수 있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러나 어쩌랴, 나라의 교육정책이나 학교나 교사나 부모나 모두 한통속으로 아이들을 반교육적으로 옭아매고 있으니.


아이들은 물건들처럼 규격화되고 수치화되고 있다. 높은 수치는 취하고 낮은 수치는 버려지는 교육정책에 따라 학교는 재편되고 교사는 복무하고 부모는 끌려간다. 아이들은 점점 야성을 잃어가고 시들시들 늙어간다. 누구나 교육문제를 안타까워한다. 잘못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사회가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변명한다. 교육정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나, 어떤 분야의 전문가나, 소위 지식인이나, 하물며 교사나 ‘부모의 입장’에만 서면 똑같아진다. 이 구조에서 ‘내 아이만은’ 살아남아 최상위 등급이 될 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니 이 사회가 바뀔 리 없고 교육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나는 요즘 가정교육이 무엇보다 소중함을 새삼 느끼고 있다. ‘내 아이만은’이라는 욕심이 없는 집 아이는 표정에서부터 속마음까지 그렇지 않은 집 아이와 너무도 다르다. 부모의 욕심이 아이를 그르치고 있는 게 교사 눈에는 보인다. 안타깝지만 그런 아이에게는 학교에서도 해줄 것이 없다. 물론 그 부모도 학교에 기대하는 바가 없겠지만. 결국 교육문제를 푸는 일은 가정을 이룬 어른들, 바로 부모들이 아이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있을지 모른다. 모든 이들이 자기 가정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진정 사랑한다면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들을 봐야 한다.

나와 내 아내와 내 형제와 자식은 모두 세상에 던져진 미지의 씨알들이다. 우리는 움이 틀 때에 한 번 놀란다. 잎이 날 때 또 한 번 놀란다. 꽃이 필 때 또다시 한 번 놀란다. 열매가 열릴 때 진정 놀란다. 그리고 그 열매를 먹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인생을 놀라움으로 진정 알게 되는 것이다.
나나 아내나 형제나 자식에게서 어떤 움이 틀지, 그 움에서 어떤 잎이 날지, 또 자라서 어떤 꽃이 필지, 그 꽃이 지고는 어떤 열매가 맺을지 모르면서 키우고 가꾸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란 놀라움의 연속이다.
내 가정에서는 노랑꽃이 피었다가 빨간 열매가 맺게 되어 있는데, 분홍꽃이 피어야 하고 주홍 열매가 맺어야 한다고 결정해놓고, 그런 방향으로 가정을 이끌어가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놀라움의 연속이 아니라 실망의 연속일 것이다.

 
글을 쓴 남호섭 님은 경남 산청 간디학교 교사로 십 년째 아이들과 지리산 품에서 살고 있습니다. 동시집 《타임캡슐 속의 필통》과 《놀아요 선생님》을 내기도 했습니다.(살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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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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