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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04 누군들 자장가가 그립지 않으랴

 

 

불면의 시절이다. 가장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단잠을 잊은 지 오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잠을 태연하게 자는 것만으로도 미련하다는 소리를 듣거나, 경쟁에서 뒤처진 게으른 사람으로 취급받는 분위기다. 무한 경쟁의 현실에서 한가하게 자장가 타령이라니 싶겠지만 누구라도 세상살이에 지쳐서 문득 평온하고 따뜻한 엄마 품이 그리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 한번쯤 자장가에 귀 기울여 보시길.


몇 년 전, 중고음반 가게를 기웃거리다 특이한 음반 하나가 눈에 띄었다. <더 월드 싱스 굿나잇(The World Sings Goodnight)>. 현지인들이 부르는 세계 각 나라의 자장가 모음 음반으로 평소 접하기 어려운 노래들이 수록돼 있어 호기심을 끌었다. 그리고 엄마가 품에 아기를 안고 사랑스런 눈길을 보내는 연둣빛 재킷 그림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음반은 아메리카 인디언부터 아르헨티나ㆍ스웨덴ㆍ브라질ㆍ아일랜드ㆍ러시아ㆍ하와이ㆍ세네갈ㆍ타히티ㆍ네팔ㆍ일본ㆍ인도네시아ㆍ집시 등 각 대륙 33개국 자장가들이 들어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자장가도 있다.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소록소록 잠들라’로 시작하는 김대현이 작곡한 자장가다. 세상 모든 자장가들이 그렇듯 이 음반에 실린 곡들도 단순한 리듬에 실린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CD플레이어에 음반을 걸고 가사들이 실린 북클릿을 읽다가 유독 눈길이 더 가는 자장가들이 있었다. 집시ㆍ브라질ㆍ세네갈ㆍ타히티ㆍ네팔ㆍ에티오피아ㆍ인도네시아의 자장가들이다. 이들 나라의 자장가 가사들에는 고단한 삶의 흔적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에게 멸시 받아온 떠돌이 민족이나 가난한 나라라는 공통점도 있다.


‘귀여운 아가야, 어서 잠들 거라.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내일 아침 일찍 먼 길을 떠나야 한단다.’ 끝없이 방랑하며 살아야 하는 집시 민족의 자장가에는 떠돌이의 운명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다른 노래들보다 더 애절한 감정이 섞여 있다. 이 자장가를 부른 여가수는 마치 길에서 쌓인 노독 탓인지 음성이 탁했다. 집시의 후예들은 매일 길을 떠나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일찌감치 엄마의 자장가를 통해 귀로 체득하는 셈이다.

 

세계 각국의 자장가들을 모아 놓은 음반.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주는 엄마 손길 같은 자장가 선율


이밖에 다른 가난한 나라의 자장가들은 부모가 일하느라 자식을 제대로 돌봐줄 수 없는 딱한 처지가 자주 등장한다. 브라질은 ‘네 엄마는 시장에 가셨고, 아버지는 일하러 가셨단다’는 노래를, 아프리카 세네갈에서는 ‘아가야, 엄마와 아빠는 지금 네 곁엔 없지만 너에게 줄 선물을 한아름 안고 곧 오실 거야’라고 부른다. 또 네팔은 ‘아가야, 울지 마렴. 엄마는 일을 하러 가야 한단다’며 아침마다 아기와 떨어져야 하는 엄마의 슬픈 마음을, 에티오피아는 ‘자장자장 아가야, 엄마가 너를 위해 맛있는 것을 사가지고 오실 거란다’며 굶주림을 다독이고 있다.


한편 인도네시아는 ‘울지 말거라 내 아가, 비록 아빠는 함께 있지 않지만 엄마가 널 안아 재워줄게’라며 편모 가정의 애환을 담고 있다. 남태평양 타히티 자장가는 무척 짧지만, 동물을 통해 간절한 엄마의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 죽어가는 어미 고양이가 품안에서 보채는 아기 고양이에게 젖을 먹이지 못하고 같이 놀아주지 못해 안타까워 한다는 슬픈 노래가 소박한 우쿨렐레(기타와 비슷한 작은 현악기) 반주에 실려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자장가에 가까운 우리 동요 <섬집 아기>도 바닷가에서 종일 굴 따는 고단한 엄마의 삶이 먼저 떠올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짠해진다. 6,70년대 낡은 LP판에서 듣는 자장가나 동요들은 가슴이 아리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그 시절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머리가 아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아련한 감정이입이 잘 됐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그 시절 동요 LP판을 구해서 <반달>, <오빠 생각>, <따오기> 등을 들으면 문득 잊고 지냈던 고향이나 옛 생각에 잠길 것이다.


