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지우아빠 없으니까 우리 집에 놀러 와요.

 지우가 맛있는 샌드위치 만들어 줄게요.”

 

나른한 일요일 오후, 손녀가 전화를 했다.

“지우가 엄마하고 할머니 집으로 오면 안 될까?”

“우린 차도 없어요.”

 

아빠가 차를 갖고 나가서 올 수가 없다며 난데없이 차 타령을 한다.

오늘도 모녀가 짝짜궁이 되어 그럴싸한 콩트 한 편 엮어서 나를 오라고 유혹한다.

모처럼 맞는 나만의 달콤한 휴식을 반납해야 되나? 잠시 고민했다.

아이는 전화 통화할 때마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며 울먹인다.

 

영상 통화하며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을 보면

그 애처러움에 나도 목이 메곤 한다.

그러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갈 수밖에 없다.

이날은 눈물 대신 샌드위치로 나를 꼬드겼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나서니 남편도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따라 나선다.

딸네 집까지는 불과 20분 남짓, 애인 만나러 가는 길만큼 마음이 설렌다.

도착하니 식탁에는 샌드위치 재료가 한가득.

감자와 달걀은 미리 삶아 놓았고,

오이와 당근은 깨끗이 씻겨져 도마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아이와 함께 썰었다.

단단한 당근은 내가 썰고 아이는 케잌 자르는 칼로 오이를 썰었다.

이어 삶은 달걀과 감자를 으깨고 얇게 썬 오이와 당근을 넣어 마요네즈에 버무렸다.

마지막으로 모닝빵에 버무린 재료를 집어넣으니 미니 샌드위치 완성!

이 모든 과정에 아이의 고사리 손이 보태졌다.

 

완성된 빵을 지우가 차례차례 돌린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으흠, 맛있다! 지우가 만든 거 겁나게 맛있다.”

“김지우 표 샌드위치가 짱이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칭찬을 하자 아이는 신바람이 났다.

이른 바 ‘헐리우드 액션’까지 동원해가며 기분을 맞춰주니 더없이 행복해한다.

의기양양한 저 표정!

 

“지우가 만든 샌드위치 진짜 맛있지요?”

네 살배기 손녀의 말 한 마디에 웃음꽃이 만발한다.

어쩌면 이런 오붓한 시간은 내가 꿈꾸어오던 안온한 노년의 한 장면이 아니던가,

그런데 저 작은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어서 이 할미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드는지...

손녀와 함께 하는 시간, 이 작고 조용한 평화를 오래도록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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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모든 남녀들에게 요정 워너비로 불렸던 오드리 헵번 전시회에 다녀왔다. 제목은 ‘오드리 헵번 아름다움 그 이상의 아름다움’으로 20세기 가장 뛰어난 미인이자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다 간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의 감동적 생애를 재조명한 전시회였다.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새로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T)의 총 10관의 전시관에는 그녀의 출생부터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 스타로서의 삶, 그리고 소외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살아온 인생까지 많은 기록물들을 설치해 놓았다. 전시장에는 영화 ‘로마의 휴일’ 촬영 때 그녀가 직접 탔던 스쿠터도 있었고 수많은 사진과 자필노트, 패션 디자이너 지방시가 만들어 준 우아한 파티복들, 실제 사용한 식기류 등 볼거리가 꽤나 다양했다. 그리고 8mm 홈비디오 영상에는 모성애 가득한 주부의 삶도 담겨 있었는데 처음엔 13000원의 입장료가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관람을 마친 후에는 그보다 더 비싸다고 해도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이날 헵번을 젊은 날의 우상으로 추억하는 중장년층 관람객이 유독 많아 보였다.

 

 

 

 

 

 

 

내 기억 속 헵번은 까만 드레스를 입고 뉴욕 5번가에 있는 티파니 상점 앞에서 보석을 쳐다보며 빵과 커피를 먹는 모습, 또한 ‘로마의 휴일’에서 깜찍한 숏커트 머리 스타일로 그레고리 펙과 함께 연애하던 장면이 고작이었다. 헌데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그간 매스컴에 공개되지 않았던 오드리 헵번의 감추어진 일생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녀는 은퇴 후의 삶이 더 아름다웠다. 굶주리고 고통 받는 전 세계 어린이를 사랑했던 엄마로서의 그의 생애는 극진했다. 마더 테레사의 분신 같다고나 할까. ‘화려한 은막의 스타가 어찌 이런 거룩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전시회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이었다.

 

 

 

헵번의 꿈은 원래 발레리나였다. 그러나 소녀 시절의 그녀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살던 집에서 쫓겨나 거리를 헤매게 되고, 사랑하는 외삼촌이 처형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거기다가 두 오빠는 레지스탕스가 되었으며 본인은 천식, 황달, 빈혈, 부종 등 온갖 병을 달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 튤립 뿌리를 씹으며 배고픔을 달래야 했던 그 시절에 그녀는 적십자 구호 활동을 받아서 기적처럼 살아날 수 있었다. 어릴 적 유니세프는 헵번 가족에게 수호천사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훗날 그녀가 유니세프 친선대사를 맡게 된 동기였다.

 

 

헵번이 네덜란드에 살 때, 안네프랑크도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동갑내기였다. 둘 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열 살이었고 전쟁이 끝났을 때 열다섯 살, 헵번은 그 당시 레지스탕스에게서 배포된 비밀 신문에 실린 ‘안네의 일기’를 접하게 된다. 안네가 창문 밖을 쳐다보며 자전거 타기, 춤추기, 휘파람 불기를 마음속으로 했다는 일기 내용은 같은 나라에서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같은 나이의 헵번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그래도 자기가 처한 상황이 다락방에 갇혀 있는 안네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됐다. 이때 읽은 ‘안네의 일기’가 나중에 문학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이 되리라고 헵번은 상상이나 했을까.

1945년 히틀러 자살 후 헵번의 열여섯 번째 생일날, 네덜란드는 독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어릴 적 구호 받은 경험과 전쟁을 겪은 체험은 향후 그녀가 유니세프를 통해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그가 죽기 전까지 펼친 구호활동은 실로 세상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녀가 수단이나 방글라데시, 베트남, 소말리아 같은 저개발 국가를 돌면서 병에 걸린 아이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만지고 그들의 고통 앞에서 함께 눈물 흘리는 장면은 전 세계인의 가슴을 적셨고 기부 활동에 동참하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녀는 특히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강한 애착을 가졌다. 1922년 그곳을 방문했을 때 마을 공터 구석에 놓여있는 수많은 자루꾸러미를 보았다. 아이들의 시체였다. “오마이 갓!” 헵번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언론을 향해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더 많은 구호의 손길을 달라고 호소했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피골이 상접한 한 아이를 안고 있는 사진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다. ‘우리가 진정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을 만난 것은 은막에서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였습니다’ 이때 그녀는 대장암 말기 환자의 몸이었다. 강한 통증을 느낄 때마다 진통제를 맞으며 계획했던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고 하니 감동을 넘어 경외심이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헵번은 자신의 키가 너무 크고(170센티미터) 너무 말랐으며 각이 진 얼굴이라서 본인이 한번도 예쁘다는 생각을 안 했단다. 하긴 이 말은 이쁜 여자들의 단골 멘트라서 믿을 게 못 되지만 영국의 BBC 방송에서 뽑은 세계의 자연 미인 1위로 헵번이 등극한 걸 보면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해선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 같다. 헵번은 젊었을 때도 그랬지만 말년의 모습 또한 여전히 아름답고 우아했다. 비록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고 피부는 늘어졌어도 누가 이 여배우를 늙고 초라한 할머니라고 생각할까? 내면의 성숙과 베푸는 삶! 나이를 먹었어도 그녀가 여전히 아름답고 당당한 비결이리라.

 

 

전시회에 가서 알게 된 재미난 사실 또 하나는 ‘로마의 휴일’이 선풍적 인기 속에서 개봉되었을 때 어느 날 14세 소년이 헵번을 찾아왔다. “난 나중에 당신과 결혼할 거에요.” 헵번보다 여덟 살 연하의 미소년은 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되어 진짜로 헵번의 두 번째 남편이 되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결혼 생활도 10년 만에 파경을 맞게 되는데 이유는 성격차이라고. 이 두 번째 남편과도 헤어지고 스위스의 한 전원주택에서 임종을 맞이할 때 그녀 곁에는 또 다른 연인이 있었다고 하니 그녀의 인생 자체가 모두 영화이고 예술이었다.

