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수연| 만남'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4.02.10 추자도에 가면...
  2. 2014.01.13 무탈행복론
  3. 2013.12.11 어떤 결혼식
  4. 2013.11.14 영감 입은 입이고 내 입은 주둥이요?
  5. 2013.10.14 광화문 연가
  6. 2013.09.06 글씨공사
  7. 2013.07.23 국수여행
  8. 2013.06.24 아, 어머니
  9. 2013.05.21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10. 2013.04.12 나는 학습지진아였다

“무조건 떠나는 거야!”

 

작년에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설 여행’을 드디어 관철시켰다. 집안에 맏이인 우리가 명절에 집 떠나보기는 결혼 후 처음이다. 시댁과 친정이 다 서울인지라 우리에겐 찾아갈 고향이 없었고, 그래서 명절 때 차 밀리는 고향 길 대열에 나도 꼭 한번 껴보고 싶었다.

 

 

설날 새벽 두 시에 출발하여 여섯 시간 만에 완도 여객터미널에 도착, 거기서 배를 타고 다시 두 시간 반을 달려 목적지인 추자도에 안착했다. 집에서부터 거의 아홉 시간이 걸렸는데 고속도로가 엄청 막힐 거라고 극구 반대했던 애들의 염려와는 달리 길은 뻥 뚫렸다. 다만 새벽안개로 인해 운전에 조금 방해를 받긴 했지만 그 또한 처음 해보는 경험이라 신기했다. 물안개를 가르며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몽환적이면서 스릴이 넘쳤다.

 

 

 

 

추자도 선착장에 내리니 <고향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러 척의 배들은 모두 정박해 있고 고단함이 깃든 어부들의 일상도 설을 맞아 잠시 휴식기에 들어간 듯 섬 마을은 전체적으로 고요했다. 인적 없는 적막한 바다를 갈매기 떼들이 대신 지켜주고 있었다.

가장 먼저 숙소를 잡아야 했기에 가기 전에 인터넷에서 찾아본 몇 군데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시작부터 방이 꽉 찼다는 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님 명절이라서 고향에 내려온 자식들이 묵고 있어 대부분 방이 없단다.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섬에 갇혀 미아 신세가 되는 건 아닐까, 고민 끝에 남편이 해양경찰대에 들어가 읍소(?)를 했다. 다행히 한 군데를 찾았다. ‘태성레저’ 이층에 방이 많은 걸 보니 수입이 꽤 짭짤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민박집은 잠자리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매끼 밥까지 차려준단다. “야호, 땡잡았다!” 쾌재를 부르며 갔다. 주름살 가득한 주인 할머니는 어서 오라며 반색을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부부를 이미 예약한 다른 팀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어쩐지 지나치게 반가워하신다니... 다행히 자식들이 오후에 떠나면 방은 여유가 있을 테니 나갔다가 저녁 먹을 때 들어오라고 했다. 아무렴 재워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무얼 더 바라겠는가.

 

 

 

 

삼치, 참돔, 멸치젓갈 등으로 할머니가 풍성하게 차려준 점심을 잘 먹고 나서 짐을 챙기려는데 아, 이럴 수가! 옷가방이 행방불명이다. 각자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베낭만 짊어진 채 왔던 것이다. 혼비백산하여 가방 찾기에 나섰다. 처음 추자도에 도착하여 우리가 들렀던 곳을 하나하나 되짚어 갔다. 편의점, 면사무소, 해양경찰대... 그러다가 저 멀리 면사무소 앞 의자에 놓여있는 까만 직사각형 물체를 내가 먼저 발견했다. 틀림없는 우리 것이었다. 지도를 얻으러 면사무소에 들렀다가 놓고 나왔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가방을 보니 갑자기 추자도 사람들에 대한 신뢰도가 급상승했다. 가방을 갖고 다시 들어서는 우리를 보고서 “거봐요! 우리 추자도 사람들은 절대로 남의 물건에 손 안 댄다니까.” 웃으며 말하는 할머니 얼굴에 섬광처럼 스치는 자부심이 엿보였다. “네, 천만다행이에요. 아님 우린 이 길로 서울 가야했을 텐데...” 정말로 가방을 못 찾았다면 나는 다 때려치우고 곧바로 집으로 가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본격적인 올레길 탐방에 나섰다. 어느덧 시간은 오후 두 시, 뜻밖에도 올레길 초입에 학교가 있었고 때맞추어 알록달록 깃발을 든 풍물패가 운동장을 돌며 지신밝기를 하고 있었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민속놀이, 조용한 섬마을에 농악단의 흥겨운 가락이 울려 퍼지니 비로소 사람 사는 동네 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그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학교 뒷마당에는 고려 시대 장군이었던 ‘최영 장군 사당’도 있었다. 그래, 장군이 남겼다는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명한 말이 있었지.

남녘이라 그런지 산 속은 봄기운이 가득하여 길옆으로 유채꽃과 동백꽃이 만발했다. 해안가라 그런지 비자림도 많았고 겨우내 매서운 바람을 이겨낸 단단한 고사목도 더러 있었다. 모두가 수천 년의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걸작품들이었다. 사실 눈 덮인 겨울 산을 밟고 싶어서 아이젠까지 갖춰갔는데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날 기온이 영상 10도가 넘었다고 하니 거의 한 달을 앞당겨서 봄을 만난 셈이다.