부유한 나라든 가난한 나라든 자식이 편히 자고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는 부모 마음은 다르지 않지만, 이런 심정을 담은 자장가는 나라마다 묘한 정서와 뉘앙스 차이가 존재한다. 분위기가 밝은 자장가가 있는 반면, 들을수록 애잔한 노래도 있다. 나는 모든 자장가의 원형질은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대상을 보면 기쁜 마음은 순간뿐이고 곧 슬픈 감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자장가를 들을 때마다 먹먹해지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 한 구석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그 과정에서 슬픈 감정은 화학 반응을 일으켜 편하고 순한 마음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딸아이가 서너 살 때 밤마다 자장가 삼아 틀었던 우리나라 동요 <둥근 달>은 오히려 내가 일상에 찌든 영혼을 위안 받으며 먼저 잠을 청하게 해준 묘약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자장가>가 수록된 음반.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가 연주한 쇼팽의 <자장가>.

 

 

스승인 슈만의 자녀들을 위로하려 작곡한 브람스의 자장가


자장가는 구전된 곡들뿐만 아니라 유명 작곡가들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세계 3대 자장가는 모차르트•슈베르트•브람스의 곡들을 꼽는다. 어릴 적 음악책에서 배웠던 가사와 선율이라 한 번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명곡이다. 이밖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쇼팽 등도 자장가를 남겼다. 쇼팽의 자장가는 피아노 작품으로 예술 가곡의 자장가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감미로운 선율이  인상적이다. 쇼팽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엷은 우수가 깔려 있어 듣다 보면 아름다움에 심취해 절로 탄식이 나올 때가 있다.


후기 낭만파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관현악 반주가 딸린 자장가를 발표하기도 했다. 가곡과 오케스트레이션 대가답게 관현악을 강조하지 않은 여린 반주로 노래를 받쳐 주고 있다. 이쯤 되면 자장가는 아기를 재우는 소박한 노래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자주 듣는 자장가는 브람스의 <민속 동요집>에 수록된 네 번째 곡 ‘잠의 요정’이다. 이 노래는 아름다운 선율 못지않게 작곡 배경이 가슴 뭉클하다. <민속 동요집>은 정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스승 슈만이 낳은 올망졸망한 7명의 어린 자녀들을 위해 작곡한 가곡집으로, 잠의 요정은 어린이의 눈에 모래를 뿌려 잠을 오게 한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소프라노 에디트 마티스의 청아하면서도 애절한 목소리는 때론 눈물을 찔끔거리게 만든다. 당시 20대 청년 브람스가 스승의 어린 자식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같이 놀아주고 노래를 만들어 주는 것이 최고의 선물이었을 터. 비극적 삶을 마친 스승과 아무 것도 모르고 노는 어린 자녀들을 바라보는 청년 브람스의 심정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느낄 정도로 에디트 마티스의 노래는 절창이다. 노래 속에 파묻힐 듯 말 듯하며 선율을 풀어나가는 피아노 반주 또한 일품이다. 어느 해 늦가을, 홀로 강원도 산길을 달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 때문에 차를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득한 산골에서 예고 없이 만난 에디트 마티스는 내 영혼을 온통 뒤흔들었다. 저물어가는 하늘과 단풍 끝물이 든 숲을 보자 어느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느 자료를 보니 1970년대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계 자장가 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모차르트•슈베르트•브람스 등 이름만 대도 다 아는 거장 음악가들의 자장가가 성악가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타고 울려 퍼졌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전문 성악가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한 자장가는 다름 아닌 한국에서 온 60대 할머니의 나지막한 읊조림이었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검둥개야 우지 마라 우리 아기 잘도 잔다….”


할머니의 웅얼웅얼 거리는 노래를 들은 아기들은 90초 만에 잠이 들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할머니의 자장가는 뱃속에서부터 들어오던 엄마의 숨소리와 심박동 소리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반복 구조의 단조로운 리듬과 멜로디가 아기에게 편안한 잠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전래 자장가는 즉석에서 가사를 만들어 부를 수 있다. 주변의 소소한 일상이 전부 가사가 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소재거리인 것이다.


자장가는 강보에 싸인 아기가 듣는 노래만은 아니다. 고만고만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들고 지칠 때 위안을 주는 마음의 고향이자 어머니의 품속 같은 선물이다. 아무리 세상 인심이 흉흉해도 자장가 앞에선 부드러운 어린 자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프라노 에디트 마티스가 부른 브람스 <민속 동요집>.

 


글을 쓴 박시우 님은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 딸 하나 둔 아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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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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