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곳으로 갔을겁니다 더 잘 해주지 못 하고 아픔을 미리 헤아리지 못 했음이 죄책감으로 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더 치열하게 이 곳을 붙들고 있다가 다시 만났을 때 재미있는 이야기로 술잔으로 그렇게 있어주어야겠습니다 명복을 빕니다”(김제동 트위터)

 

박용하씨 자살.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자살률 1위, 불명예를 안고 있는 한국 현실에서 박용하의 자살은 너무나 안타깝고, 걱정이 됩니다.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우을증에 시달렸던 한 주부가 박용하 자살 보도를 보고 “ ‘다른 사람은 잘 죽는데 나는 왜 못 죽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동조 자살로 불리는 베르테르 효과. 유명인이나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던 사람 등이 자살할 경우, 자신을 자살한 사람과 동일시,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이 우려됩니다. 최진실씨가 자살로 숨졌을 때 베르테르효과가 기승을 부렸지요.

 

오죽했으면 자살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면, 더 치열하게 살아야지요. 특히 청소년에게 유명인의 자살은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유명연예인들의 죽음은 슬픔을 넘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행히도 이번 박용하 자살은 언론에서 차분하게 보도를 해주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죽음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일어나는가 이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 한마디에 사람은 상처 받을 수 있고, 차별적인 시선하나로도 한 사람이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루에 숨 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회복되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박용하씨의 자살을 통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영성교육도 필요합니다. 종교적 영성이 아니라 마음 다스림의 교육 또한 절실합니다. 자신을 소중히 해야 타인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지요. 은비사건이라는 불리는 고양이 투척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세상만물을 소중하게 여기니까요.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로움이 곧 남의 이로움이다." 즉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삶의 지향이 담긴 말이지요.


배려하고 아껴주는 마음. 남의 이로움이 자신의 이로움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금 더 배려하고 관심을 갖는 사회를 이제 이루어 갈 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이 교육을 받고 가르치는 스승이자 제자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치열하게 산다는 것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포함되지만, 인간답게 인간다운 길을 위해 평생 나누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김제동씨의 치열하게 이곳을 붙들고 있자 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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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하의 자살. 참 충격적인 일입니다. 2005년 영화배우 이은주의 자살에 이어 올해까지 7명이 넘는 유명 연예인들이 자살했습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자살을 하는 사람조차도 어떻게든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자살하는 사람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지만,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절망과 희망 사이를 넘다듭니다. 행복을 끝없이 추구하지만 절망에 이르기도 하지요. 김용하의 자살을 통해서 ‘행복’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충족하지 못한 데서 행복을 찾지 않고, 개인적 기질이 불행을 자초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자기 안(에고)에 갇혀 이유 없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 극심한 경쟁, 권태감, 질투의 감정, 불합리한 죄의식, 남에 대한 원망, 세상에 대한 부적응 등이 인간 행복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라고. 러셀은 열정, 사랑, 일, 폭넓은 관심, 노력을 통해 행복은 순간순간 다가온다고.

 

순간의 행복을 찾아서

사실 행복해지려고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열정을 갖고 살아가면 됩니다. 삶의 오르막과 내리막, 그 우여곡절, 고통 또한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면 고통이 잠시 동안 멈추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지요. 그 순간이 행복 아닐까요?

 동양과 서양의 문학을 들여다보면 무수히 다양한 행복의 정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행복이란 단어 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찾아 볼 수 있을까요? 구글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웹문서 1억 개에 가까운 검색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만큼 인간은 행복을 찾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끝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지요.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현재는 믿지 않는다. 다만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할 뿐이다. 반면,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다거나 행복은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함에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의 대사상가들은 행복이란 말은 모호하게 남겨두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자신 만의 말로 그것을 정의내릴 수 있게 말이다."

 

만약 행복이 우리의 삶 순간 순간의 질을 결정할 무언가라면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좀 더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아마,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순간의 행복에 등을 돌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어떻게 보면 그것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한 예가 행복을 쾌락과 혼동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성격을 가만히 살펴보면, 쾌락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에 의해 좌지우지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 영원불변하는 건 아니지요. 보기에도 좋은 초콜릿 케잌을 예로 들자면: 처음 한 접시는 맛나지요. 그 다음 건 전 것만 못하구요, 나중엔 넌덜머리가 나죠. (웃음) 세상 일이란 게 대게 그렇습니다: 질리게 마련이지요. 당신이 추울 때, 가까이서 불을 쬐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겠죠. 좀 있다가는 한 발짝 물러서게 되구요 더 있다가는 살이 타는 듯 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경험함에 따라 쾌락이 마치 스스로를 갉아먹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쾌락이 전염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당신이 진한 쾌락을 느끼는 반면 몇몇 주변인들은 엄청나게 고통받을 수 있는 것 처럼요.