 

 

의사가 3개월의 시한부 삶을 선고하자 헵번은 모든 일정을 덮고 은퇴 후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가 생의 마지막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이때가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노라고 그녀는 회고했다. 마침 크리스마스, 헵번은 유언처럼 시를 읊었고 이로부터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993년 1월 20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던 날이었지만 현지 언론들은 그녀의 사망 소식을 대통령 취임 기사보다 더 크게 다루었다고 한다. 헵번의 운명 직후 그의 절친이었던 영화배우 리즈 테일러는 한 걸음에 달려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를 너무나도 일찍 거두어갔다고...

 

 

헵번은 진정 위대한 배우이자 사랑을 실천한 박애가였으며 죽어서 더 큰 별이 되었다. 그녀의 두 아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접어놓고 현재 ‘오드리 햅번 어린이재단’에서 세계평화와 기아방지 등 어머니의 유언을 착실히 실천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도 재단의 대표이자 그녀의 둘째아들인 루카 도티가 주관하여 헵번의 소장품을 한국으로 옮겨왔는데 수익금은 전액 재단에 귀속된다고 한다.

세계적인 무비스타의 풍모뿐만 아니라 한 명의 여성, 어머니, 인간으로서 아름다운 생을 담은 오드리 헵번 전시회는 관람 시간도 꽤 길었다. 지금 우리가 국제화, 세계화, 다원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게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껴졌다.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날씨는 매서웠으나 마음은 더없이 훈훈했다.

 

 

헵번이 유언처럼 남겼다는 시, <아름다움의 비결>은 어쩌면 그녀의 가치를 가장 압축해서 보여준 글이며 이번 전시회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나 싶다.

 

 

 

 

 

아름다움의 비결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려면 좋은 것을 발견하라

날씬한 몸매를 원하면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어라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지려면

하루에 한번 아이로 하여금 그 머릿결을 어루만지게 하라

균형 잡힌 걸음걸이를 유지하려면

당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걸으라

 

물건 뿐 아니라 사람도

새로워져야하고, 재발견해야 하며,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어떤 사람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

당신 역시 팔 끝에 손을 갖고 있음을 기억하라

 

나이를 먹으면서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두 개의 손을 갖고 있음을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당신의 두 손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값지게 쓰여질수 있습니다.

 

실천하는 지역사회교육운동

www.ka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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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두 번째 주말, 제주도 강의를 끝내고 서귀포에 사는 친구 집을 찾았다.

처음 제주육아종합보육센터에서 강의 의뢰가 왔을 때 나는 무조건 OK를 외쳤다.

대상이 누구인지, 강의 주제가 뭔지, 강사료가 얼마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오로지 친구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말하자면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컸던 것이다.

 

 

그러나 제주 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처음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김포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받은 문자 한 통이 모든 걸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항공기 연결로 제주 출발 시간이 20분 지연되었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전날도 아시아나 항공에서 같은 내용의 문자를 받아 비행시간이 이미 25분이나 늦춰졌는데

또 다시 20분 지연이라니, 그것도 탑승 두어 시간 전에

문자 메시지 하나 달랑 보내면 어쩌란 말인지 몹시 당황스러웠다.

 

 

강의는 오후시간이지만 이렇게 되면 점심도 굶어야 하고 친구와의 시간 약속도 미뤄야 하고,

난관이 많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제주공항에서 나를 픽업하기로 한 사람과 연락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애가 탔다.

도대체 항공사들이 왜 이 모양인지, 혹시 며칠 전에 벌어진 ‘땅콩 회항’ 사건 여파 때문은 아닐까...

 

 

여러 사람을 거쳐 보육센터 대표와 뒤늦게 연락은 닿았지만

비행기는 애초 연기한 시간보다도 15분을 더 늦게 착륙했다.

공항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던 그분은 미처 인사할 겨를도 없이

싸늘하게 식은 레몬차 한 잔을 내 손에 쥐어주고는 강의 장소로 황급히 차를 몰았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행사 주관자로서 그 역시 마음 졸였을 생각을 하니 너무나 미안했다.

다행히 강의 10분 전에 도착.

담당자는 날보고 샌드위치라도 먹고 시작하라고 했지만 도저히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차라리 배고픈 게 낫지 그러다 체하기라도 하면 더 큰일이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넓디넓은 제주 박물관 강의실에 들어서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를 어찌 극복할 수 있을까?’ 마라토너들이 경험한다는 극치감,

러너즈 하이(runner's high)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조금 두려웠다.

 

 

참가자들은 예비부모 및 영유아 자녀를 둔 젊은 부부들이라고 들었는데 둘러보니

그들이 데리고 온 아기들도 제법 많았다.

혹시 아기들이 중간에 울기라도 어쩌지,

또 괜한 걱정이 앞섰으나 중간에 딱 한 사람만이 우는 아기를 안고 나갔을 뿐

두 시간의 강의는 큰 혼란 없이 진행되었다.

그래도 그동안에 쌓은 강의 경험이 헛되진 않았나 보다.

 

 

처음의 걱정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모든 과정을 끝마쳤을 때에는

시원함과 동시에 마약 같은 아드레날린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짠했다.

 

 

밥벌이와 자아실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늘 고군분투하는 삶.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 피드백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자.

어차피 만인을 만족 시킬 수 없다는 게 강사의 숙명인데

어찌 매순간 희열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나만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찰나도 가끔씩은 있었으리라.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갑자기 배고픔이 밀려왔다.

아침 9시에 집을 나서서 오후 4시까지 먹은 거라곤 기내에서 준 토마토 주스 한잔과 강의실에서 마신 생수가 전부였다. 강의 후 주최 측에서 대접해준 흑돼지 삼겹살을 맛있게 먹고 서둘러 친구네 집으로 달려갔다.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 바로 옆집,

친구네 집 대문을 나서니 미술관 앞뜰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고

공원은 한겨울인데도 동백꽃을 비롯한 곱고 붉은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서울은 한파주의보까지 내려졌는데 서귀포는 완전 봄날,

친구네 정원에도 상추와 배추, 대파 같은 채소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지은 지 40년이 넘었다는 친구네 집은 고풍스러우면서도 깔끔했는데

동네에서는 워낙 유명한 집이어서 집주인이 바뀐 뒤에도 여전히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지 200평의 너른 집은, 베란다에 서면 푸른 바다가 보이고

집 위아래 층이 전부 튼튼한 목재로 되어있어서 자연친화적 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요양 목적으로 내려간 친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이었다.

 

 

뜻밖에 찾아온 병마,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살아오던 친구에게 그것은 불현듯 닥친 인생의 칼바람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친구 부부는 지금 행운을 얻었다. 건강을 되찾고 바닷가 근처에 아름다운 집을 소유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뒤늦게 인생의 보너스를 얻은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 준비되지 않은 행운은 없다고 했다.

 

 

길바닥의 동전도 걷지 않으면 주울 수 없듯이 부부는 오늘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동안 선하게 살았기에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편과 둘이서 최소한의 살림만으로 단순하게 꾸려가는 삶!

하룻밤 자면서 그의 집이 숲 같다는 생각을 했다.

 

 

 

 

 

따뜻하고 상쾌하고 고요한...

 마당에는 열대림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거실에는 하루 종일 햇살이 가득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리쬐니 보일러 안 켜도 되고, 치유의 공간으로는 최적이었다.

거실에 앉아보니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하늘에서 해가 내려 알을 슬어 놓은 듯 햇빛 알갱이가 다 보였다.

서귀포로 이사한지 일 년 남짓, 이제 몸도 회복되고 고향만큼 정이 깊어져서

그대로 눌러앉고 싶다는 걸 보니 친구는 그새 제주 사랑에 흠뻑 빠진 듯했다.

몸 아픈 아내를 대신하여 온전히 주부가 되기로 작정한 남편도 당연히 찬성이란다.

 

 

이틀 동안 친구 남편이 해준 밥을 먹으며 황송했다.

밥 짓는 솜씨가 프로급이라고 말했더니 쌀이 좋아서 그런 거라며 겸손해했지만

정말로 그가 차려준 밥상은 매 끼니마다 맛과 영양 모두 흡족한 만찬이었다.

정리정돈이 완벽한 남편의 살림솜씨는 주방뿐만 아니라 집안 곳곳에서도 빛이 났다.

사업가였던 그는 아마 전생에 주부로 태어나지 않았나 싶었다.

 

 

아내의 병이 다 나아도 자기는 평생 머슴으로 살 거라며 호탕하게 웃어보이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친구 부부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재미있게 만들어가며 신혼처럼 살고 있었다.

밤늦도록 식탁에서 주고받던 우리들의 수다는

이층 방으로 옮겨져 새벽 4시까지 이어졌고 눈물겹도록 정 깊은 서귀포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쌓인 회포를 풀기에 하룻밤은 턱없이 부족하다며 친구는 사나흘 더 머물다 가라고 했지만

나는 다음 일정이 잡혀 있어서 하룻밤 만리장성 쌓는 것으로 끝내야만 했다.