길은 거의가 완만한 오르막이었지만 평소 내 운동량으로 볼 때 세 시간 넘게 걷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첫날의 목표인 등대섬까지는 무사히 올라갔다. 등대에 다다르니 추자도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 각도에서 바라봐도 절경이다. 자연과 인간을 아우르는 오묘한 조화가 마치 밀레의 저녁 풍경을 연상 시켰고 아무도 없는 호젓한 길은 신성한 순례지 같았다. 평화와 자기 극복의 시간,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인 것 같다.

 

 

긴 시간의 트레킹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저녁을 먹으려는데 낯선 얼굴들이 먼저 식탁을 점령하고 있었다. 주인장 할머니가 아까 우리와 착각하셨던 중년의 커플이었다. 그들은 성지순례 중이라고 하는데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부인은 어딘가 아픈 사람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부부의 얼굴에서는 기품과 온화함이 느껴졌고 식탁에 앉아 여러 번 성호를 긋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튿날은 일곱 시쯤 기상하여 일출을 보았다. 어둠을 걷어내고 장엄하게 떠오르는 해, 2014년 새해 첫날 하지 못했던 해맞이를 추자도 민박집에서 하게 될 줄이야! 아침밥을 먹자마자 성지순례 팀 부부는 제주도로 떠났고 우리는 다시 올레길에 나섰다. 어제는 상추자도였고 오늘은 하추자 탐방 길인데 하추자도에는 음식 사먹을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할머니가 친절하게도 점심 도시락을 싸주셨다. 삼다수 물병까지 곁들여서.

 

 

아침에 일기예보를 들으니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했는데 날씨는 티 없이 맑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걷는 길, 역시 인적이 없다. 어제에 이어 그 고독과 외로움이 주는 풍요가 참 좋다. 햇빛에 부서지는 은빛파도도 아름답지만 바닷바람에 광포하게 춤추는 갈대밭은 더 아름다웠다. 인기척에 놀라 날아가는 새들도 만났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의 삼박자가 잘 어우러진 공간이다. 하추자 길섶에는 쑥이 참 많았고 물기가 있는 곳에는 돌미나리가 무더기로 올라와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쑥과 미나리를 뜯었다. 금세 한 봉지가 가득 찼다. 그것들은 해풍을 맞으며 한겨울 땅속에서 꿋꿋하게 자란 것들이니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벌써부터 쑥 된장국 냄새가 솔솔 풍겨오는 듯했다.

이날 올레길에서 만난 ‘황경헌의 눈물’이라는 샘물이 가장 인상에 남았는데 거기에는 너무도 가슴 뭉클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황경헌은 조선 순조 때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 시 백서를 작성한 황사경과 정난주(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황사영은 약관 16세 나이로 진사에 급제한 인사로서 당시 명문가인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결혼하였고 신유사옥 때 천주교의 핵심 주모자로 지목되어 처참하게 순교하였다.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는 제주 대정현의 관노로 유배되어 37년간 길고 긴 인욕의 세월을 살았고 당시 두 살이던 황경헌은 추자도로 유배되어 항상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이곳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애끓는 소망에 하늘이 탄복하여 내리는 황경헌의 눈물로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늘 흐르고 있다.

 

 

자칫 밋밋하기만 했던 올레길에 숨어있었던 이 애틋한 사연은 지나가는 길손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이 눈물샘의 주인공 황경헌은 나중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니 아마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추자도 어디엔가 살고 있으리라. 이렇듯 오래된 전설과 현재의 삶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 아닌가 싶다.

 

 

세 시간 쯤을 걷고 나니 적당히 땀이 나고 배도 고팠다. 그런데 할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먹으려 하니 밥이 너무 차다. 남편이 포구 근처 동네가게를 찾아 컵라면을 주문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끓여주는 주인아줌마와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자기도 서울사람이란다. 게다가 친정이 휘경동이라는 말에 더욱 관심이 쏠렸다. 내가 휘경초등학교를 다녔고 남편도 그 동네 경희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니 그때부터 그녀는 아예 우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끊임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추자도가 고향인 남편과 서울 생활하다가 오 년 전에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오십 대 초반인 그들 부부, 낚시 배를 가지고 있고 가게까지 있으니 노년에 먹고 사는 것은 물론 정서적인 노후대책까지 문제없어 보였다. 거칠지만 뜨거운 삶을 살아낸 사람들, 민박집 할머니가 그랬고 가겟집 아줌마가 그랬다. 잠시 그들의 여유로운 노후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와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가게 앞 벤치가 아늑한 사랑방 같았다. 여자는 우리의 아득한 기억을 일깨워준 것도 고마운데 일어설 때 문어를 선물로 주었다. 그것도 세 마리씩이나. 돈을 주겠다고 하니 극구 사양하며 다시 추자도에 오면 그땐 꼭 자기 집에 오라면서 명함을 준다. ‘추자도 사람들 진짜 부자인가 보네’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과연 일기예보가 틀리지 않았다. 선착장까지 가려면 십 분 정도는 더 걸어야 하는데 별 수 없다. 산길이라 피할 곳도 없고 그냥 비를 맞고 걷는다. 이것도 변화무쌍한 어촌의 겨울 맛이라 생각하며 걸었다. 오후 네 시 이십 분, 완도로 돌아오는 배를 탔는데 배 안에서 일몰을 구경했다. 일출과 일몰을 하루에 다 보았으니 이날 운이 아주 좋았다.

