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수연'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2.12.21 엔딩노트
  2. 2012.10.04 비둘기 소동
  3. 2012.09.20 가을이 가기 전에
  4. 2012.06.25 책 출판, 그 후

엔딩노트

|함수연| 만남 2012. 12. 21. 09:59

 

지난 일요일 ‘엔딩노트’라는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을

막내딸이 6개월간 쫓아다니면서

찍은 일본 영화인데 그 딸은 평소 가족의 일상을 찍어온

일본의 영화감독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너무 슬퍼서

울게 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는데

후반부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을 정도로

시종 잔잔했다.

 

간간이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파는 아니다.

끝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주인공은 월급쟁이로 일하다

은퇴한 69세의 스나다 도모아키 씨.

 

회사 임원으로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그는

건강검진을 통해 위암 4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43년간 가족 부양하면서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는 노후를 맘껏 즐기리라 생각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람! 전혀 예상치 못한 일.

수술도 못하고,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손 쓸 방법도 없이

그저 죽음을 바라보아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6개월의 시한부 삶, 그는 얼마간의 번민 끝에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를 대하듯

꼼꼼하게 본인의 죽음을 준비한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본인과 남겨질 가족 모두에게

위안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퇴직 후 준비했던

인생 2막을 대신해서 엔딩노트를 쓰는 것이다.

 

스나다 씨의 엔딩노트는 말하자면 그의 버킷리스트이다.

결혼식장 물색이후 처음으로 아내와 식장(장례식장) 답사하기,

가족들과 바닷가 여행하기, 평생 거리를 두었던 신(神) 믿어보기,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손녀들 머슴 노릇해주기,

자신의 장례식 초청자 명단 작성하기, 예금과 부동산,

신용카드와 통장에서 자동이체 되는 것들을 정리하면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목록들을 기록해 나갔다.

 

얼핏 보면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이렇듯

그의 엔딩노트는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진솔했다.

엔딩노트에 적은 리스트를 하나 둘 시도하는 동안

그는 항암치료로 인해 몸은 점점 바스라져 갔다.

 

그럼에도 ‘아프다’ ‘슬프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아빠는 힘내고 있어.”라며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가족과 함께 노후를 즐기는 평범한 노인처럼 행동했다.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가족들 역시 슬퍼하기보다는

아빠의 마지막이 행복하길 빌며 함께 힘을 낼 수 있었으리라.

스나다 씨는 아픈 와중에도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

가족여행을 떠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유머감각도 잃지 않았다.

“장례식 중 문제가 생기면 나한테 물어보라”고

농을 건넬 정도로 씩씩했다.

“69년이나 행복하게 살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긍정적 생각의 결과이다.

영화에는 스나다 부부의 신혼 시절과

아이들 어릴 적 함께 놀던 장면, 직장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중년 가장의 모습도 간간이 나왔는데

그들도 우리 부부와 비슷한 세대이기에 공감이 컸다.

늙으신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는 게

얼마나 큰 불효인지를 아는 스나다 씨는

그래서 죄송하다는 말로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특히 손녀를 지극히 아끼던 주인공이 임종을 앞두고

의식을 잃었다가 손녀딸들의 목소리를 듣고 의식을 되찾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절로 나왔다.

비록 어리지만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를 아이들은 알 것이다.

또한 자기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우리가 흔히 듣는 주례사 중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랑하며 살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단순해서 그냥 흘려듣게 되지만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스나다 씨 부부는 뒤늦게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들 부부는 오랫동안

각방을 쓰며 서로가 바쁘게 살았기에.

마지막 순간 아내와 자식 손녀들에게 둘러싸인 스나다 씨는

“이렇게 다들 모이니 여기가 천국”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리고 부인에게는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라는

마지막 고백을 남긴다.

반면 부인은 당신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어

미안하다고 화답한다.

일부러 감정을 쥐어짜지 않는데도 객석 곳곳에선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우리의 이별 장면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

앤딩 장면은 처마밑 고드름처럼 쨍하게 가슴을 찔렀다.

극장을 나오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영화 보신 소감은?”

“어머니를 나보다 먼저 잘 보내드리고

그리고 당신에게는 평생 머슴으로 살기로 했네!”

흐흐 내가 극장표 끊어주길 참 잘했네...

이 영화는 평소 잊고 살지만

누구에게나 닥칠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과연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가까운 이들과는 어떻게 이별해야 할까,

지난해 10월 개봉한 이 영화가 상영된 후

일본의 중, 장년층 사이에서는

‘엔딩노트’ 쓰기 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죽음은 벌이 아니라 긴 여행 끝 귀향이라고 했다.