 

행복이라 무엇일까?


그렇다면 행복이란 뭘까요? "행복"은 너무 추상적인 단어이니까 대신 "웰빙"이라고 합시다. 행복은 모든 감정적인 상태에 걸치는 것이며 그 기저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한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모든 기쁨과 슬픔을 포함해서 말이죠. 당신에게는 조금 놀라운 말일 수도 있겠군요. 슬프면서 동시에 이런 웰빙을 가질 수 있을까요? 물가로 밀려오는 파도를 보세요. 파도 아랫부분에 있다면 당신은 바닥을 치게됩니다. 딱딱한 바위에 부딪히게 되죠. 위쪽에서 파도를 타고 있다면, 당신은 한껏 들뜰 겁니다. 들뜸과 침울함 사이를 오갈 뿐, 깊이라고는 없죠. 이번에는 심해를 생각해 봅시다. 거울처럼 아름답고 고요한 해양도 있겠구요 폭풍이 휘몰아 칠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해양의 깊이만은 변하지 않은 채로 언제나 존재하죠. 어떤가요? 웰빙이란 의식의 존재양식이지 단순히 순간의 감정이나 느낌은 아닙니다. 기쁨조차도, 행복의 소산일 수도 있지만, 사악한 기쁨이란 것도 있습니다. 다른이 의 고통에 크게 기뻐할 수도 있죠.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행복을 추구할까요?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외부를 바라봅니다. 우리가 흔히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이것과 저것 등 모든 조건들을 갖춘다면 행복해질거라 생각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모든 것을 갖는다" 이 문장 자체가 이미 행복의 파멸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드러냅니다. 모든 것을 갖는다란 말은 우리가 하나라도 놓치면 행복이 무너짐을 뜻합니다. 또한, 일이 잘못되어갈 때, 우리는 외부사항을 바꾸고자 무던히도 노력합니다. 그러나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이란 제한되어 있고, 일시적이며, 종종 허상에 불과합니다.

달라이 라마가 포르투갈에 머물 때의 일입니다. 도처에서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봐요. 당신은 이 모든 걸 하고 있지만 그 안을 채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또한 멋지지 않겠어요?" 이어서 말하길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가 최신식의 편안한 빌딩의 100층에 최첨단의 주거공간을 갖는다 해도 그 안에서 몹시 불행하다면 그가 찾는 거라곤 뛰어내릴 창문 뿐일 겁니다."

 

답은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번영하게 하고, 웰빙을 가져오는 특정 정신 상태는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부른 것이죠. 정신적 가치가 우선시되는 행복. 화, 미움, 질투, 오만, 강박적 욕구, 과욕과 같은 것들이 있죠. 이것들은 우리가 긍정적 상태에 머물도록 가만 냅두는 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은 타인의 행복에까지 치명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이들의 침범이 잦아 질수록 연쇄반응으로 우리는 더 비참해지고 고통 받을 것입니다. 반면 사심없이 하는 관대한 행동들 먼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한 그런 행동들이 한 아이의 삶을 살릴 수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인정을 위한 것도, 감사의 표현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데로 한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렇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는 일이 가능한건가요? 우리의 본성에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인 감정들 역시 내재되어 있지 않나요? 우리의 감정, 성격, 기분의 변화는 가능할까요?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선 먼저 본성이란 무엇인지부터 물어야 합니다. 경험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의식의 제 1 특징은 무엇을 알고자 하는 인지적 특성입니다. 의식이란 사물을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에 비춰진 게 못난 얼굴일 수도, 예쁜 얼굴일 수도 있지만 거울 자체는 그것이 비추는 이미지에 의해 더럽혀지거나 바뀌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각에는 그저 의식, 순수한 의식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게 바로 본성입니다. 애초부터 미움이나 질투같은 것 때문에 더럽혀질 수 없는거죠.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염색이 옷 전체로 퍼지는 것처럼 미움이나 질투를 언제든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화 내고 질투하거나, 혹은 언제나 관대하지는 못합니다.