 

 

완도의 시애틀 호텔에서 하룻밤 더 묵고 이튿날 아침 전복죽 한 그릇 먹고는 서둘러 귀경길에 올랐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차는 막힘없이 달렸다. 만물이 잠드는 겨울, 그러나 봄 색이 완연한 추자도에서 우리는 느림과 고요의 선물을 듬뿍 안고 왔다. 세상의 모든 시계들이 똑딱거리거나 말거나 여린 뿔을 허공에 이리저리 흔들며 나아가는 풀잎 위의 달팽이처럼 올해는 그냥 이렇게 느리게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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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탈행복론

|함수연| 만남 2014. 1. 13. 12:16

아침부터 기분이 엉망이다.

안방 침대를 바꾸느라고 침대 밑에 들어있던 가방과 앨범 등

 잡동사니들이 정리가 안 된 채 방에 나뒹굴고 있고,

전날 딸네 식구가 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고 가는 바람에

평소 쓰지 않던 그릇들이 대거 등장하여 부엌 살림살이도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설상가상, 아침밥을 먹던 남편이 생선찌개에 쑥갓이 안 들어갔다면서

느닷없이 쑥갓 타령을 하는 거였다. ‘아무리 남자지만 이렇게 상황 파악이 안 되나?’

가뜩이나 심란하던 차에 열이 오른 나는

급기야 먹던 밥숟갈을 식탁에 던져놓고 먼저 일어섰다.

 

 

 

 

덕분에(?) 일찌감치 집안일에 돌입, 먼저 분리수거부터 하였다.

그런데 모아둔 신문지와 빈병을 들고 나가다가 아파트 현관 앞에서

그만 소주병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은 산산조각이 났고

내 마음도 마찬가지!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가 청소를 하고

 혹여 작은 조각이라도 남아있을까 싶어 물휴지로 마무리했다.

 

 

평소 분리수거는 남편 담당이었는데 홧김에 안 하던 일을 하려니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 사이 남편과 딸은 출근을 했고 널브러진 집안일을 뒤로 미룬 채

나는 누웠던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왠지 더 이상 무슨 일을 했다가는

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커피 한잔 들고 신문 보는 푸성귀같이 상큼한 아침 시간도 포기했다.

그냥 시간이 좀 지나면 평온이 유지될 거라고 생각했다.

 

 

머리맡 라듸오에서는 올드송이 흘러나왔다.

팻분, 냇킹콜, 패티페이지의 노래로 방금 전까지 아프고 괴로웠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를 받는 듯했다. 꽤 긴 시간을 그렇게 누워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암사동 사는 내 친구였는데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저녁에 남편과 함께 우리 집에 오겠단다.

 다시 집안일을 시작했다.

 

 

전날 딸네가 와서 먹고 남은 음식이 있어 따로 장보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손님이 온다고 하니 갑자기 분주해졌다.

 

 

친구네가 오면서 생선회와 과메기, 막걸리 등을 사가지고 왔다.

거기에다 내가 속성으로 빚은 만두와 메밀묵까지 더하니 근사한 상차림이 되었다.

갑작스런 친구의 방문에, 그것도 내 친구 부부인데 나보다도 남편이 더 좋아했다.

더구나 남편이 좋아하는 생선회까지 사 왔으니...

술잔을 주고받으며 번지는 은은한 웃음 한 자락은 이내 기쁨의 불꽃이 되어

아침에 각진 마음들이 어느 새 눈 녹듯 사라졌다.

불편했던 남편과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해결된 셈이다.

 

 

 

 

긍정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돈이나 일보다

더 중요한 행복의 요소는 끈끈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행복감이라고 했다.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글에서처럼

특별히 꾸미지 않고 입던 옷에 슬리퍼 끌고 찾아갈 수 있는 벗이 가까이 살아서 참 좋다.

 

 

내가 힘들 때마다 지치지 않고 챙겨주는 보배로운 친구,

갈 때 얼린 만두와 시레기 삶은 것을 선물로 싸 주었다.

맛있는 사과를 혼자 먹으면 단순히 사과일 뿐이지만

나누어 먹으면 사과가 사랑으로 변신하듯이 역시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사는 것인가 보다.

 

 

살다보면 비 내리는 아침, 바람 부는 낮, 눈 내리는 저녁이 있다.

그런 아침과 낮과 저녁의 나날이 반복되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이날 나의 하루는 오전 시간은 불행, 저녁 시간은 행복이었다.

그러고 보니 추상명사인 행복과 불행은 쌍둥이처럼 늘 붙어 다니는 것 같다.

 

 

요즘 내가 깨달은 가장 큰 행복은 무탈의 일상,

특별한 일이 없는 하루이다.

건강하게 일어나 나는 아침밥을 짓고 남편과 딸은 출근을 하고...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 선물이라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없는 게 가장 고맙고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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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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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혼식

|함수연| 만남 2013. 12. 11. 12:24

 

 

“오늘 이 순간부터 덕 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이렇게만 생각하면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법륜 스님의 유명한 주례사이다.

정말이지 주례 선생님 말씀처럼만 산다면 무슨 문제가 있으랴마는

이건 어디까지나 주례사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주례사도 점점 듣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에는 주례 없는 결혼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니 ‘주례 공동구매 7만9000원’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물건 공동구매나 식당 할인권 공동구매는 들어봤어도

주례 공동구매는 금시초문이었다.

알고 보니 신랑, 신부가 다른 커플들과 함께

인터넷에서 주례 선생을 7만9000원에 공동구매해서 모시는 거란다.

하긴 주례를 구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헌데 공동구매를 통해 만난 주례선생은 어떤 분들이며

그분들은 어떤 주례사를 하실지 몹시 궁금했다.