대부분 무방비로 죽음을 맞으면서,

빠른 속도로 고령화돼가는 우리에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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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 ;;

내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비둘기에게 시달린 생각을 하면

평화의 상징은커녕 완전 고통과 증오의 대상이다.

 

 

어느 날 베란다 바깥쪽에서

 “꾸르륵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소리는 계속 들려왔고,

그것은 사람의 신음소리 같기도 한

조금은 기분 나쁜 소리였다.

 

 

그로부터 한 사나흘이나 지났을까,

볕 좋은 날을 골라 이불을 말리려고

베란다 창틀을 열어젖히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베란다 밖에 붙어있는 에어컨 실외기 밑에

하얀 비둘기 알 두 개가 얌전히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엔 온갖 배설물과 깃털과 지푸라기들이 널려 있었다.

 

 

얼마나 긴 시간에 걸쳐서 작업을 했는지

그것들은 마치 시루떡에 고물을 얹어 놓은 것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에어컨 전선을 감아 놓은 검정색 비닐 테이프를

비둘기들이 전부 물어뜯어서 굵은 철사는 맨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날부터 비둘기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비둘기 털과 배설물을 방치할 수가 없었다.

일단 창가에서 끼륵거리는 소리가 났다하면 문을 열어 날려 보냈다.

하지만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날아왔다.

대개는 둘이나 넷씩 짝을 지어 다녔는데

아무리 인기척을 보내도 굳건하게 제 자리를 고수하는 놈도 있었다.

그럴 땐 지팡이로 에어컨 몸체를 세게 두드려서 내쫓았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도대체 이 골칫덩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보통 고민이 아니었다.

 

 

궁리 끝에 한번은 시장에 가서

바퀴벌레 약을 사다가 뿌려 보았다.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알은 세 개가 더 늘었다.

하여 알을 품느라고 비둘기는 더 비번하게 날아들었고

신음소리도 더 크게 들려왔다.

 

 

집에 있어도 불편했고 외출을 해서도 ‘비둘기를 쫓아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남편은 그냥 놔두라고 했다.

 

 

그런데 9월 반상회 때 비둘기 얘기가 나왔다.

알고 보니 5층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장 일을 맡고 있는 5층 아저씨는 끈끈이 쥐약을 사다 놓자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 짓은 못할 것 같아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옥상에 펼쳐 놓았던 고추를 걷으러 올라갔다가

 나는 또 한번 충격적인 장면과 마주쳤다.

빨리 마르라고 고추를 반으로 잘라서 널었더니

고추씨가 많이 떨어진 탓에 비둘기들이 떼거리로 몰려와

 씨를 쪼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인기척에 놀란 비둘기들이 날아간 후

자세히 보니 깔개 밑에 가지런히 누워있던 고추들은

시멘트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고

사이에는 깃털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오, 맙소사! 이곳 또한 비둘기 세상인 줄을 몰랐다니...

기왕에 고추 농사를 지었으니

빛 고운 태양초 고춧가루도 내손으로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일념으로 날마다 그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했건만 뜻밖의 훼방꾼이 숨어 있을 줄이야.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다음날에 119로 문의를 해봤다.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난 상담자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자기네가 도와줄 수 있는 사항은 아니라며 만일 비둘기가 다쳤다거나

날지를 못해서 구원을 요청하면 그때는 출동해서 수거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같은 경우는 사설로 운영하는 해충박멸협회에

연락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비둘기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최근 따뜻한 겨울이 지속되면서 대도시에 비둘기 수가 급증하고 있으며

1년에 4~5번 이상 번식하는 비둘기는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한겨울에도 알을 낳는다고 한다.

 

 

이렇게 번식률이 좋으니 개체수가 엄청나게 늘어갈 수밖에.

법제처에서는 비둘기가 ‘야생조류’라는 유권해석을 내렸고

이 때문에 비둘기를 전문으로 퇴치하는 업체가 여러 곳에 등장했단다.

 

 

비둘기 배설물과 털을 통해서 사람에게 유해한

세균이나 기생충이 전염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그래서 최근 공장이나 가정에서 비둘기 퇴치 요청이

심심찮게 들어온다고 했다.

만일 말라붙은 비둘기 똥이 바람에 날리거나

비둘기의 잔해로 인해서 예기치 못한 전력 사고가 발생된다면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혼 초, 집들이라는 명목으로 남편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는 듀엣으로 ‘비둘기 집’을 불렀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 ~ ~”

정말 그때는 비둘기가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었으며

다른 새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지금도 생각난다.

88올림픽 개막식 때 잠실벌을 수놓았던 수천 마리의 비둘기 떼를.