 

 

 

 

이튿날 아침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보고

새롭게 조성된 이중섭 문화의 거리 탐방에 나섰다.

크고 작은 공방들이 즐비한 게 서울의 인사동을 연상케 했다.

또한 크로아티아 여행길에서 만난 아기자기한 골목길 가게들과도 많이 닮아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문화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으면 어느 나라나 다 분위기가 비슷비슷했다.

 

 

그런데 우리가 들른 첫 번째 가게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무달구릇’이라는 필명을 가진 50대 남자는 시인이면서 캘리그라피(손글씨)작가였다.

강동구 명일동에서 살다가 제주 섬에 상륙한지 1년 되었다는데

한 눈에도 그는 서울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현재 강동구에 살고 있고, 친구도 강동구 성내동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니

그는 헤어졌던 벗이라도 만난 듯 아주 반가워했다.

우리에게 커피를 타주며 저녁에 만나 막걸리라도 한 잔 하자며 살갑게 군다.

서울 생활 30년 동안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일방통행에 염증을 느껴

무식하고 멍하게 살기 위해 제주살이를 택했다던가.

앞으로의 꿈은 김영갑 사진작가처럼 제주에서 자기 갤러리를 운영하는 거라는 말을 듣고

나는 친구에게 ‘앞으로 이 사람을 잘 사귀어 놓으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여행 중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나며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난 진작에 알았다.

인생은 결코 자기계발서 한 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데도 과거의 관습이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용기 부족일까,

아님 결단력이 없어서 일까,

나는 늘 생각으로만 그치고 말았는데 제주에서 제 2의 인생을 놀멍 쉬멍 빈둥거리면서(?) 살고 있는

친구와 시인이 몹시 부러웠다.

 

 

 거기서는 몸도 마음도, 얽히고설킨 시름까지도 다 내려놓고 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글쎄, 결심하기까지가 어렵지 마음 하나만 바꾸면 생활 터전을 옮기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집착에서 못 벗어난 탓일까?

 

 

오후에 서귀포 5일장 구경을 끝으로 아쉬운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빠듯한 일정에 맞춰 쏘다니긴 했어도 휴식의 참맛을 느낀 무척 알찬 시간이었다.

떠나올 때 친구가 나를 껴안으며 속삭였다.

“숙식 제공은 무한 책임질 테니 아무런 약속 없이 오고 싶을 땐 언제든지 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고맙다 친구야,

그리움이 쌓이고 에너지가 딸리면 첫눈처럼 소리 없이 찾아가마...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엔 차가운 겨울비가 한 차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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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 세 명을 데리고 일박이일 워크숍을 다녀왔다.

초등학교 때 내게 논술수업을 받은 학생들이다.

 한때 글쓰기 제자였던 아이들을 5년 만에 다시 보니 너무 많이 변해서 하마터면 몰라볼 뻔 했다.

 체격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도 완전 딴 판.

오동통하고 귀엽던 얼굴은 사라지고 다들 대학생 같은 포스를 풍겼다.

 

 

 

 출처: 네이버 쉽

 

 

우리가 간 곳은 경기도 남양주의 한 농원이었는데,

만오천 평 너른 땅 중심에 배밭이 있었고 캠핑장과 원두막까지 잘 갖추어져 있어서

소규모 워크숍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들은 농장에 들어서자마자 함성을 질렀다.

 

 

꺅

 

 

“와, 선생님! 여기 되게 멋지네요?”

“근데 선생님은 여길 어떻게 아셨어요?”

“도대체 여긴 없는 게 없잖아?”

내가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이 매우 원초적인 질문들을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농원에 오는 차 안에서는 각자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과묵했던 녀석들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돈다.

날씨마저 참 좋다.

너무 좋아 탈이다.

 

 

안채에 짐을 풀고 나서 본격적인 농원 산책에 나섰다.

하늘은 높푸르고 주위는 고요했다.

지천으로 핀 쑥부쟁이와 채마밭 가득 푸른 채소가 싱그러웠다.

어디선가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건조하게 들렸던 그 울음소리조차도 평화롭고 유쾌했다.

산책로에서 웃고 떠들며 종달새마냥 가벼워진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초롱초롱 빛났던 초등학교 때의 눈빛이 떠올랐다.

 

 

신나2

 

 

야외로 데리고 나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입시공부에 찌들려 잔뜩 웅크렸던 열일곱 살의 아이들과

환갑을 넘겨 반백인 나 사이에는 반세기나 되는 시간의 벽이 가로막혀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세대차이 따위는 전혀 없었다.

우린 수학여행 온 학생들처럼 함께 들떠있었다.

마치 코바늘로 뜨개질하듯 추억의 앨범을 다시 만들기로 하고 그냥 즐기기로 했다.

 

 

한가한 오후 시간, 주인 없는 농원을 거닐며

너희들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어냐고 물었다.

듣고 보니 초등학교 때의 장래희망이 다들 바뀌었다.

 

 

 


시 암송이 취미였고 국어교사가 꿈이라던 효진이는

광고 카피라이터로 진로를 정했다고 했다.

그래서 대학도 언론홍보학과를 갈 것이며

졸업 후 제일기획에 입사하여 유능한 카피라이터가 되는 게 장기 목표란다.

꽤 구체적이다.

1학기말 고사에서 문과 전교 3등을 했는데

2학기 때는 문과 1등을 하는 게 단기 목표라며

두 남학생들이 못 듣게 내게만 살짝 알려주었다.

 

 

순간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수줍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펼치는 효진이가

어찌나 듬직한지 와락 껴안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효진이는 자기주도 학습이 잘 되는 아이였다.

또래 아이들이 학원이나 과외에 치어 힘들어 할 때,

아이는 스스로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매우 즐겼다.

그래서 본인이 기쁜 일이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스승의 날 같은 때에 내게 자주 편지를 보내며 자기표현을 하곤 했다.

 

 

 


밥 먹는 것보다 축구를 더 좋아했던 성원이는

일찌감치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축구부가 있는 강남의 한 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그런데 중학교 3년, 고등학교 1학년까지 만 4년간 학교 대표선수로 뛰던 그 아이가

올봄에 돌연 축구를 포기하고 집 앞 인문계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축구를 너무나 사랑했고,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서

일반학교와 축구부가 있는 학교를 사이에 두고

부모님과 갈등을 빚었던 사건을 익히 알고 있기에

성원이의 전학 소식을 듣고 나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

 

 

얼마나 어렵게 선택한 길인데 축구를 접었다니?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축구는 이제 끝,

중학교 가서는 공부에만 전념하라는 부모님의 통고를 받고

아이는 일주일 간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했다.

 

 

 그때, 축구를 그만 시키겠다는 성원이부모님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성원이에게 축구를 못하게 하는 건

그 아이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는 거나 마찬가지다.

길이 아니라면 언제라도 중단하게 될 터이니

제발 물리적으로 끊지는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이번 워크숍을 기획한 것도 내가 아끼는 제자들과

오랜만에 만나 추억의 시간을 갖겠다는 욕구도 있었지만

실은 성원이를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토록 좋아하던 축구를 못하게 되었으니 녀석의 상심이 얼마나 클까?’

 

 

하지만 기우였다.

만나보니 아이는 생각보다 밝고 명랑했다.

앞으로 축구는 취미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꼭 축구만이 아닌 또 다른 길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노라고.

우선 체육교육과에 진학해서 체육선생님이 되겠단다.

그동안 운동하느라고 소홀했던 공부가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남은 일 년 반 열심히 해서 꼭 해내겠으니 선생님도 응원해달라고 했다.

 ‘아무렴! 너의 그 승부근성이 어디 가겠니. 넌 틀림없이 해 낼 거야!’

나는 성원이 곁으로 다가가서 말없이 등을 토닥여주었다.

 

 

 


세 아이들 중에 가장 많이 달라진 지호는 정말로 몰라볼 뻔했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동글동글 귀엽던 얼굴은 살이 빠져 완전 갸름형으로 바뀌었고

187센티나 되는 키에 남다른 패션 감각까지,

소위 말하는 훈남으로 변신해 있었다.

남성 모델 같았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소지섭이라고 부른단다.

내가 보기에는 탤런트 소지섭보다 지호가 훨씬 더 잘 생겼다.

쉬는 시간이면 여학생들이 그를 보러 몰려온다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을 것 같다.

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머리와 얼굴에 끊임없이 손이 갔다.

 

 

지호는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단다.

초등학교 때는 장래희망이 컴퓨터 프로그래머라고 했든가.