사실 나는 주례 없는 결혼식에 반대 입장이었다.

그런 결혼식을 가보니 자유롭기는 하나

왠지 질서가 없는 것 같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부부로서의 일생을 서약하는 자리인 만큼

보다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전통적 예식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내가 아직도 노땅티를 내고 있는 걸까?

 

 

주례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젊은이들의 입장도 나름 타당성은 있었다.

전통적으로 결혼식 주례로 모시는 분들은

대개가 신랑, 신부의 은사님이나 직장 상사 분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제지간이 옛날 같지도 않을뿐더러

주위에 주례를 부탁할 만큼 존경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단다.

 

 

물론 비싼 사례비도 부담스럽지만 결혼 전 부탁하러 가고,

결혼 후 고맙다고 답례 인사까지 가려니

매우 번거로워서 주례를 기피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고 그동안 틀에 박힌 개념의 혼주 위주로 행해졌던 결혼식이 차츰

신랑, 신부가 주인공이 되는 혼사로 바뀌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아, 주례 없이 행해지는 결혼식도 괜찮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건 얼마 전에 다녀온 결혼식 때문이었다.

 

 

예식장은 태평로에 있는 신랑의 회사 강당이었다.

신랑은 회사원이고 신부는 교사라고 했다.

모든 순서는 주례 없이 사회자의 멘트와 신랑의 프리젠테이션으로 진행되었는데

영하의 날씨와는 달리 실내 분위기는 시종 훈훈했다.

 

 

약 한 시간가량 진행된 예식이

나중에는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까지 들 정도로

인상에 남는 결혼식이었다.

처음 출발은 여느 결혼식과 비슷했다.

양가 어머니의 촛불 점화, 신랑신부 입장과 인사,

그리고는 주례사 대신 신랑이 홀로 무대에 섰다.

 

 

 PPT 화면이 펼쳐짐과 동시에 시작된 신랑의 프리젠테이션!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동기부터 시작하여 양쪽 집안의 가계도와

신부의 프로필, 연애시절의 사진 등 잘 편집된 볼거리들을 영상화면으로 보여주면서

 하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공들여 만든 자료 같았다.

 

 

미모의 신부 사진을 곁들여서 그녀의 출신학교, 경력, 현재의 직장 등

화려한 스팩을 쌓은 배우자를 소개한 반면에

본인 것은 너무도 심플하게(?) 단 한 컷으로 마무리.

‘나, 신랑 김우람은 그냥 회사원!’

여기저기서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 한마디에 나는 그가 따뜻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훈남에다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다음은 축가 순서였다.

선생님께 바치는 제자들의 노래 헌정이랄까,

신부가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이 나와서 박진영의 <청혼>을 불렀다.

고등학생들이 대거 등장하여 통일된 복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율동까지 곁들인 축가 시간. 당연히 앙코르가 쏟아졌다.

그런데 이제까지 차분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공연 모드로 바뀌더니

 돌발 상황까지 발생했다.

 

 

신부의 두 살바기 조카가 아장 걸음으로 무대 위에 나타난 것이다.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이 꼬마 아가씨,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뼉을 치면서

그 넓은 무대를 휘젓고 다니더니 하객들에게 박수까지 유도한다.

전혀 의도되지 않은 장면에 식장은 일시에 웃음바다가 되었고

식장 안은 더욱 흥겨워졌는데 아기는 자기도 모르게 음악적 본능이 작동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이모에게 바치는 축하 메시지!

스피치 대신 온몸으로 보여준 비언어적 요소가 이날 양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식이 다 끝나고 피로연장에 인사차 들른 신랑신부에게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와 덕담을 건넸다.

가까이서 보니 신랑과 신부가 참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부부는 3주 연구하고, 3개월 사랑하고, 3년 싸우고, 30년 참고 견디는 것이라 했으니

결혼생활이 그만큼 복잡하고 심란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것이리라.

 

 

김종길 시인은 ‘부부’를 이렇게 말했다.

 

놋쇠든, 사기이든, 오지이든

오십 년이 넘도록 하루같이 함께

붙어 다니느라 비록 때 묻고 이 빠졌을망정

늘 함께 있어야만 제격인

사발과 대접

 

 

이제 부부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탄생된 신랑과 신부에게

 나는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들이 사발과 대접처럼 오십 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오래

불꽃보다 뜨겁고 폭풍우보다 힘차게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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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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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에 문단에 데뷔한 소설가 박완서는 여든에 숨을 거두기까지 쉼 없이 글을 썼다. 그가 77세에 펴낸 <친절한 복희씨>는 노년층 풍속을 세밀하게 그려내 우리나라 실버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최근에 나온 그의 유고집 <노란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해 전 세상을 뜬 작가가 생전에 살았던 경기도 구리의 집은 아치울 노란 집으로 불렸다. 2000년대 초반 그 집에서 쓴 미발표 소설과 산문을 박완서 씨의 딸이 엮어서 만든 책 제목이 바로 <노란 집>이다.

 

 

총 여섯 마당으로 나누어진 글 중에서 첫 장 ‘그들만의 사랑법’은 짧은 소설 형식으로 주로 영감님과 마나님으로 표현되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어쩌면 누추해 보일 수도 있는 노인의 삶을 때로는 쾌활하게 때로는 슬픔과 유머가 적당히 가미된 매우 오묘한 풍경을 보여주어 참 재미있게 읽었다. ‘속삭임’ ‘토라짐’ ‘동부인’ ‘나의 보배덩어리 시절’ ‘휘모리장단’ 등과 같이 우선 글 제목이 정겹고 친근했다.