 

 

비둘기 집도 참 예뻤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살았던 둔촌 아파트 저층 옥상에도

알록달록한 색깔의 비둘기 집이 여러 채 있었다.

 

 

아마도 관리사무소에서 별도로 지어준 것 같았다.

비둘기 집은 바로 우리 집 앞 동에 있었던 지라

우리는 날마다 비둘기가 들고 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가끔씩은 아이들이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 주기도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도시가 아파트 숲으로 바뀌자

서식지를 잃은 많은 새들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런데도 비둘기만큼은 계속 세를 불리고 있고

그로 인한 피해 또한 만만치 않으니 그 놈은 이미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그나저나 평화로운 방법으로 비둘기 퇴치할 묘안을 나는 아직도 찾질 못했으니 어쩐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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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일 던져놓고

어디론가 떠나야만 할 것 같은 계절.

벌써 산간지방에는 첫얼음이 얼었다는데

더 늦기 전에 단풍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단풍과 낙엽과 추억이 함께 머문 곳,

나의 모교를 찾아 나섰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

늦은 오후 시간의 대학로 거리는

젊은이들로 초만원이었고

수많은 공연장과 카페와 어지러운 간판들도 여전했다.

 

 

 더구나 이날이 빼빼로 데이라나 뭐라나.

편의점과 빵집 앞은 화려한 포장의 특정과자들로 넘쳐났으며

젊은 연인들을 향한 호객행위도 맹렬했다.

그러나 서운하게도 나에게 판촉활동을 벌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과자 회사의 얄팍한 상혼이라 비난해도

이날만큼은 나도 충분히 구매의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것도 젊은 사람한테만 해당된다 이거지.

그래, 젊음도 낭만도 다 때가 있거늘 실컷 즐기려무나.’

 

 

애써 담담한 듯 걸어가는데

거리를 오가는 젊은이들의 발랄하고 거침없는 몸짓이

그들과 나의 연령차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갑자기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생각에

자연스레 ‘카사노바’를 떠올렸다.

그곳은 우리 과 친구들의 아지트라 할 만큼

 거의 매일 들렀던 찻집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간 다방, 야간 호프집이었다.

 

 

당시에는 명동이나 대학가에 통기타 문화를 대변하는

그런 형태의 라이브 카페가 대유행이었다.

우리들은 ‘카사노바’에서 자주 차와 맥주를 마시고

신청곡도 주문했지만 아주 가끔씩은 그래도

국문과 티를 낸다고 문학과 실존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그러나 십여 년 만에 찾아간 그 찻집은 CGV 영화관으로 바뀌었고

학교 바로 앞 ‘명륜 다방’ 역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변해버렸다.

 

 

차 마시기를 포기하고 교정으로 들어섰다.

내 젊음이 녹아있는 그리운 곳.

성균관이라는 교패를 보자 콘크리트 같던 마음에 비로소 피가 도는 것 같았다.

교문 입구에서부터 겨자색, 주황색, 밤색 등 형형색색의 나뭇잎이 어우러져

 캠퍼스 전체가 애니메이션 화면처럼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위에서부터 붉은 물이 들어 아랫부분의 초록과 대비를 이루는데

빨강도 아니고 초록도 아닌 중간 톤이 어찌 그리도 곱던지...

정녕 사람을 숙연하게 만드는 가을의 빛!

이보다 더 조화로운 색조를 그 누가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오랜 만에 가져보는 이 여유.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무리지어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낙엽들이,

살아있다는 기쁨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화단에는 황국(黃菊)도 피어 있었다.

그 옆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동아리 모임 후 뒤풀이라도 하는 걸까?

여남은 명의 남녀가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봄날처럼 싱그럽고 정다워 보였다.

여름에 무성했던 풀들이 쇠락하여 누런빛을 띠는 것처럼

나 또한 저들처럼 번성한 시절이 있었거늘,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이제는 세상의 모든 사태를 조금 떨어져서 관조할 뿐이다.

 

 

쇠락과 번영은 고정된 바가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아는 나이가 되었으므로.

초입에서부터 더 이상 어슬렁거렸다가는 금세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

이번에는 마사이족처럼 빠른 걸음으로 문과대학과 여학생 회관을 찾았다.

 그러나 그곳 역시 건물이 바뀌었거나 리모델링해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넓디넓던 금잔디 광장도 광장이라고 부르기엔 형편없이 작아 보였다.

대신 중앙도서관은 늠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 캠퍼스 한가운데 턱 버티고 있었다.

 

 

잠시 은행나무 아래 걸음을 멈추고 호젓한 나만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은행잎 천지였다.

