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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15 어머니의 특별한 나들이
이틀 동안 우리 집에서 서른 명이나 모여 큰 행사를 치렀는데 모두 떠나고 나서 보니 다른 때와는 달리 내가 뒤처리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빈집 고쳐 살기 실습을 한 것인데 이들이 걸레 하나까지 깨끗이 빨아서 널어두고 떠난 것이다. 나무 부스러기들도 잘 쓸어 담아 아궁이 앞에 모아 두었고 쓰던 장갑들도 하나하나 짝을 지어 통에 담아 놓았다. 마당에는 담배꽁초 하나 없었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다 쓰러진 시골집을 고쳐 세우고 앞마당에 황토 집을 한 채 지은 게 알려지면서 귀농해서 집을 짓고 살 사람들이 인연 따라 찾아 왔던 것이다. 내가 어머니와 같이 사는 모습에 더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토록 부산하던 집안이 한 순간에 고요해졌다. 가만히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야생 황차를 만드시는 어느 선생님이 차와 함께 선물 해 주신 동요가수 이성원님의 음반이다. 김소월의 시를 김광수선생이 작곡한 '엄마야 누나야'를 들으면서 어머니 생각을 했다. '섬집아기'가 흘러나오자 왈칵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어머니 방에 나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너무 생소했다. 갈매기 울음소리를 듣고 불현듯이 떠오른 아기 생각에 차지도 않은 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서둘러 집으로 달려가는 섬집 엄마의 모습에 우리 어머니가 그대로 겹쳐보였다. 잠시 노인요양원에 가 계신 우리 어머니 말이다.

 

이번처럼 행사가 있거나 외부 강연을 나갈 때는 어머니를 잠시 요양원에 모신다. 두어 달 전부터다. 노인요양원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 때문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지만 30여 분 거리에 있는 노인요양원을 이용 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가 있어서다. 그즈음 열흘 동안 멀리 호주로 노인요양 연수를 다녀오게 되었고 쇄도하는 강의요청과 바쁜 가을걷이로 떨어져 사는 아내와 서울의 형님을 수시로 불러내려야 했는데 우연히 아는 스님을 만나게 된 것이 발단이다.



초가을 볕이 좋았던 어느 날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를 나갔는데 지나가게 된 고장에 아는 스님이 계시기에 전화를 했더니 마침 읍내에서 손님들과 식사를 하는 중이라며 오라고 해서 함께 하게 되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앉게 되신 어머니가 표변하셨다. 어머니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스님의 모자를 어머니가 할퀴듯이 두 손으로 거머쥐고 집어 던져버렸다. 머리칼이 있었다면 쥐어 뜯겼을지도 모른다.

뭘 권해도 아무것도 안 드시겠다고 버티시더니 난데없이 단감을 가져 오라고 하셨다. 부랴부랴 근처 청과물가게를 뒤졌지만 9월의 상점에는 어디에도 단감이 없었다. 밥그릇도 엎어버린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어머니와 동갑이신 친 어머니를 오래 모시다가 작년에 하늘나라로 보내셨던 그 스님은 다음 날 전화를 걸어와서 간곡한 조언을 했다. 요약하면 두 가지다.

어머니 잘 모실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형제들이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었고, 반 생태적인 환경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어머니는 큰 아들 집에 있는 게 다른 자식들 눈치 안 보이고 더 마음이 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처럼 맏이가 아님에도 어머니를 모셨던 스님의 경험도 들려 주셨다. 조언 중 다른 하나가 노인요양시설을 가끔씩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벌써 4년째 어머니에게만 매달려 있는 내가 안쓰럽다는 것이다. 스님이 여러 해에 걸쳐 후원을 하고 있는 노인요양원이 있는데 신뢰 할 만 한 곳이라면서 소개 해 주셨다. 그 노인요양 전문기관이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았다.