 

 

‘토라짐’에서는 앙상한 뼈다귀로 남은 굴비 삽화가 등장한다. 점심상에 알배기 굴비를 올릴 때까지만 해도 마나님은 행복감으로 마음이 그들먹했다. 남편과 겸상을 해서 막 수저를 들려는데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런데 잠깐의 전화를 받고 돌아와 보니 며느리가 가져온, 한 마리에 오만 원도 넘는 영광굴비가 뼈만 남은 채 사라져버린 것이다. 영감님이 어찌나 알뜰하게 발라 먹었는지, 머리와 꼬리를 잇는 등뼈의 가시가 빗으로 써먹어도 좋을 정도다.

 

 

앗, 마나님의 경악! “영감 입은 입이고 내 입은 주둥이요?” 말하고 싶지만 평생 제 입 밖에 모르는 영감과 살아왔거늘 새삼 웬 지옥 불같은 증오란 말인가? 하긴 저 영감이 무슨 잘못이람. 아들을 저따위로 키운 시어머니 탓을 하다가 난 또 뭔가. 내가 저 영감을 저렇게 길들인 걸. 자신을 다독거려도 보지만 그래봤댔자 남는 건 허망함밖에 없다. 한바탕 허망감이 휩쓸고 지나가니 다시는 열리지 않을 빗장처럼 마음이 무겁게 닫힌다. 그러나 영감님은 마나님이 왜 토라졌는지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순박한 우리네 남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렇듯 작가는 노년기 부부에 대한 넉살과 익살, 소시민적 행복의 허위의식을 은근슬쩍 꼬집는다. 읽다보면 우리 세대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랄까, 누더기 옷에서 이 잡던 때를 그리워하는 궁상스러운 소리를 해대도 “그럼, 그렇고말고!” 하며 저절로 맞장구를 치게 된다.

 

 

우리는 늦도록 해로하는 부부를 보면 서로 등 긁어줄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좋으냐고 부러워들 한다. 소설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손자들한테 선물 받은 효자손이 집안 여기저기 굴러다니건만 영감님은 한사코 마누라 손만 찾는다. 차가운 효자손 대신 적당한 체온으로, 적당한 거칠음으로, 가려운 곳을 적당히 알아서 긁어주는 마누라 손은 영감님의 유일한 사치다. 마치 손길을 타는 어린애 같다. 이제 영감님의 등은 청년의 등도 아니고 장년의 등도 아니다. 삭정이처럼 쇠퇴해가는 노년의 몸이지만 마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온몸에 생기가 돋고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하지만 마나님은 그 반대다. 한때 그녀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 떡판처럼 든든하고 기름진 등판은 어디가고 영감님 등을 긁어주면 어쩔 수 없이 만져지는 굽은 등뼈 마디도 섬뜩하거니와 치마폭 하나 가득 떨어지는 허연 비듬과 늙은이의 강한 체취가 불러일으키는 혐오스러운 이물감 때문이다. 이러면 죄 받지 싶은 심각한 죄의식에 사로잡혔다가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정직한 내면의 소리 같기도 하다.

 

 

문학작품 속에서만이 아니라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년기 삶에 대해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회자 되고 있다. 과거 노인하면 나이가 든 늙은 사람을 말했다. 나이로는 보통 65세 이상을 노인이라 칭한다. 그러나 미국 의학협회에서는 노인의 정의를 달리한다. 자신을 늙었고, 배울 만큼 배웠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고 느낄 때라고 한다. ‘이 나이에 그깟 일은 뭐해.’라고 생각하거나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젊은이들의 활동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때, 현재보다는 좋았던 과거 시절을 그리워할 때 노인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요즘 노인은 예전의 노인이 아니다. 91세의 할아버지와 74세의 할머니가 식스팩을 자랑하며 세계 최고령 보디빌더로 기네스북에 오르는 세상이다. 그런가하면 올해 타계한 일본의 백한 살 할머니 시인의 스토리도 주목을 끈다. 아흔아홉에 낸 첫 시집 <약해지지 마>가 150만부나 팔리면서 실버 세대 창작 붐을 일으켰었다. 지금 일본에서는 환갑 넘은 신인 작가와 시인들이 줄줄이 등단하고 있다. 우리 신춘문예에서도 50.60대 당선자가 낯설지 않다.

 

 

노인 문제 전문가들은 이제 은퇴 후 8만 시간을 다시 짜야 한다고 주장한다. 8만 시간은 60세 은퇴자가 80세까지 20년간 수면, 식사 등을 빼고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사실 요즘 은퇴자들은 100세까지 살 각오(?)를 해야 하니 20년을 더한다면 무려 16만 시간이 큰 강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과연 나도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행복한 노년을 누릴 수 있을까...

 

 

최근 서울시가 ‘노인’ 명칭을 ‘어르신’으로 바꿔 사용하기로 했단다. 노인들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첫 조치라고 한다. 명칭 하나로 대접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노인 보다 어르신 하면 왠지 지혜와 연륜을 가진 어른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아서 좋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주인공인 늙은 어부를 이렇게 묘사했다. ‘머리가 허옇고 수척하지만 두 눈만큼은 바다 빛깔이고 쾌활함과 불굴의 의지로 불탄다.’ 머리카락은 은빛이지만 마음과 눈빛은 언제나 청춘인 어르신들, 그들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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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가

|함수연| 만남 2013. 10. 14. 12:27

오랜만에 광화문 거리를 찾았다.