일전에 지호어머니를 만났을 때,

나는 아이가 남다른 체격과 외모를 가졌으니 탤런트나 모델을 시키면 어떠냐고 말했다.

아마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 그런 권유를 하였나 보다.

 

 

왜 아니냐며 고등학교 2학년인데도

여전히 공부보다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고심 끝에 그쪽 방면의 학원이라도 보내주려고 했단다.

그러나 본인은 끝까지 공부해서 대학을 가겠다고 하면서도

공부는 뒷전이니 부모님이 심히 답답할 수밖에.

지호는 초등학교 때부터 호감 가는 외모에 공부도 잘해

줄곧 임원을 했고 예의도 바른 아이였다.

누가 봐도 인기 만점이었는데 외모가 워낙 출중하다보니

아무래도 공부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나보다.

 

 

이날, 걱정 많은 지호어머니를 대신하여

나는 지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지호야, 너는 공부를 왜 한다고 생각하니?”

그런데 지호가 아닌 성원이가 잽싸게 말했다.

 “공부를 잘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선택의 기회가 많아지는 것 같아요.”

선택의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은?

내가 또 물었다.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고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문제해결을 잘 할 수 있거든요.”

성원이가 재차 답했다.

“그래 맞다. 그게 정답이야!” 쓸쓸히 미소만 짓고 있는 지호, 마음이 짠했다.

괜히 물어본 것 같았다. “그렇지만 꼭 공부가 전부는 아니야.

공부가 아니라도 특정분야에 잠재력이 있다면 그걸 계발해서 집중하면 되지.

그게 바로 행복의 조건이 되는 거란다.“

 

지호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얘기지만

그건 진심이었고부모교육강사로서의 소신이기도 했다.

 

 

  토닥토닥

 


부모들은 모두가 공부 잘하는 효진이 같은 아이를 원한다.

그러나 세상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크나 큰 마당이기에

공부 잘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운동을 잘하는 아이도 있고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악기를 잘 다루는 아이도 있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누구나 노력만 하면 다 1등을 할 수 있다고 아이들을 닦달한다.

사실 공부도 다중지능 중에 하나일 뿐이다.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라는 책을 쓴 장승수 같은 공부 선수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되고 나머지는 저마다의 소질과 능력에 따라 행복하게

사는 길을 택하면 된다.

꼭 공부가 아니어도 행복은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원이가 말한 것처럼 공부를 해서 아는 것이 많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고, 문제해결력이 높으니까 어느 분야에서건

요긴하게 써먹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아이들이 각기 다른 분야에서 고유의 색으로 아름답게 살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한 가지 색깔의 꽃만 있다면 얼마나 밋밋하고 재미없겠는가...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산책과 토론(?)을 동시에 마쳤다. 처음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했는데 제법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초등학교 때 배운 토론의 본능이 아직도 살아있네! 그 사이에도 아이들은 이곳저곳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전송하기 바빴다.

 

 

저녁에는 바비큐 파티를 했다.

농장 주인이자 체험학습 강사이신 김 선생님이

고기와 와인을 준비해주셨고

곁들일 채소는 아이들이 밭에서 직접 따오게 했다.

 

 

감자, 고추, 상추, 오이, 가지 등등 신선한 채소를 한 소쿠리 가득 담아왔다.

이번에도 먹기 전에 인증 샷! 먹다 남은 건 각자 집으로 싸가라고 하니 더 좋아했다.

건강한 아이들의 수다와 웃음이 고기 맛을 한층 드높였다.

게다가 모기를 쫓으려고 피운 화로 안에 은은한 쑥 향기까지 조화를 이루니

행복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홧팅2

 

 

이튿날 아침에는 마석의 5일장 구경에 나섰다.

장터에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환희가 넘쳐났다.

살아있는 닭과 오리, 강아지, 토끼들을 구경하며

마냥 신기해하는 아이들 감성이 어린이집 다니는 우리 손녀와 다를 바 없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왔는데도 녀석들은 팥빙수에 떡볶이에 튀김을 사먹고

뒤이어 옥수수도 한 자루씩 뚝딱 해치웠다.

그야말로 폭풍흡입! 하긴 그 나이에 무엇인들 맛이 없겠는가.

길게 내리쬐는 맑고 풍성한 햇빛조차도 시럽처럼 달콤했다.

흥정하는 시골 아낙네들 틈에서 나도 오천 원짜리 몸빼 바지 하나 샀다.

 

 

문득 삶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만나 함께 책 읽고 토론하고 일기 쓰고 하면서

정들었던 아이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걸 다시 꺼내어 나눌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충만한 기쁨인지,

나는 아이들에게 일박이일 동안 그런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너희들 뒤에는 항상 기도하고 응원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라!”

돌아오면서 내가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었고

우리는 연말에 학기말 고사 끝나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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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사랑

|함수연| 만남 2014.10.23 11:02

작년 9월25일, 우리 곁을 떠난 소설가 고(故) 최인호 씨가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지막까지 기쁨으로 써 내려간 글은

손녀 사랑에 관한 글이었다.

 

그는 작고하기 4년 전부터 책의 제목<나의 딸의 딸>을 미리 지어놓고

딸과 손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글을 꾸준히 써나갔다.

 

 

 

 

 하지만 책이 미처 세상에 나오기 전에 그는 눈을 감았으니

얼마나 애달팠을까...

결국 <나의 딸의 딸>은 작가의 1주기 맞아 내놓은

유고집이 되고 말았다.

 

 

 

 

 

책에는 격하게 손녀 사랑을 털어놓은 대목이 유독 많았는데,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고인의 글씨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악필로 유명한 작가였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문학적 영감을

손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악필이 될 수밖에 없었노라고 했던가.

그러나 외손녀에게 쓴 손 편지 글씨는

참말로 온순하고 정갈했다.

 

 

육필 편지에서 만난 동글동글한 그의 필체를 보고서,

손녀 앞에서는 작가가 아닌 보통의 할아버지와 다름없는

인간적인 그를 발견하게 된다.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눈에 밟힌다’는 표현이

너무나 예리하다는 것을 손녀 키우면서

나도 새삼스럽게 느꼈던 터라 그의 손녀사랑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도 항암 치료를 받아 빠져버린 손톱에 고무를 끼우고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쓰기 위해 무지 애썼을

작가의 투혼이 떠올라 읽는 내내 가슴이 아렸다.

 

 

책 속에는 신혼여행을 떠난 딸의 빈 방에 앉아

눈물짓는 아버지 최인호가 있었고,

손녀 앞에서 동요를 부르며 춤을 추는 ‘할아버지 최인호’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손녀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를 만드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절대 사탕이나 초콜릿을 손녀에게 주면 안 된다는

딸의 엄명을 어기고서 딸에게 호되게 야단맞는(?) 장면도 있었다.

 

 

"아빠, 정원이한테 사탕 줬지?”

“아니!”

“아니긴 뭐가 아냐. 입에서 사탕 냄새가 나는데...”

“반 개 줬다. 딱 반 개만 줬다고!”

“반 개 건 한 개 건 내가 주지 말랬잖아. 이빨 썪으면 아빠가 책임질 거야?”

“그래, 알았다 알았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부정한 뒷거래는 그리 오래 가질 못한다.

딸이 주지 말라는 사탕을 주면서 손녀와 할아버지는 공범자가 되어

기분이 짜릿짜릿해지고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잘난 체하는 딸에게 복수하는 느낌까지 들어 짜릿한 스릴감마저 맛본다고 작가는 고백했다.

흐흐, 나도 비슷한 경험이 여러 번 있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우하하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를 키울 때의 사랑법은 확실히 달랐다.

그저 뭐든지 다해주고 싶다.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게 해주고 싶고 떼를 써도 다 받아주고 싶은 게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이고, 그게 손주사랑이다.

 

 

아이가 떼를 쓰며 울어도 모른 체 하는 것이

아이를 교육시키는 참 방법인 줄 알면서도

막상 애가 울면 나도 아이 입에 사탕이나 초콜릿을 물려준다.

 “쉿,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하면서 손녀와 유치하게 약속을 건다.

 

 

 그렇다, 우리들의 인생은 유치한 것이다.

아이들 앞에선 더욱 유치찬란하다.

유치한 만큼 아름답고 달콤한데 어쩌란 말인가...

 

 

아이들은 자기를 사랑하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아이와 놀 때는 건성으로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야함을,

사랑한다는 것은 혼신의 힘을 다하는 행위라고 말한 작가의 말에 나는 백 프로 공감한다.

 

 

하트3

 

 

“세상에서 외할머니가 제일 좋아!”

나는 우리 손녀 지우에게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격하게 감동한다.