 

모든 감정에 작용하는 일반적인 해독제를 찾아야 합니다. 본성 중의 본성을 살피면 가능하죠. 대게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짜증이 났거나 화가 났거나 그가 싫다면, 아니면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다면, 마음은 계속 그 대상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대상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찰 때 강박관념이나 짜증은 한층 더 강화하죠. 나중에 이 같은 과정이 저절로 반복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입니다. 화를 예로 들면 겉보기엔 밀려드는 먹구름이나 폭풍우처럼 매우 위협적으로 보이죠. 하지만 만약 우리가 구름 위에 앉을 수 있다면? 막상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저 안개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화'를 가만히 관찰한다면 아침 해에 스러지는 서리처럼 사라질 겁니다. 당신이 이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당신의 욱하는 성질은 매번 화를 누그러뜨릴 때마다 점점 옅어질 겁니다. 결국에는 '화'의 감정이 생겨도 그냥 잠깐 스쳐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마치 하늘을 가로지르는 새가 하늘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처럼요.

 

시간이야 필요합니다. 부정적 감정들이 우리 마음에서 생겨나고 습관이 되는데 이를 푸는데도 똑같이 시간이 걸리겠죠. 하지만 이 길 밖엔 없습니다. 마음가짐을 새로 하는 것.

 

 
박용하 자살 소식을 지켜보면서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한국의 상황이 참 암담해 보입니다. 이럴수록 가족 구성원들의 대화와 자기 공부, 마음 수련이 필요합니다. 영성이 필요한 시대지요. 행복에 대해서 행복을 이루는 조건에 대해서, 절망을 뚫고 희망을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다시는 자살로 서로 상처 받는 일이 없기를 소망합니다.

 

* 참고 및 인용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마띠유 리카드의 행복의 습관들
(본문 중 많은 부분은 리카드의 말씀을 정리인용 수록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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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을 불행의 연속이라 비관하면서 , 삶과 죽음 사이에 갈등하는 자가 있다면 ,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의 불행을 둘러보아라. 그럼 곧 삶과 죽음 사이에 갈등을 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게 될 것이다" -미뉴트-



한류 스타 탤런트 박용하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오죽하면 자살을 결심했을까? 자살에 이르게 한 배경을 살펴보면 심정적으로는 이해는 가지만 자살할 용기라면 살수도 있었는데, 한 개인의 자살은 주위 사람들을 너무 힘들게 하기 때문이지요. 최진실 씨가 자살했을 때 모방 자살(베르테르 효과)이 급증했지요. 특히 유명 배우가 자살할 때 이런 현상이 많이 일어납니다. 한 젊은이가 왜 자살을 선택했을까? 박용하씨는 한국판 ‘첨밀밀’이라고 불리는 드라마에 캐스팅이 된 상태였다고 하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자살률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자살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생계형자살, 우울증, 스트레스 등. 한국의 경우 시골 어르신들과 20,30대 자살 비율이 높습니다. 자살은 개인적 이유로 몰고 갈 수만은 없지요. 사회적 책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빠른 변화를 촉구하는 산업문명사회, 도시집중화, 공동체의 붕괴 등 얼마 전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는 한국 자살률에 대한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미국보다 한국은 자살률이 2.5배나 높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소속된 나머지 29개 국가의 국민과 비교할 때 더 많이 일하고, 덜 자고, 입시학원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워싱턴 포스트)

 


* AP가 보도란 한국 자살률 관련 기사 - 2009년 한국에서는 14,400명이 자살했다.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워싱턴 포스트지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 유력 신문, 방송 통신사들이 한국 자살률에 대한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서글픈 일입니다. 이른바 부자나라로 불리는 유럽국가의 자살률은 이제 크게 증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계속 자살률이 높아만 지는 걸까요. 자살예방도 중요하지만, 스트레스를 인정해 주는 사회분위기도 인정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다 건강해 보이지만, 한가지 씩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신병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외국 같은 경우, 특히 미국은 수시로 정신질환을 체크하고 있지요. 특히 큰 사고를 겪은 경우에는 필수 코스입니다. 트라우마(사고 후 정신적 외상)가 심하면 자살에 이를 수가 있으니까요. 동네와 마을의 해체로 인한 어르신들의 고독 소외, 인터넷과 오락 중독으로 인한 집중력 상실 등 한국 사회에서 자살에 이르게 하는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 OECD 회원 국가중 자살률 1위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의 대화, 가족공동체의 복원이 가장 시급합니다. 하지만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현실적 어려움이 많지요. 결국 성장과 빠름에 경제관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상, 자살률을 줄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명연예인들이나 사회여론지도층의 자살 또한 모방, 충돌 자살을 일으킬 수 있기에, 자살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관심과 배려가 절실합니다. 정부가 자살률을 방치하는 것은 사회적 타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공존의 그물코를 다시 짜야 합니다.  내 자녀가 식구가 친구가 자살할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자살률을 심각하게 바라보아야 할 때라는 것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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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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