거기에는 아직도 내 청춘이 머물러 있어

언제라도 뜨거운 손을 내밀 것만 같고

왠지 모를 아련한 설움 같은 것도 있었다.

 

 

학창시절, 나는 광화문 근처에 있는 학원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했고

20대 초반에는 YMCA 사진반 동아리 친구들과 어울려

무교동과 청진동을 어지간히 들락거렸다.

 

 

또한 연애시절에는 남편의 직장이 안국동에 있어

약속장소는 대개가 광화문 근처 그 어디쯤이었다.

그러니 광화문은 십 대부터 내 온갖 추억이 서린 다정한 거리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교보문고 빌딩에 걸린 ‘광화문 글판’이었다.

 

 ‘또로 또로 또로 / 책 속에 귀뚜라미 들었다 / 나는 눈을 감고 /

귀뚜라미 소리만 듣는다’ (김영일의 동시 ‘귀뚜라미 우는 밤’)

 

 

 

정말 하늘 맑은 가을이구나...

이 날 글판에 걸린 ‘귀뚜라미 우는 밤’은 독서의 달에 딱 맞는 감성적 시구였다.

 

달 밝은 밤, 멀리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서정적이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준다.

그래서 귀뚜라미에게 가을의 전령사라는 말을 붙였나 보다.

 

 

서울 중심가의 계절 변화는 광화문 글판이 옷을 갈아입으면서

시작된다고 어느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1991년 당시 교보생명 창업주인 신용호 회장이 광화문 네거리에 사옥을 지으면서

 “기업 홍보는 생각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자”고 제안하여

시를 내걸기 시작했다고 한다.

 

 

 

 

벌써 20년이 넘었다.

이제는 계절과 호흡하는 당당한 문화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아

 광화문을 찾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과 여유를 선사한다.

어느 해인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문장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때맞춰 광화문 광장에는 벼룩시장도 열렸다.

이순신, 세종대왕 동상을 중심으로

 길게 타원형의 시장 거리가 형성되었다.

중고 의류와 가방은 물론 아기자기한 공방을 옮겨놓은 듯

크고 작은 수공예품들이 아주 많았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들이 어우러져 있는 풍경은

시골의 오일장보다 훨씬 더 소박했다.

나는 혼자였고 특별히 바쁜 일도 없었던 터라

보물찾기 하듯 찬찬히 둘러보았다.

 

 

천천히 걸을 때에만 비로소 보이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도 이채로웠다.

도심 속 타임머신 여행이랄까.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햇볕은 여전히 따가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긴 소매 차림이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더위도 피할 겸 눈요기를 멈추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아, 도심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셔본 게 얼마만인가.

잠시 그윽한 커피 향과 낭만적 풍미에 취해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쿵, 쿵, 쿵!” 가을바람을 깨우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매주 일요일 오후 네 시,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무대에서

 펼쳐지는 문화마당 시간이었다.

 

 

북, 장구, 꽹과리, 기타, 드럼 등 우리 악기에 서양 악기를 더해

구성된 퓨전타악그룹의 사내 네 명이 신들린 듯 흥겨운 우리 가락을 연주한다.

우리 전통악기는 대개가 빠른 것에서 느린 것으로 옮겨가지만

이들의 공연은 계속 빠름-빠름-빠름으로만 이어졌다.

 

 

그러니 신날 수밖에. 외국인들도 더러 있었다.

내 앞줄에 앉았던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들은 아예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까지 춘다.

시간이 흐를수록 땀에 흠뻑 젖은 연주자들과 돌계단을 꽉 채운 관객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신명의 카타르시스를 발산한다.

이 날 공연 중 유일한 여성 멤버가 들려준 노래는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애간장을 녹이는 목청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가을바람에 실려 멀리멀리 퍼져갔다.

 

 

공연이 끝나자 무대 앞에는 음료수와 도넛 같은 먹을거리가 놓여졌다.

공짜 구경에 대한 답례치고는 약소했지만 이 또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한 시간의 공연이 끝나고 나니 거의 저녁 시간,

벼룩시장도 진작에 파장을 했으니 그 넓은 광장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거기 모여든 가장(家長)들은 이제 자기 식솔들을 거느리고 어디론가 저녁을 먹으러 갔겠지...

 

 

집으로 가는 길, 그런데 지하철 5호선 광화문 역 바로 앞에

 ‘가을’이라는 카페 간판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2층 계단을 올라갔으나 정기휴일이라는 안내문만 얌전히 붙어있었다.

 

 

겉모습은 변했어도 세종문화회관 뒤쪽에는

아직 칠공팔공 세대들의 정서가 남아있는 술집들이 더러 있었다.

종로빈대떡집과 사계절을 각각 상호로 내걸고 있는 카페들.

 

 

대표적인 곳이 ‘가을’ 카페였는데

그 곳은 1990년 대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사무실이

광화문 현대해상빌딩에 세 들어있을 때 우리가 자주 들렀던 술집이었다.

 

 

술을 마시다가 마음이 동하면 주인에게 기타를 청해 받아

이문세와 김광석을 노래하는 직장인들을 볼 수 있는 곳.

우리 동료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기타를 잘 치고 재즈를 즐겼던 그녀, 당시 30대였던 그 도 어느덧

50줄에 들어선 회귀한 청춘이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나흘 후, 고대 안암병원으로 동료 선생님 병문안 갔다가

다시 ‘가을’ 카페를 찾았다.

이 선생, 송 선생이 함께 했다.