이제 겨우 네 살배기 아이가 듣기 좋은 말을 일부러 했을 리는 없다.

느낀 그대로, 마음 속 사랑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고 본다.

정말이지 이 아이야말로 하느님이 두레박으로 세상에 내려주신 선물임을 깨닫는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들도 있다.

그러나 손자를 익애(溺愛)하지 않는 할 아버지는 없다.”

 

 

그렇다. 빅토르 위고의 말은 맞다.

최인호도 외손녀를 익애했다.

아니 세상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들의 아들과 딸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날마다 손주 사랑에 텀벙 빠져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 맹목적 사랑에 빠진 나를 주책바가지 할머니라고 불러도 좋다.

 

 

생전에 작가는, 침샘암 투병 중에

아이 주먹만 한 조약돌을 늘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거기에는 수줍게 웃는 눈과 코와 입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직 초등학생이던 손녀가 그려준 조약돌의 미소를 떠올리며

참을 수 없는 아픔을 달랬다고 하니

그 어떤 유명 화가의 그림에 비할 수 있을까.

 

 

 

또 그는 손녀 방에 작은 쪽지들을 자주 숨겨놨다고 한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그 쪽지에는 “사랑해‘ ’보고 싶어‘와 같은 말들이 적혀 있었고

그걸 찾아내면 선물로 보상을 해주었다고 하니

그의 손녀사랑은 가이없었다.

 

 

사랑해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했다.

세상을 떠난 바로 그때,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잊었을 때다.

작가를 68세라는 나이에 떠나보내기에는 너무 이르다.

최인호 씨와 띠동갑이라는 이어령 선생은 1주기 전 책자 앞면에

 

 

 “인호가 세상을 떠났다. 나쁜 녀석! 영정 앞에 향불을 피우며 욕을 했다.

내 가슴에 그렇게 큰 구멍을 하나 뚫어놓고 먼저 가버리다니 (중략)

보고 싶다 인호야!”

라며 고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이어령 선생 말씀대로

그가 하늘나라에서도 여전히 소년처럼 유쾌하길 바라며,

이번 주말에는 최인호의 1주기 추모전이 열리고 있는

평창동 ‘영인문학관’에라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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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연상 김동리와 결혼한 여인, 서영은의 ‘살아낸 사랑’ <꽃들은 어디로 갔나>라는 책은

올봄에 나온 서영은 씨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녀는 소설가이면서 우리나라 문학의 거장인 김동리 선생의 세 번째 부인이기도 하다.

당시 김동리의 연애사와 결혼생활은 파란만장했고 그의 작품만큼이나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신랑 나이 74세, 신부 나이 44세로 시작한 그들의 상처투성이 결혼 생활은

당시 매스컴을 통해서 비교적 소상히 알려졌다.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사실 1987년에 결혼해서 1990년에 김동리 선생이 쓰러졌으니 결혼생활이 길지는 않았다.

이 책은 고작 3년 남짓한 시간에 벌어진 일들을 쓴 글인데,

서영은 씨 나이 칠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객관화 시킨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서영은의 열혈 독자이다.

작품은 물론 인간 서영은도 좋아한다.

우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 박완서를 닮은 겸손한 외모가 맘에 든다.

요즘 가볍고 경박한 글이 넘치는 마당에 고뇌하는 작가로서의

치열성과 진정성이 강하게 녹아있는 그의 글은

그래서 더욱 돋보이고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머리가 아닌 경험과 끝없는 자기성찰에서 불러오는 글,

그녀의 구도자 같은 삶과 거의 일치한다.

아마도 작가의 치열함으로 따지자면 <혼불>의 작가 최명희 씨에 버금가리라 본다.

 

 

한편 ‘왜 그녀는 서른 살 차이나 나는 김동리 선생과 결혼을 했을까?’

‘전처 자식들과의 재산분쟁은 어떻게 끝이 났을까? 등등

평소 작가에 대한 나의 저급한 호기심도 많았는데

책에서 작가의 사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그 은밀함을 나는 야금야금 즐길 수 있었다.

더하여 서영은의 장편으로는 14년 만에 나왔다고 하니 이번 <꽃들은 어디로 갔나>는

이래저래 반가운 책이었다.

 

 

문단에 데뷔하기 위해 글을 들고 찾아간 이십대 초반에 김동리 선생을 만나고

그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너무도 험난한 삶을 살았던 서영은,

그는 30대에 혜성 같이 나타나 1983년 <먼 그대>라는 작품으로

이상 문학상을 받은 화제의 여성작가였다.

그런 그녀에게 김동리 선생과의 만남은 생의 가시밭길에 제 발로 뛰어든 형국이었다.

 

 

책에는 작가의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는데

본인 스스로도 나이 칠십에 쓴 이 작품은 가장 아프게,

가장 나중까지 울면서 쓴 마음자세의 결과라고 고백했다.

 

 

김동리의 두 번째 아내 역시 소설가였다.

손소희 여사로 그녀는 서영은과 모녀 같은 신분을 유지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서른 살 아래의 젊은 작가와 사랑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암환자로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손 씨는 그들의 관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 선생은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니 네가 잘 돌봐드려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87년 손소희 씨는 세상을 떴다.

서영은 씨는 이때부터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온몸으로 견디며 아슬아슬한 결혼생활에 돌입한다.

 

 

오랜 연애기간을 청산하고 두 사람은 서울 정릉에 있는

봉국사에서 조용히 결혼식을 올렸다.

절 마당은 소리마저 쓸어낸 듯 적막했고 하객이라곤 서영은의 노모와 이모,

그리고 운전기사가 전부였다.

 

 

신랑과 신부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아니라 이미 살아온 날들에 대해

스님이 하시는 주례사를 엄숙하게 듣고 있었다.

아마도 이날 74세의 신랑은 팔순의 장모에게 떳떳치는 못했으리라.

누구에게 축복 받는 결혼식도 아니고,

죽은 아내의 무덤의 떼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서둘러 한 혼인이기에

만일 새 아내를 맞은 것이 세상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축복은커녕 손가락질 받을 일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전처 자식이 다섯이나 있지 않은가. 그것도 아들만 다섯.

그래도 노모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이제 한시름 놓았다’는 말을 남기고 결혼식 이틀 만에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도 그럴 것이 딸이 이십 대에 만나 사십을 훌쩍 넘긴 마당이니

두 사람이 냉수라도 떠놓고 어서 식을 올리라고 성화를 해대던 어머니였다.

노모의 그런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들의 빛나던 사랑은 결혼이라는 현실 생활 안에서 점점 비참해졌다.

막상 결혼하여 한집에 살다보니 가슴 떨리게 하던 연인은 온데간데없고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노인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연인과 남편 사이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있었다.

남편은 잔소리꾼에다가 인색하기 짝이 없었다.

생활비도 잘 주지 않았고 집에서 일하는 아줌마의 월급까지 깎아내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구차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삶이 참 두렵구나!’ 불쑥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고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혼자 살 때가 훨씬 행복했다.

그런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반야심경’을 따라 읽는 것.

 

 

작가는 나중에 자신의 사랑을 ‘살아낸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사랑이 주는 아름다움과 설렘 뿐 아니라

스러지는 고통과 슬픔까지도 함께 끌어안고 가야하는 사랑이었기에...

언젠가 4박5일의 잠적 여행 끝에 돌아온 사람에게 김동리 선생은 손찌검까지 했다.

 

 

헤어지고 싶었다는 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든 주먹세례.

코에서는 피가 흘렀고 말을 하면 할수록 더 때렸다.

하지만 그녀는 매를 피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기뻤다고 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운명의 확인이었다.

‘그래, 견디어 내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견디어 내리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그녀의 운명을 재차 확인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과연 학창시절에 <무녀도> <등신불> <사반의 십자가> 같은

주옥같은 작품으로 만났던 김동리라는 소설가가 고작 이런 인간이었단 말인가,

라는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 자신의 개인사가 한국 문학사와 궤를 같이 하고,

여러 예술 단체의 굵직굵직한 장도 많이 맡았던 그가 과연 한국의 대작가이며

그토록 사회적 경륜이 화려한 인물이 맞는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일상생활에서 남편의 행동, 남편의 말에 적이 실망할 때마다

작가는 전처인 손소희 여사를 떠올렸다.

그는 어떻게 이 수모를 견디고 살았을까,

또한 이 세상에서 아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다른 많은 여성들도 떠올렸다.

지금도 많은 부부들이 떫은 감정과 슬픔은 속으로 다 감추고 겉보기만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김동리 씨는 말년에 상다리가 휘어지게 술상을 차려놓고

그를 찾아오는 손님들과 술자리를 갖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잔이 몇 순배 돌고나면 항상 그가 하는 말이 있다.