샛노란 은행잎은 사랑을 간직한 엽서 같았고 황금빛 축제장 같기도 했다.

나는 바람에 업혀 요리저리 맴돌다 떨어지는 은행잎을 몇 장 주워 수첩에 끼워 넣었다.

“잘 왔지?” 은행잎이 나긋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 포근한 낙엽의 잔치가 끝나면 머지않아

나무에는 눈꽃이 피어나고 매서운 바람이 불 것이며

어렵디 어렵게 봄이 찾아와 또 한바탕 꽃 잔치를 치르게 되겠지.

 

 

멀리 커피 자판기가 보였다.

반가웠다.

늦가을 오후에 캠퍼스 벤치에서 홀로 마시는 커피.

그런데 커피를 마시다가 나는 문득 지나온 기억의 아픈 계단을 밟아버린 듯 신음을 쏟았다.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 그리운 친구 경순이.

많은 세월이 갔어도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나의 화두로 출렁거렸다.

 

 

강의실, 도서관, 식당, 그리고 학교 운동장에서

 삼청공원 넘어가는 후문 앞 오솔길까지 친구와의 추억은 캠퍼스 곳곳에 서려 있었다.

나는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경순이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대학에서 처음 만나 연인들처럼 서로가 반해 버렸다.

학교 가는 목적이 공부보다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주저 없이 말하였고

하루라도 못 보면 궁금하고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마 요즘 같으면 동성애자로 오해 받을 수도 있었겠다.

얼굴이 하얗고 가녀린 외모의 그녀는 특히 복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덕분에 나도 그녀와 붙어 다니면서 남학생들에게 공짜 밥과 차를 많이 얻어먹었다.

 

 

더욱 기막힌 일은 졸업 후에 서로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각각 남자친구를 소개 받았는데,

나중에 보니 두 사람은 동갑내기에다 같은 직장 동료였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 맞아 떨어져서 아마 우린 전생에 부부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혼해서도 일주 일이 멀다고 느낄 만큼 자주 만났다.

 

 

그랬었는데, 부부끼리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예기치 않게 찾아든 불행의 그림자가 그녀의 안락한 삶은 물론

우리의 오랜 우정까지도 송두리째 앗아갔다.

 

 

뇌성마비 장애를 안고 태어난 첫아들,

남편의 방황, 별거, 이혼,

끝도 없이 잇따른 절망의 늪은 연약한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깊고 험했다.

 

 

결국 친구는 주변의 모든 인연과 손을 끊고 연락 두절 상태로 들어갔다.

백방으로 찾아 다녔지만 허사였다.

나중에는 친구가 극단적인 선택만은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너무 커서 배신감마저 들었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만은 그럴 수 없다고,

도저히 그럴 수는 없노라고!

 

 

다시금 친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20대 초반에서 몇십 년에 또 몇십 년이 더해진 고목 같은 우리들 나이를 생각할 때,

이제 다시 만난다면 세상 가운데 우뚝 서서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나무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으련만...

 

 

사랑도 우정도 끝내는 다 놓고 갈 것이지만

사는 동안 나는 얼마나 더 간절하고 연연해할 것인가.

깊어가는 이 가을, 그리움의 빈 잔에 사랑의 열매를 채우기 위해

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허영자 시인의 ‘가을 기도’를 나직이 읊조렸다.

 

 

가을기도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 주십시오.

뜨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먼 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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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없이

또 한 권의 책을 엮었다.

 

내 이름을 달고 나온

세 번째 책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와 달리

이번에는 주변의 반응이 뜨거웠다.

 

많은 사람들이 전화와

문자로 격려를 해주었고

이메일로 독후감을 써준 사람도

서넛 있었다.

 

 

 

싱가포르에 사는 여동생은

습작 같은 치졸한 산문집 수준에서 벗어나

글이 많이 세련되었다고 전화로 말해 주었다.

아랫사람으로서 조금 건방진 발언 같았으나

그냥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책이 나오고 나서 맨 처음의 독자는

가족이었다.

남편은 백 권이 넘는 책을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배포했다.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출판비의 절반 이상을 부담했던 터라

그는 정말 부담 없이 책을 돌렸다.

 

추가 주문도 받아 왔다.

작년 12월3일에는 남편의 고교 동창 송년 모임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어 주어

저자 사인회도 가졌다.

 

나중에 거기서 걷힌 책값을

동창회 장학금으로 내놓으면서

남편은 꽤나 으쓱해했다.

 

큰딸도 30권만 사겠다면서

책값을 부쳐왔다.

우리 엄마가 책의 저자라고 뻐기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단다.