 

 

초저녁인데도 실내는 이미 만원사례!

손님들은 우리처럼 거의가 인생의 가을을 맞은 사람들이다.

자신의 나이만큼 자신의 때깔로 단풍들거나 들고 있는 사람들...

 

 

첫 스테이지는 무명의 여자 가수 등장.

첫 노래는 김종찬의 ‘당신도 울고 있네요’

다음은 장현의 ‘미련’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명곡(?)이 이어졌다.

모두가 우리 세대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들이다.

 

 

정겨운 옛 노래를 들으니 아직도 마음은 청춘인데

몸만 저만치 가고 있는 느낌이다.

벌써 여러 명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일어나

적당한 몸짓으로 테이블 양 옆을 빙글빙글 휘젓는다.

 

 

그들의 유연한 몸짓에 자리에 앉은 이들의 박수 세례가 윤활유처럼 쏟아진다.

거리낌 없는 저 자유!

가슴이 뜨거워진다. 옆자리의 송 선생은 사진을 찍어 누군가에게 카톡으로 전송한다.

‘흥겹다’ ‘즐겁다’라는 단어로는 모자랄 이 중년 남녀들의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추억? 향수? 또 다른 목마름?

 

 

 

서른 즈음, 두려울 게 없었고 청춘은 마냥 머무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이룰 것 같았다.

젊음이 떠나간 지금, 그럼에도 광화문은

내 무수한 과거를 알고 있기에 김광석의 노래처럼

‘또 하루 멀어져 가도’ 그 거리에 서면 나는 여전히 설렌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니고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니다.

세월이 저 혼자 그렇게 훌쩍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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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공사

|함수연| 만남 2013. 9. 6. 10:50

‘이 곳에서는 성행위를 할 수 없음’

 

 

볕 좋은 4월의 어느 날,

중랑구의 모 초등학교에서 학부모 특강을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나는 깜짝 놀랐다.

 

 

 

 굴다리 옆 회색 담벼락에다 누군가

 붉은 색 글씨로 그렇게 써 놓았던 것이다.

커다란 가위 그림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잠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누가 이런 데서 성행위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니

‘성행위’가 아니라 ‘상행위’였던 것을

누가 바깥 점을 지우고 대신 안쪽에다 점을 찍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행위가 성행위로 바뀌고

점 하나에 뜻이 아주 이상야릇하게 변질되고 만 것이다.

 

 

그렇겠지, 하면서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흔히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사물을 보고 표현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따위 짓을 했을까?

 

 

 만일 젊은 여자들과 학생들이 본다면 얼굴 붉힐 일이며

 남자들도 그 글을 읽고 컴컴한 굴다리를 통과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상에 젖게 되거나

또한 음흉한 마음을 품게 되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글쎄, 내가 너무 비약했나?

아무튼 한시 바삐 본래대로 고쳐 놓아야 할 것이다.

 

 

또 한번은 양평대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경험했던 일이다.

모처럼 친구들과 용문산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 양평에서 팔당 쪽으로 넘어오는 왕복 2차선 길은 만성정체구역인지라

그 날도 우리는 차가 막힐 거라는 생각에 용문사 절은 구경도 못한 채

근처 식당에서 점심만 먹고는 서둘러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헛수고였다.

 

 

서울로 들어오는 차들은 양수리 근처에서부터

꼼짝을 못하고 긴 행렬을 이루었으니...

나는 거의 체념한 상태로 일찍 가긴 다 글렀구나.

설마 오늘 안으로야 들어가겠지 하는 느긋한 심정으로

차창 밖을 두리번거리는데 범상치 않은 글이 내 눈에 들어왔다.

 

 

공사 중인 시멘트 다리 맨 꼭대기에 ‘혼이 담긴 시’라고 내용이 낯설긴 했으나

글씨만큼은 아주 또렷한, 이상한 표어 하나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밑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시공사 흥화 건설’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 문예회관 공사도 아니고 다리 만드는데

무슨 놈의 혼이 담긴 시?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다리 공사와 시(詩)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함께 타고 있던 세 명의 친구들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들 역시 이상하다는 반응뿐이었다.

답답했다.

당장 내려 현장 소장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공사 현장에 혼이 담긴 시가 왜 끼어들게 되었을까?

공사 책임자의 특별한 철학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시를 읊는 마음으로 평화와 여유를 가지고 일을 하라는 뜻일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고 집에 와서도 그 의문은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로부터 서너 달 후,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 시인

최하림 선생 댁을 다녀오면서 그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것은 ‘혼이 담긴 시’가 아니라 ‘영혼이 담긴 시공’이었는데

‘영’자와 ‘공’자가 떨어져 나가서 그리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뜻이 통하는 제대로 된 글귀를 보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만약 이날도 ‘혼이 담긴 시’가 그대로 붙어있었다면

나는 또 여러 날 머리 나쁜 나를 스스로 들볶았을 테고

급기야 건설회사에 전화로라도 문의했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나보고 걱정도 팔자란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칠 일이지 괜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나.

그러나 어쩌랴,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길을 가다보면

맞춤법 틀린 간판은 왜 그리 많은지...

 

 

언젠가 식구들과 양평 해장국집을 갔다.

메뉴판을 뒤적이다가

‘24시간 정성 드려 고아 만든 새로운 보양식 출시’라는

글을 보는 순간 나는 또 직업병(?)이 발동하고 말았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주인을 불러

‘정성 드려’가 아니라 ‘정성 들여’가 맞는 말이니 다시 쓸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혹시 언짢아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싹싹한 여주인은 당장 고치겠다며 오히려 고마워했다.