“나는 다 가진 사람이오. 첫째 아내는 자식을 줬고, 둘째 아내는 재산을 줬고, 셋째 아내는 사랑을 줬어요.”

이렇듯 그는 나이로 인해 세상일로부터는 ‘귀거래’했으나 그의 여생은 도연명보다 더 풍성한 듯했다.

 

 

본인 말대로 아무 부족함 없어 보이던 그가 갑자기 의식의 절벽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어느 여름날 뇌졸중으로 쓰러져 길고 긴 병원생활로 가게 된 것.

이로써 서영은 씨는 한순간에 모든 걸 잃게 되었다.

부인을 제쳐두고 평소 왕래가 없었던 전처 자식들이 나타나 온갖 참견과 결정을 다해버린다.

 

 

병원을, 의사를, 수술을, 간병인을 그들이 다 정하고 새어머니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

그녀가 남편과 살았던 집마저 빼앗는다.

그리고 이어진 끝없는 재산분쟁.

그 과정은 당시 신문에도 여러 번 났었다.

 

 

사실 1987년에 결혼해서 1990년에 김동리 선생이 쓰러졌으니 결혼생활이 길지는 않았다.

고작 3년 남짓한 시간에 벌어진 일들인데,

서영은 씨 나이 칠십이 넘어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객관화 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담담함에 이르기까지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했다.

 

 

비슷한 연배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30년의 나이 차 때문에 공감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고.

나는 공감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불행의 단서였을 거라고.

 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서른 살 나이 차의 유부남과의 사랑도 작가에게는

평생 엄청난 부담이 되었을 것 같다.

 

 

작년 2013년은 김동리 선생이 탄생 100년이 되는 해였기에

자연스럽게 지면에서 그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해 볼 수 있었다.
김동리 선생과 서영은 씨가 맺은 인연의 시작은 ‘불쌍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인연을 통해 선생이 불쌍하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 사랑!

어쩌면 이 측은지심은 마음결 고운 작가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 같기도 했다.

 

 

김동리 선생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에 앉은 이후 이야기는

앞으로 2,3편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나는 몹시 기다려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럽다.

작가의 불행이 계속 가슴 아프게 이어지면 어쩌나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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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1개월이 된 손녀는 작년부터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은 딸의 회사 내에 있는 직장 어린이집이라서

아침에는 딸이 출근할 때 태워서 가고

오후 네 시가 되면 친할머니가 데리러 간다.

 

외할머니인 나는 매주 수요일만 담당,

만일 양쪽 할머니 둘 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종일반에 있다가

딸이 퇴근하면서 데리고 오기도 한다.

 

수요일 오후 4시, ‘이 녀석이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반길까?’

일주일에 한번씩 늘 되풀이되는 일인데도

아이를 만나러 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고 출렁거린다.

 

어린이집에 들어서니 친구들과 풍선 날리기를 하고 있던 지우는

나를 보자마자 단숨에 달려와 안긴다.

오늘은 외할머니가 지우 데리러 오는 날이라고

아침부터 선생님한테 자랑을 했단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인지 밥도 잘 먹고

야외활동도 잘 했다고 선생님이 전해준다.

 

집으로 오는 길,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지우는

갓 깬 물총새처럼 쉴 새 없이 조잘거린다.

오늘 간식은 뭘 먹었는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응가를 몇 번 했는지...

특히 선생님 흉내를 내는 말투는 몇 번이나 폭소를 터트리게 했다.

“우리 친구들 재밌었나요?”

“할머니는 참 멋진 친구 같애!”

“아니, 할머니보다 지우가 더 멋진 친구지?”

“맞아, 할머니랑 지우랑 똑같이 멋진 친구야!”

 

세 돌이 채 안 된 아이는 이제

그 누구와 대화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어휘를 익혔다.

냠냠 밥을 먹고, 쿨쿨 잠을 자고,

살금살금 걸어간다는 표현은 어디서 배웠는지

의성어 의태어도 제법 쓸 줄 안다.

집에 오자마자 주방놀이 세트를 가져와서는

할머니에게 커피를 타주고 장난감 냉장고에서 빼빼로 과자도 하나 꺼내 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쉿! 아빠한테는 비밀이야”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왜 비밀이냐고 물었다.

아빠가 빼빼로 많이 먹으면 이빨에 개미가 생긴다고 했단다.

아이고, 웃겨라... 이렇게 지우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아기자기한 즐거움이 곳곳에 별사탕처럼 숨어있다.

 

저물녘의 해 그림자가 넓게 퍼진 거실에서

이번에는 지우가 퍼즐 삼매경에 빠졌다.

42피스짜리 뽀로로 퍼즐을 엎었다가 다시 맞추고 반복하기를 세 차례,

놀라운 집중력이다. 지겹지도 않나 보다.

“할머니는 하나도 못 맞추는데 김지우는 진짜 잘 한다!”

과도하게 칭찬을 해주니 아이의 표정이 금세 환한 봄날이 된다.

마치 지금까지 한 번도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런 아이의 충만감이 내 몸에도 고스란히 스며드는 느낌,

실내의 따뜻함과 평화가 더해져 더욱 행복한 시간이다.

 

나는 아이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잰다.

태어나 앉고, 서고, 걷고, 뛰고, 말하고, 노래하고, 책을 읽고,

이 모두가 지우가 태어난 후 31개월 동안 나타난 일들이고 시간의 잣대가 된다.

갑자기 <first of May>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어릴 적 나는 크리스마스트리보다 작았어요.

 그런데 문득 나무보다 내가 훌쩍 커버렸어요’ 하는 내용의 노래이다.

 

지금 아이 방에는 기린 모양의 키 재기 그림이 붙어있다.

딸은 수시로 아이를 거기 서게 하고 연필로 빽빽하게 점찍어 두었다.

연필 자국이 조금씩 올라가면서 시간도 조금씩 흘러 어느덧 천 일,

천 일 동안 지우는 참 많이 컸다.

몸만 큰 게 아니라 마음도 배움도 자랐다.

 

 선생님과 친구를 알게 되었고 질서와 규율도 배웠다.

거실에는 첫돌, 두 돌 때 찍은 가족사진도 붙어있다.

앞으로 6개월 후에는 세 번째 가족사진이 붙게 되고

갓 태어난 지우 동생 사진도 나란히 걸리게 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뿌듯하다.

 

저녁에 딸이 퇴근해서 오면 지우와 헤어질 시간이다.

만나러 오기는 쉽지만 떠나기는 쉽지가 않아 헤어짐에 다소 복잡한 과정이 따른다.

 “할머니, 가지마! 지우 집에서 자고 가.”

울먹이며 말하는 아이에게 나는 짐짓 더 명랑한 소리로 화답한다.

“할머니, 두 밤 자고 또 올 테니까 오늘은 엄마하고 코 자라.

 리 지우 착하지?” "“지우야, 우리 어린이집 안 가는 날

 엄마랑 아빠랑 다 같이 할머니 집에 가자아~” 제 엄마도 거든다.

나는 아이를 살포시 껴안고 이마에 눈에 빰에 뽀뽀를 해준다.

 

“지우 잘 자!”

아이는 안심한 듯 얼굴에 다시 평온이 깃들며 힘차게 손을 흔든다.

“할머니, 안녕!”

이렇게 손녀와 함께 한 시간은 하루도 아니고 불과 네 시간 남짓이다.

이 짧은 시간이 그토록 복잡한 일상의 시간을 다 태워버리고

또 만날 날을 그리워하게 만드니

나는 딸 바보가 아니라 손녀 바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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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딸이 코스트코에서 한우사골을 사 왔다.

그것도 한 박스씩이나.

육수를 만들었더니 양이 제법 많아서

며칠 동안 반찬 걱정 안 해도 될 듯싶었다.

뿌듯한 기분에 기왕 사골 국을 끓여놨으니

이참에 혼자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하는 앙큼한 생각까지 해봤다.

 

 

 

 

육수는 여러 개의 패트병에 담아 냉장 보관했고

당장 먹을 것은 들통 째 베란다에 놔두었다.

헌데 사흘이 지나도록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이를 어째? 혹시나 싶었는데,

데워서 먹으려고 보니 맛이 조금 이상했다.

사실 많이 상했으면 곧바로 버렸을 텐데

아주 약간이라 냉장고 안에 있던 육수를 섞어서 다시 한 번 끓여주면

시큼한 맛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나와 남편은 그냥 먹을 만하다고 했지만

딸이 한 숟갈을 떠먹더니 국물에서 냄새 난다고 생난리다.

미련 갖지 말고 빨리 버리라고 했다.