 

날씨는 추워지는데 오줌 누신 옷을 거머쥐고 안 벗으려 하고 열흘이 넘도록 "아까 했는데 뭔 목욕을 또 하냐?"며 목욕을 한사코 거부하시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머리도 깎고 목욕도 하기위해 소개 받았던 요양원을 찾았다.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그 요양원의 원장선생은 젊고 활기차고 민첩한 여교무님이었다. 거침없이 농장일도 하셨다. 요양원의 분위기도 익히고 시설도 돌아 볼 겸 나는 요양원 곳곳을 다녔고 원장선생님과 체육실에서 탁구도 치며 놀았다.

일부러 오래 머물면서 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었다. 어머니 목욕도 내가 요양보호사 선생님과 같이 해 드렸다. 늘 가마솥에 끓인 물을 뒷방에 있는 욕조로 갖다 부어 목욕을 하다가 요양원의 따뜻한 욕실에서 샤워기로 철철 쏟아지는 온수로 목욕을 시켜드리니 내게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집에서 목욕 할 때는 어머니 기준이 들쭉날쭉 이다보니 물 온도를 맞추기도 쉽지 않고 온풍기와 전기 히터까지 켜 놓고 목욕을 하지만 춥다고 하시던 어머니도 요양원에서 하는 목욕이 만족스러웠던가 보다. 전혀 저항을 않을뿐더러 “그만하라.”는 고함을 치지도 않으셨다.

 

어머니가 생활하실 방과 거실도 따뜻하고 깨끗했다. 방 한편에 늘 쌓여 있는 어머니의 보따리 속에서 때로는 터져버린 홍시가 녹아내리고 뭉쳐 넣어 둔 떡에서 쉰내를 풍기기도 했지만 요양원 방에 있는 개인 물품 보관함은 깨끗하고 밝았다. 방구석에 쌓인 이불도 없었다.


나흘 만에 집으로 모셨는데 그동안 잘 잡수시고 머리고 깎고 목욕도 해서 한 눈에 보기에도 훤하셨다. 요양원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셨지만 어머니는 여행지를 다녀 온 것처럼 새로운 생활체험 덕에 집에 와서는 상쾌한 나날을 보냈다. 노인 요양원이라는 특별한 나들이 장소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가을날의 특별한 나들이는 계속되었다. 장수군 곁에 있는 진안군에서 ‘마이산축제’를 하는데 안내장에 보니 서커스가 있었다. 잘 들지 못하시는 어머니는 눈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신다. 여러 차례에 걸쳐 기록영화인 ‘워낭소리’나 ‘차마고도’, 그리고 ‘동물의 왕국’같은 영상물을 재미있게 보셨는지라 서커스를 보러 가기로 했다. 어머니가 그리워하며 들려주시는 옛 이야기 중에 자주 등장했던 것 중에 하나가 서커스이기도 했었다. 아홉 살 땐가 외할아버지와 작은 외할아버지 틈새에 끼어 어머니가 봤다는 서커스는 그 즈음에 봤다는 포수에게 잡힌 호랑이 기억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커스 공연장에서 어머니는 옛날에 본 서커스 이야기를 하시느라 입을 잠시도 놀리지 않으셨다. 외발 자전거 타기나 재주넘기를 보면서 나는 손에 땀을 쥐었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옛날 재주꾼들이 더 잘 했다고 우기셨다. 거나하게 한 잔 걸친 동네 주민이 몇 사람 무대 앞에 나와서 추는 막 춤을 보고 어머니는 손뼉까지 치며 추임새를 넣기도 하셨다. 한갓진 나들이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가보다. 서커스 공연을 보고 와서는 여러 날 상태가 좋으셨다.


