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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11 어떤 결혼식

 

 

“오늘 이 순간부터 덕 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이렇게만 생각하면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법륜 스님의 유명한 주례사이다.

정말이지 주례 선생님 말씀처럼만 산다면 무슨 문제가 있으랴마는

이건 어디까지나 주례사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주례사도 점점 듣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에는 주례 없는 결혼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니 ‘주례 공동구매 7만9000원’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물건 공동구매나 식당 할인권 공동구매는 들어봤어도

주례 공동구매는 금시초문이었다.

알고 보니 신랑, 신부가 다른 커플들과 함께

인터넷에서 주례 선생을 7만9000원에 공동구매해서 모시는 거란다.

하긴 주례를 구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헌데 공동구매를 통해 만난 주례선생은 어떤 분들이며

그분들은 어떤 주례사를 하실지 몹시 궁금했다.

사실 나는 주례 없는 결혼식에 반대 입장이었다.

그런 결혼식을 가보니 자유롭기는 하나

왠지 질서가 없는 것 같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부부로서의 일생을 서약하는 자리인 만큼

보다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전통적 예식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내가 아직도 노땅티를 내고 있는 걸까?

 

 

주례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젊은이들의 입장도 나름 타당성은 있었다.

전통적으로 결혼식 주례로 모시는 분들은

대개가 신랑, 신부의 은사님이나 직장 상사 분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제지간이 옛날 같지도 않을뿐더러

주위에 주례를 부탁할 만큼 존경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단다.

 

 

물론 비싼 사례비도 부담스럽지만 결혼 전 부탁하러 가고,

결혼 후 고맙다고 답례 인사까지 가려니

매우 번거로워서 주례를 기피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고 그동안 틀에 박힌 개념의 혼주 위주로 행해졌던 결혼식이 차츰

신랑, 신부가 주인공이 되는 혼사로 바뀌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아, 주례 없이 행해지는 결혼식도 괜찮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건 얼마 전에 다녀온 결혼식 때문이었다.

 

 

예식장은 태평로에 있는 신랑의 회사 강당이었다.

신랑은 회사원이고 신부는 교사라고 했다.

모든 순서는 주례 없이 사회자의 멘트와 신랑의 프리젠테이션으로 진행되었는데

영하의 날씨와는 달리 실내 분위기는 시종 훈훈했다.

 

 

약 한 시간가량 진행된 예식이

나중에는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까지 들 정도로

인상에 남는 결혼식이었다.

처음 출발은 여느 결혼식과 비슷했다.

양가 어머니의 촛불 점화, 신랑신부 입장과 인사,

그리고는 주례사 대신 신랑이 홀로 무대에 섰다.

 

 

 PPT 화면이 펼쳐짐과 동시에 시작된 신랑의 프리젠테이션!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동기부터 시작하여 양쪽 집안의 가계도와

신부의 프로필, 연애시절의 사진 등 잘 편집된 볼거리들을 영상화면으로 보여주면서

 하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공들여 만든 자료 같았다.

 

 

미모의 신부 사진을 곁들여서 그녀의 출신학교, 경력, 현재의 직장 등

화려한 스팩을 쌓은 배우자를 소개한 반면에

본인 것은 너무도 심플하게(?) 단 한 컷으로 마무리.

‘나, 신랑 김우람은 그냥 회사원!’

여기저기서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 한마디에 나는 그가 따뜻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훈남에다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다음은 축가 순서였다.

선생님께 바치는 제자들의 노래 헌정이랄까,

신부가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이 나와서 박진영의 <청혼>을 불렀다.

고등학생들이 대거 등장하여 통일된 복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율동까지 곁들인 축가 시간. 당연히 앙코르가 쏟아졌다.

그런데 이제까지 차분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공연 모드로 바뀌더니

 돌발 상황까지 발생했다.

 

 

신부의 두 살바기 조카가 아장 걸음으로 무대 위에 나타난 것이다.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이 꼬마 아가씨,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뼉을 치면서

그 넓은 무대를 휘젓고 다니더니 하객들에게 박수까지 유도한다.

전혀 의도되지 않은 장면에 식장은 일시에 웃음바다가 되었고

식장 안은 더욱 흥겨워졌는데 아기는 자기도 모르게 음악적 본능이 작동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이모에게 바치는 축하 메시지!

스피치 대신 온몸으로 보여준 비언어적 요소가 이날 양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식이 다 끝나고 피로연장에 인사차 들른 신랑신부에게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와 덕담을 건넸다.

가까이서 보니 신랑과 신부가 참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부부는 3주 연구하고, 3개월 사랑하고, 3년 싸우고, 30년 참고 견디는 것이라 했으니

결혼생활이 그만큼 복잡하고 심란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것이리라.

 

 

김종길 시인은 ‘부부’를 이렇게 말했다.

 

놋쇠든, 사기이든, 오지이든

오십 년이 넘도록 하루같이 함께

붙어 다니느라 비록 때 묻고 이 빠졌을망정

늘 함께 있어야만 제격인

사발과 대접

 

 

이제 부부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탄생된 신랑과 신부에게

 나는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들이 사발과 대접처럼 오십 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오래

불꽃보다 뜨겁고 폭풍우보다 힘차게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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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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