 

 

그 많은 양을 몽땅 버리려니 진짜 아까웠다.

게다가 육수로 만들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생각하니 머리가 띵했다.

핏물 빼고, 헹구고, 가스 불 옆에 지키고 서서

거의 하루를 다 투자해서 만든 건데 한번 먹어보지도 못한 채

음식쓰레기로 전략해 버렸다니 딸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빠 엄마 몸보신 하라고 모처럼 선심을 쓴 건데...

 

 

잘못됐다는 걸 알았을 때 과감히 버리고

 냉장고에 있던 것만 먹었으면 될 걸

아깝다고 멀쩡한 국물과 섞어버려서 결국 아무 것도 못 먹게 되었다.

이런 바보 같은 걸 경제학 용어로 ‘sunk cost(매몰비용)'이라고 했던가.

잘못된 투자인 줄 알면서도 그만둘 생각 않고

쓴 돈 아깝다고 계속 쏟아 붓는 것.

이처럼 무모한 일은 전에도 있었다.

 

 

몇 년 전 만기된 적금으로 펀드를 들었다.

적립식이 아닌 거치식이었다.

가입하고 나서 10개월 정도는 수익성이 좋아서

예정대로 3년 만기가 되면 대박이 터질 줄 알았다.

헌데 대박은커녕 계속 마이너스 현상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쉽게 환매를 못하고 ‘어떻게 되겠지’ 하는 기적을 바라면서

2년 넘게 끌고 있다가 10%가 넘는 손해를 감수하고서 해지시켜 버렸다.

그것도 은행 직원의 끈질긴 권유 때문이었는데

잘못된 투자는 빨리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이런 경제공부 덕분에 이제는 펀드보다는

이율이 낮더라도 정기 예금을 선호한다.

문득 어느 증권회사 광고에 탤런트 김혜자가 나와서

 “안전이 제일이에요, 제일!”이라고 외치던 장면이 떠오른다.

 

 

인간은 무모할 때가 참 많다. 과거에 들인 돈 때문에,

과거에 한 말 때문에 고집을 부리다가 더 큰 낭패를 보게 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4대강 사업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도 걱정이 된다.

4대강 사업은 들인 돈이 워낙 크니 매몰비용이 될까 겁나고,

원칙과 약속을 중시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무리하게 대선 공약을 감행하여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떠넘길까봐 또 겁이 난다.

 

 

현재 우리나라 복지예산 증가는 OECD국가 중 1위라고 한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무주택 서민을 위한 행복주택이나

보금자리주택을 왕창 짓겠다던 주택 공약은 축소되었으며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씩 지급하겠다던 기초연금 지급은

대상자를 선별하여 차등 지급하는 것으로 후퇴, 또한 반값등록금 공약은

사실상 백지화 된 상태라고 한다.

 

 

대선공약이라는 게 어차피 포플리즘 성격이 강하고

이후 상황 변화를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무리하게 감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매몰비용이 크면 클수록 국민들의 부담이 늘어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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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떠나는 거야!”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설 여행’을 드디어 관철시켰다. 집안에 맏이인 우리가 명절에 집 떠나보기는 결혼 후 처음이다. 시댁과 친정이 다 서울인지라 우리에겐 찾아갈 고향이 없었고, 그래서 명절 때 차 밀리는 고향 길 대열에 나도 꼭 한번 껴보고 싶었다.

 

 

설날 새벽 두 시에 출발하여 여섯 시간 만에 완도 여객터미널에 도착, 거기서 배를 타고 다시 두 시간 반을 달려 목적지인 추자도에 안착했다. 집에서부터 거의 아홉 시간이 걸렸는데 고속도로가 엄청 막힐 거라고 극구 반대했던 애들의 염려와는 달리 길은 뻥 뚫렸다. 다만 새벽안개로 인해 운전에 조금 방해를 받긴 했지만 그 또한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 신기했다. 물안개를 가르며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몽환적이면서 스릴이 넘쳤다.

 

 

 

 

추자도 선착장에 내리니 <고향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러 척의 배들은 모두 정박해 있고 고단함이 깃든 어부들의 일상도 설을 맞아 잠시 휴식기에 들어간 듯 섬 마을은 전체적으로 고요했다. 인적 없는 적막한 바다를 갈매기 떼들이 대신 지켜주고 있었다.

가장 먼저 숙소를 잡아야 했기에 가기 전에 인터넷에서 찾아본 몇 군데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방이 꽉 찼다는 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님 명절이라서 고향에 내려온 자식들이 묵고 있어 대부분 방이 없단다.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섬에 갇혀 미아 신세가 되는 건 아닐까, 고민 끝에 남편이 해양경찰대에 들어가 읍소(?)를 했다. 다행히 한 군데를 찾았다. ‘태성레저’ 이층에 방이 많은 걸 보니 수입이 꽤 짭짤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민박집은 잠자리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매끼 밥까지 차려준단다. “야호, 땡잡았다!” 쾌재를 부르며 갔다. 주름살 가득한 주인 할머니는 어서 오라며 반색을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부부를 이미 예약한 다른 팀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어쩐지 지나치게 반가워하신다니... 다행히 자식들이 오후에 떠나면 방은 여유가 있을 테니 나갔다가 저녁 먹을 때 들어오라고 했다. 아무렴 재워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무얼 더 바라겠는가.

 

 

 

 

삼치, 참돔, 멸치젓갈 등으로 할머니가 풍성하게 차려준 점심을 잘 먹고 나서 짐을 챙기려는데 아, 이럴 수가! 옷가방이 행방불명이다. 각자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베낭만 짊어진 채 왔던 것이다. 혼비백산하여 가방 찾기에 나섰다. 처음 추자도에 도착하여 우리가 들렀던 곳을 하나하나 되짚어 갔다. 편의점, 면사무소, 해양경찰대... 그러다가 저 멀리 면사무소 앞 의자에 놓여있는 까만 직사각형 물체를 내가 먼저 발견했다. 틀림없는 우리 것이었다. 지도를 얻으러 면사무소에 들렀다가 놓고 나왔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가방을 보니 갑자기 추자도 사람들에 대한 신뢰도가 급상승했다. 가방을 갖고 다시 들어서는 우리를 보고서 “거봐요! 우리 추자도 사람들은 절대로 남의 물건에 손 안 댄다니까.” 웃으며 말하는 할머니 얼굴에 섬광처럼 스치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네, 천만다행이에요. 아님 우린 이 길로 서울 가야했을 텐데...” 정말로 가방을 못 찾았다면 나는 다 때려치우고 곧바로 집으로 가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본격적인 올레길 탐방에 나섰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두 시, 뜻밖에도 올레길 초입에 학교가 있었고 때맞추어 알록달록 깃발을 든 풍물패가 운동장을 돌며 지신밝기를 하고 있었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민속놀이, 조용한 섬마을에 농악단의 흥겨운 가락이 울려 퍼지니 비로소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그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학교 뒷마당에는 고려 시대 장군이었던 ‘최영 장군 사당’도 있었다. 그래, 장군이 남겼다는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명한 말이 있었지.

남녘이라 그런지 산 속은 봄기운이 가득하여 길옆으로 유채꽃과 동백꽃이 만발했다. 해안가라 그런지 비자림도 많았고 겨우내 매서운 바람을 이겨낸 단단한 고사목도 더러 있었다. 모두가 수천 년의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걸작품들이었다. 사실 눈 덮인 겨울 산을 밟고 싶어서 아이젠까지 갖춰갔는데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날 기온이 영상 10도가 넘었다고 하니 거의 한 달을 앞당겨서 봄을 만난 셈이다.

길은 거의가 완만한 오르막이었지만 평소 내 운동량으로 볼 때 세 시간 넘게 걷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첫날의 목표인 등대섬까지는 무사히 올라갔다. 등대에 다다르니 추자도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 각도에서 바라봐도 절경이다.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는 오묘한 조화가 마치 밀레의 저녁 풍경을 연상 시켰고 아무도 없는 호젓한 길은 신성한 순례지 같았다. 평화와 자기 극복의 시간,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인 것 같다.

 

 

긴 시간의 트레킹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저녁을 먹으려는데 낯선 얼굴들이 먼저 식탁을 점령하고 있었다. 주인장 할머니가 아까 우리와 착각하셨던 중년의 커플이었다. 그들은 성지순례 중이라고 하는데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부인은 어딘가 아픈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부의 얼굴에서는 기품과 온화함이 느껴졌고 식탁에 앉아 여러 번 성호를 긋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튿날은 일곱 시쯤 기상하여 일출을 보았다. 어둠을 걷어내고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 2014년 새해 첫날 하지 못했던 해맞이를 추자도 민박집에서 하게 될 줄이야! 아침밥을 먹자마자 성지순례 팀 부부는 제주도로 떠났고 우리는 다시 올레길에 나섰다. 어제는 상추자도였고 오늘은 하추자 탐방 길인데 하추자도에는 음식 사먹을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할머니가 친절하게도 점심 도시락을 싸주셨다. 삼다수 물병까지 곁들여서.

