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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노트

|함수연| 만남 2012. 12. 21. 09:59

 

지난 일요일 ‘엔딩노트’라는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을

막내딸이 6개월간 쫓아다니면서

찍은 일본 영화인데 그 딸은 평소 가족의 일상을 찍어온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너무 슬퍼서

울게 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후반부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을 정도로

시종 잔잔했다.

 

간간이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파는 아니다.

끝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주인공은 월급쟁이로 일하다

은퇴한 69세의 스나다 도모아키 씨.

 

회사 임원으로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그는

건강검진을 통해 위암 4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43년간 가족 부양하면서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는 노후를 맘껏 즐기리라 생각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람! 전혀 예상치 못한 일.

수술도 못하고,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손 쓸 방법도 없이

그저 죽음을 바라보아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6개월의 시한부 삶, 그는 얼마간의 번민 끝에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를 대하듯

꼼꼼하게 본인의 죽음을 준비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본인과 남겨질 가족 모두에게

위안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퇴직 후 준비했던

인생 2막을 대신해서 엔딩노트를 쓰는 것이다.

 

스나다 씨의 엔딩노트는 말하자면 그의 버킷리스트이다.

결혼식장 물색이후 처음으로 아내와 식장(장례식장) 답사하기,

가족들과 바닷가 여행하기, 평생 거리를 두었던 신(神) 믿어보기,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손녀들 머슴 노릇해주기,

자신의 장례식 초청자 명단 작성하기, 예금과 부동산,

신용카드와 통장에서 자동이체 되는 것들을 정리하면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목록들을 기록해 나갔다.

 

얼핏 보면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이렇듯

그의 엔딩노트는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진솔했다.

엔딩노트에 적은 리스트를 하나 둘 시도하는 동안

그는 항암치료로 인해 몸은 점점 바스라져 갔다.

 

그럼에도 ‘아프다’ ‘슬프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아빠는 힘내고 있어.”라며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가족과 함께 노후를 즐기는 평범한 노인처럼 행동했다.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가족들 역시 슬퍼하기보다는

아빠의 마지막이 행복하길 빌며 함께 힘을 낼 수 있었으리라.

스나다 씨는 아픈 와중에도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

가족여행을 떠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유머감각도 잃지 않았다.

“장례식 중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물어보라”고

농을 건넬 정도로 씩씩했다.

“69년이나 행복하게 살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긍정적 생각의 결과이다.

영화에는 스나다 부부의 신혼 시절과

아이들 어릴 적 함께 놀던 장면, 직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중년 가장의 모습도 간간이 나왔는데

그들도 우리 부부와 비슷한 세대이기에 공감이 컸다.

늙으신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는 게

얼마나 큰 불효인지를 아는 스나다 씨는

그래서 죄송하다는 말로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특히 손녀를 지극히 아끼던 주인공이 임종을 앞두고

의식을 잃었다가 손녀딸들의 목소리를 듣고 의식을 되찾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절로 나왔다.

비록 어리지만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를 아이들은 알 것이다.

또한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우리가 흔히 듣는 주례사 중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랑하며 살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단순해서 그냥 흘려듣게 되지만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스나다 씨 부부는 뒤늦게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들 부부는 오랫동안

각방을 쓰며 서로가 바쁘게 살았기에.

마지막 순간 아내와 자식 손녀들에게 둘러싸인 스나다 씨는

“이렇게 다들 모이니 여기가 천국”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리고 부인에게는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라는

마지막 고백을 남긴다.

반면 부인은 당신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어

미안하다고 화답한다.

일부러 감정을 쥐어짜지 않는데도 객석 곳곳에선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우리의 이별 장면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

앤딩 장면은 처마밑 고드름처럼 쨍하게 가슴을 찔렀다.

극장을 나오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영화 보신 소감은?”

“어머니를 나보다 먼저 잘 보내드리고

그리고 당신에게는 평생 머슴으로 살기로 했네!”

흐흐 내가 극장표 끊어주길 참 잘했네...

이 영화는 평소 잊고 살지만

누구에게나 닥칠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과연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가까운 이들과는 어떻게 이별해야 할까,

지난해 10월 개봉한 이 영화가 상영된 후

일본의 중, 장년층 사이에서는

‘엔딩노트’ 쓰기 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죽음은 벌이 아니라 긴 여행 끝 귀향이라고 했다.

대부분 무방비로 죽음을 맞으면서,

빠른 속도로 고령화돼가는 우리에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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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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