헌데 유독 작은딸만은 시종 무관심으로 일관.

이유인즉슨 책 속에 등장한 자기의 술 취한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망신스럽기 짝이 없단다.

왜 엄마는 그런 얘기를 자기 허락도 없이 썼느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엄연한 초상권 침해라나 뭐라나.

 

그 후 1월 중순 쯤,

재미있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평소 알고 지내던 권사님인데

자기 남편이 내 책을 읽고 나서

저자와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단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유명작가도 아니고

또한 나를 만나면 남편의 환상이 깨질까봐 걱정된다며

나름대로 재치 있게 거절한다고 했건만

거듭된 요청에 결국은 수락하고 말았다.

 

며칠 후 우리는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정식 집에서 만났다.

깔끔한 인상의 그 남편분은 말수는 적었지만

문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오랫동안 시를 썼다고 했다.

그는 내 책 내용은 물론

우리 딸들 이름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책읽기가 아까워서

단숨에 읽기보다는 한번에 네 편씩 아껴가며

읽었노라고 수줍게 털어놓았다.

 

아, 이보다 더 큰 찬사가 어디 있으랴...

사실 이번 책 출판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딸의 혼사준비,

어머님의 수술과 장기 입원 등으로

글 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게다가 같은 자세로

긴 시간을 컴퓨터와 함께 하다 보니

목 디스크까지 걸려

근 석 달 간 물리치료까지 받았다.

어쩔 수 없이 글쓰기는 당분간 접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날의 황홀한 칭찬에 힘입어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고 말았으니

실로 성취가 주는 마력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앞으로 권사님은 빠지시고 우리 둘이서만 만나면 안 될까요?”

 

하고 내가 농담을 건넸더니

그분은 그건 절대 안 된다며 정색을 하는데

옆자리의 부인은 몹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응수한다.

“아휴, 우리 남편 순진하시기는...”

 

책 출판 후,

가장 획기적인 일은

안사돈으로부터 받은 책 주문이었다.

딸아이의 결혼식을 앞두고

사돈과 함께 한 자리였다.

 

상견례이후 두 번째 만남이어서

아직은 많이 어색한 분위기였는데

안사돈이 갑자기 책 얘기를 꺼내는 거였다.

아들이 가지고 있던 내 수필집을 빌려 읽으셨단다.

 

 

“저, 이런 얘기 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사실은 제가 소현이 어머니 책을 읽고 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댔어요.

  한 20권쯤 주문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재고가 없다지 뭐에요.”

 

뜻밖의 발언에 뭐라고 답해야 될지 몰라서 잠시 생각하는 사이 딸이 먼저 말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집에 책 많이 있어요.”

 

어떻게 집에 책이 많이 남았냐는 질문에 딸은 또 말했다.

“안 팔린 책이 박스 가득 있다니까요.”

 아, 이럴 땐 내가 뭐라고 해야 하나....

 

또 여러 사람들이 물었다.

책은 많이 팔렸는지,

비둘기 소동에 나온 그 비둘기들은 어찌 되었는지,

남편은 아직도 줄기차게 택배를 시키는지,

등등 궁금한 게 많았나 보다.

 

한편 내용이 중복되어서

책의 완성도가 떨어졌다는 고마운 충고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재미있었다고 했다.

보통 수필이 재미없다고들 한다.

 

 ‘사실의 재현과 전달’이라는

수필 본래의 정의와 성격에 갇혀 그렇게 인식되는 것 같다.

소설이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은 수필에게도 해당된다고 본다.

지나치게 논리적이며

추론적인 수필은 독자의 접근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사랑, 끝나지 않은 여정>은

대충 읽을 사람들을 고려해서 지루하지 않게 쓰려고 노력했다.

가능한 대로 꾸미지 않고 쉽게 썼다는 얘기도 될 터인데

만일 누군가가 신변잡기에 불과한 글이라고 혹평을 해도 나는 기꺼이 감수하겠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네 삶은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던가.

세상 모든 생명이 저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그래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은

나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 격려와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억지 꾸밈도 뽐냄도 없는 잔잔한 글,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들이었는데

더러 공감해준다면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어느 수필가가 말했다.

 ‘수필은 솔직하면 창피하고 감추면 의미가 없다’고.

속을 다 드러내고도 부끄럽지 않을 경지에 이른 인격이라야

비로소 수필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종(鍾)이 좋아야

좋은 소리를 울리듯

마음이 넓고 맑아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당연한 이치라고 본다.

 

인생의 경지가 곧 수필의 경지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글공부와 더불어 마음 밭을 가꾸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번에 내가 사인해서

준 책을 오래오래 간직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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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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