 

 

아침에 일기예보를 들으니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했는데 날씨는 티 없이 맑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길, 역시 인적이 없다. 어제에 이어 그 고독과 외로움이 주는 풍요가 참 좋다. 햇빛에 부서지는 은빛파도도 아름답지만 바닷바람에 광포하게 춤추는 갈대밭은 더 아름다웠다. 인기척에 놀라 날아가는 새들도 만났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의 삼박자가 잘 어우러진 공간이다. 하추자 길섶에는 쑥이 참 많았고 물기가 있는 곳에는 돌미나리가 무더기로 올라와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쑥과 미나리를 뜯었다. 금세 한 봉지가 가득 찼다. 그것들은 해풍을 맞으며 한겨울 땅속에서 꿋꿋하게 자란 것들이니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벌써부터 쑥 된장국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듯했다.

이날 올레길에서 만난 ‘황경헌의 눈물’이라는 샘물이 가장 인상에 남았는데 거기에는 너무도 가슴 뭉클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황경헌은 조선 순조 때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 시 백서를 작성한 황사경과 정난주(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사영은 약관 16세 나이로 진사에 급제한 인사로서 당시 명문가인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결혼하였고 신유사옥 때 천주교의 핵심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참하게 순교하였다.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는 제주 대정현의 관노로 유배되어 37년간 길고 긴 인욕의 세월을 살았고 당시 두 살이던 황경헌은 추자도로 유배되어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이곳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애끓는 소망에 하늘이 탄복하여 내리는 황경헌의 눈물로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늘 흐르고 있다.

 

 

자칫 밋밋하기만 했던 올레길에 숨어있었던 이 애틋한 사연은 지나가는 길손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이 눈물샘의 주인공 황경헌은 나중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니 아마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추자도 어디엔가 살고 있으리라. 이렇듯 오래된 전설과 현재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싶다.

 

 

세 시간 쯤을 걷고 나니 적당히 땀이 나고 배도 고팠다. 그런데 할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려 하니 밥이 너무 차다. 남편이 포구 근처 동네가게를 찾아 컵라면을 주문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끓여주는 주인아줌마와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자기도 서울사람이란다. 게다가 친정이 휘경동이라는 말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내가 휘경초등학교를 다녔고 남편도 그 동네 경희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니 그때부터 그녀는 아예 우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끊임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추자도가 고향인 남편과 서울 생활하다가 오 년 전에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오십 대 초반인 그들 부부, 낚시 배를 가지고 있고 가게까지 있으니 노년에 먹고 사는 것은 물론 정서적인 노후대책까지 문제없어 보였다. 거칠지만 뜨거운 삶을 살아낸 사람들, 민박집 할머니가 그랬고 가겟집 아줌마가 그랬다. 잠시 그들의 여유로운 노후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와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가게 앞 벤치가 아늑한 사랑방 같았다. 여자는 우리의 아득한 기억을 일깨워준 것도 고마운데 일어설 때 문어를 선물로 주었다. 그것도 세 마리씩이나. 돈을 주겠다고 하니 극구 사양하며 다시 추자도에 오면 그땐 꼭 자기 집에 오라면서 명함을 준다. ‘추자도 사람들 진짜 부자인가 보네’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과연 일기예보가 틀리지 않았다. 선착장까지 가려면 십 분 정도는 더 걸어야 하는데 별 수 없다. 산길이라 피할 곳도 없고 그냥 비를 맞고 걷는다. 이것도 변화무쌍한 어촌의 겨울 맛이라 생각하며 걸었다. 오후 네 시 이십 분, 완도로 돌아오는 배를 탔는데 배 안에서 일몰을 구경했다. 일출과 일몰을 하루에 다 보았으니 이날 운이 아주 좋았다.

 

 

완도의 시애틀 호텔에서 하룻밤 더 묵고 이튿날 아침 전복죽 한 그릇 먹고는 서둘러 귀경길에 올랐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차는 막힘없이 달렸다. 만물이 잠드는 겨울, 그러나 봄 색이 완연한 추자도에서 우리는 느림과 고요의 선물을 듬뿍 안고 왔다. 세상의 모든 시계들이 똑딱거리거나 말거나 여린 뿔을 허공에 이리저리 흔들며 나아가는 풀잎 위의 달팽이처럼 올해는 그냥 이렇게 느리게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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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아침부터 기분이 엉망이다.

안방 침대를 바꾸느라고 침대 밑에 들어있던 가방과 앨범 등

 잡동사니들이 정리가 안 된 채 방에 나뒹굴고 있고,

전날 딸네 식구가 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고 가는 바람에

평소 쓰지 않던 그릇들이 대거 등장하여 부엌 살림살이도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설상가상, 아침밥을 먹던 남편이 생선찌개에 쑥갓이 안 들어갔다면서

느닷없이 쑥갓 타령을 하는 거였다. ‘아무리 남자지만 이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되나?’

가뜩이나 심란하던 차에 열이 오른 나는

급기야 먹던 밥숟갈을 식탁에 던져놓고 먼저 일어섰다.

 

 

 

 

덕분에(?) 일찌감치 집안일에 돌입, 먼저 분리수거부터 하였다.

그런데 모아둔 신문지와 빈병을 들고 나가다가 아파트 현관 앞에서

그만 소주병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은 산산조각이 났고

내 마음도 마찬가지!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가 청소를 하고

 혹여 작은 조각이라도 남아있을까 싶어 물휴지로 마무리했다.

 

 

평소 분리수거는 남편 담당이었는데 홧김에 안 하던 일을 하려니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 사이 남편과 딸은 출근을 했고 널브러진 집안일을 뒤로 미룬 채

나는 누웠던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왠지 더 이상 무슨 일을 했다가는

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커피 한잔 들고 신문 보는 푸성귀같이 상큼한 아침 시간도 포기했다.

그냥 시간이 좀 지나면 평온이 유지될 거라고 생각했다.

 

 

머리맡 라듸오에서는 올드송이 흘러나왔다.

팻분, 냇킹콜, 패티페이지의 노래로 방금 전까지 아프고 괴로웠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를 받는 듯했다. 꽤 긴 시간을 그렇게 누워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암사동 사는 내 친구였는데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저녁에 남편과 함께 우리 집에 오겠단다.

 다시 집안일을 시작했다.

 

 

전날 딸네가 와서 먹고 남은 음식이 있어 따로 장보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손님이 온다고 하니 갑자기 분주해졌다.

 

 

친구네가 오면서 생선회와 과메기, 막걸리 등을 사가지고 왔다.

거기에다 내가 속성으로 빚은 만두와 메밀묵까지 더하니 근사한 상차림이 되었다.

갑작스런 친구의 방문에, 그것도 내 친구 부부인데 나보다도 남편이 더 좋아했다.

더구나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회까지 사 왔으니...

술잔을 주고받으며 번지는 은은한 웃음 한 자락은 이내 기쁨의 불꽃이 되어

아침에 각진 마음들이 어느 새 눈 녹듯 사라졌다.

불편했던 남편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해결된 셈이다.

 

 

 

 

긍정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돈이나 일보다

더 중요한 행복의 요소는 끈끈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행복감이라고 했다.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글에서처럼

특별히 꾸미지 않고 입던 옷에 슬리퍼 끌고 찾아갈 수 있는 벗이 가까이 살아서 참 좋다.

 

 

내가 힘들 때마다 지치지 않고 챙겨주는 보배로운 친구,

갈 때 얼린 만두와 시레기 삶은 것을 선물로 싸 주었다.

맛있는 사과를 혼자 먹으면 단순히 사과일 뿐이지만

나누어 먹으면 사과가 사랑으로 변신하듯이 역시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사는 것인가 보다.

 

 

살다보면 비 내리는 아침, 바람 부는 낮, 눈 내리는 저녁이 있다.

그런 아침과 낮과 저녁의 나날이 반복되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이날 나의 하루는 오전 시간은 불행, 저녁 시간은 행복이었다.

그러고 보니 추상명사인 행복과 불행은 쌍둥이처럼 늘 붙어 다니는 것 같다.

 

 

요즘 내가 깨달은 가장 큰 행복은 무탈의 일상,

특별한 일이 없는 하루이다.

건강하게 일어나 나는 아침밥을 짓고 남편과 딸은 출근을 하고...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 선물이라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없는 게 가장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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