두 번째로 요양원에 갈 때는 우리 집을 찾은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 카페 회원 다섯 분도 함께 했다. 한나절 내내 요양원 농장에서 오미자도 따 드리고 요양원 할머니들과도 같이 놀아도 드렸다.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를 이길 사람이 없지만 그곳에서는 어머니의 고집과 독불장군식 행동이 통하지 않았다. 옷에 오줌을 실수하면 여지없이 옷을 갈아입혔고 밖에 나올 때는 기저귀를 채웠다. 휠체어도 식판을 팔걸이에 끼워 넣으면 손으로 바퀴를 함부로 만지거나 고정 장치를 조작 할 수 없다. 휠체어에 엑스자로 튼튼한 멜빵을 매 놓으면 휠체어에서 맘대로 내려 올 수도 없었다. 안전이 강화된 대신 자유는 묶였다.

 

요양원에서 노인들의 머리칼은 오로지 관리 대상이고 귀찮은 부속물에 불과했다. 가끔 일부러 미장원에 가서 멋진 미용사의 배려와 환대 속에 다듬었던 머리는 어머니의 존엄과 존중을 드높이기 위한 내 나름의 선택이었다. 이곳에서는 유도선수들처럼 깍두기 머리를 만들어 놓았다. 대신 밥과 새참의 시간과 영양은 정확했다. 생활공간의 온도도 외부 날씨와 무관하게 빈틈없이 설정된 수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요양원에서는 불가능 할까? 머리를 깎을 때도 여러 머리 모양을 보여드리면서 어르신들 스스로 선택하게 하면 안 될까? 옷도 단체복을 입지 않을 수 없을까? 낮이건 밤이건 오줌에 젖지 않는 이상 늘 같은 환자복만 입게 할 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면 잠옷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혀 드리면 안 될까? 아침마다 여러 일상복을 펼쳐 놓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것저것 집어 보며 옷을 골라 입게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 하루는 관리 당하는 하루가 아니라 온전히 주체가 되는 하루가 될 테니 말이다.

 

서커스도 초등학교 저학년 연령대 소녀까지 무대에 등장시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가혹한 훈련과 몸에 대한 혹사가 뻔히 보였다. 어머니도 보기에 딱했던지 오죽하면 "저 어린것들이 어미는 있나? 뼈다귀도 없는 것들이가?"라며 안타까워했을까.


집에 오면 며칠 되지 않아서 '은조네' 가자하시고 요양원에서는 집에 가자고 하신다. 똑 같은 밑반찬이 연이어 밥상에 오르면 먹던 걸 또 먹느냐고 반찬투정을 하시게 된 것도 요양원이라는 아주 특별한 곳으로 나들이를 하신 후로 생긴 어머니의 버릇이다.


한 번은 참으로 오랜만에 햇 들깨로 깨죽을 끓여 드렸더니 "아침에 먹었는데 또 깨죽이냐?"고 하시면서 '은조네' 은 끼니마다 다른 반찬이 나온다고 하셨다. 요양원에서 어머니가 옛날 고향 동네에 살던 '은조'라는 처자를 닮은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만났던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는 요양원을 '은조'라고 부른다.

요양원에서 집으로 돌아 온 날은 밤 새 은조네 흉보느라 여념이 없다. 두 년들이 양 팔을 붙들고 끌고 다녀서 멍이 다 들었다고 팔목을 내 보이시기도 하고 내일 모래면 다 땅 속에 묻힐 노인들만 모여 골골한다느니 불만을 털어 놓는다. 요양원 분들에게 물어 봤더니 요양원에서는 어머니가 내 흉을 본다고 했다. 아들 자랑을 하시다가도 한 순간에 아들 딸 흉을 보신다는 것이다. 특별한 나들이란 자랑과 흉보기가 공존 할 때 더 별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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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 전희식 님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존엄성을 지켜드리자는 생각에 전라북도 장수의 산골에 내려가 함께 살며 그 경험을 《똥꽃》, 《엄마하고 나하고》에 담았습니다. 극진한 보살핌과 자연 속의 삶과 노동으로 어머니의 건강이 놀랍게 호전되었지만 때때로 닥치는 시련들로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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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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