 

 

어디 그뿐인가.

노래방에 ‘래’자가 떨어져나가

‘노-방‘이 된 것처럼 글자 한 자씩 떨어져나간 간판도 자주 보인다.

따라서 거리에는 글씨 공사를 해야 할 곳이 참 많은 것 같다.

반면에 서울시에서는 해마다 아름다운 간판 공모전을 한다는데

그래서인지 최근의 간판들은 예전에 비해 글씨가 작고

색깔이나 디자인에서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섬마을 밀밭집’(해물 칼국수집) ‘첫날밤 분홍 이불’(이불집)

‘낮에는 해처럼 밤에는 달처럼’(안경집) ‘오, 나그네여 쉬어 가게나’(전통찻집).

이런 감성적인 간판을 달고 있는 상점들은 왠지

호감이 가고 한번쯤 들러보고 싶은 곳이다.

 

 

일찍이 언어는 ‘사상의 옷’ ‘존재의 숲’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에 우리가 생각 없이 함부로 쓰는 말과 글 때문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고,

이 사회가 더 정신없고 혼탁해진다면

그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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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여행

|함수연| 만남 2013. 7. 23. 17:15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다.

하루하루 일상을 살다보면 불현듯 끈끈한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되는데

이 시에서처럼 마음이 허할 때나 삶이 허기질 때,

나도 문득문득 국수가 생각난다.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국수가 더욱 땡긴다.

우리 집 식구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매콤달콤한 비빔국수인데

여름에는 콩국수도 자주 해먹는다.

예전에는 콩을 삶아 믹서기에 갈고 체에 내리는 일이 여간 번거롭지 않았는데

지금은 여러 곳에서 콩 국물을 만들어서 파니까 언제라도 손쉽게 해 먹을 수가 있다.

 

올 봄 남편과 둘이 3박4일 일정으로 남도 기행을 떠났었다.

사실 처음부터 국수만 먹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찌하다보니 진짜 국수여행이 되고 말았다.

 

맨 처음 들른 곳은 오천 항에 있는 바지락 칼국수 집.

세트 메뉴를 시키니 6000원에 바지락 칼국수와 비빔칼국수가 나란히 등장하는데

양이 꽤나 푸짐했다.

가격 대비 맛도 괜찮았다.

게다가 무한리필을 해준다니 식당 안은 그야말로 문전성시!

종업원들은 뛰다시피 하며 음식을 날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호로록 호로록 얼른 먹고

기다리는 다음 손님들을 위해 우리는 재빨리 일어섰다.

 

식사를 마쳤으면 얼른 일어나 가주는 것,

프로페셔널한 손님의 기본 아니겠는가.

들어갈 때 입구에 신발이 마구 뒤엉켜 있어서 혹시나 신발이 바뀌지는 않을까

은근 걱정을 했으나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은 전남 담양의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걷고 나서

그 유명한 ‘담양 국수거리’로 갔다.

50년 전 죽세공품 시장에서 국수를 팔던 진우네 집을 시작으로

관방제림을 따라 열 곳이 넘는 국숫집이 모여 있었다.

이곳 역시 원조 격인 진우네 집만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북적거렸고

다른 집들은 매우 한산했다.

 

진우 엄마인지 할머니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아주머니가

줄서기를 잘 하라며 손님들에게 엄포를 놓는다.

그 자신만만함이 약간 거북스럽기도 했지만 우리 역시 군소리 없이 차례를 기다렸다.

 

이것도 원조 프리미엄인가?

명성에 비해서 맛은 그저 그랬다.

특이한 건 잔치국수를 소면이 아닌 중면으로 삶아서 양은그릇에 담아주었다.

멸치 국수에 삶은 달걀을 곁들여서 먹는 게 특이했다.

삶은 달걀은 천원에 3개, 국수 값까지 합쳐도 한 사람 당 오천 원이면 충분했다.

 

며칠 전 KBS의 인기프로 ‘한국인의 밥상’에서 전국의 소문난 국숫집을 찾아다녔는데

이 담양 국수거리도 소개가 되었다.

최불암 씨가 우리가 갔던 바로 그 진우네 식당에서

손님들과 어울려 국수를 먹는 장면이 나왔다.

 

어찌나 반가운지... 국수는 잘난 음식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박하다.

각자 양푼 하나씩 들고 가게 앞 평상에 둘러앉아

국수를 먹으니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금세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었다.

그러니 주머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국수는 위안의 음식이자 교감의 음식이다.

 

어쩌면 국수 국물의 멸치 냄새는 어린 시절 고향의 냄새와도 같다.

따라서 국수를 먹는 것은 고향에 가는 것,

 옛 고향집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국수로 점심을 해결했으니 저녁은 조금 거하게 먹고 싶었다.

담양의 명물인 떡갈비를 먹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이 길을 잘못 안내하는 바람에 전혀 다른 곳을 찾아갔다.

 

차를 돌려 다시 시도했지만 어디 숨었는지

우리가 가려는 식당은 좀체 안 나타났다.

나는 그냥 아무거나 먹자 했지만 남편은 기필코 떡갈비를 먹겠단다.

왔다갔다 그러기를 몇 차례, 이렇게 거리에서 헤매다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코끝이 매운 날씨였다.

그 무엇이라도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일단 숙소로 차를 돌렸다.

모텔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바로 앞에 ‘봉순 네 팥칼국수집’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날은 어둡고 배는 고프고, 빨리 허기를 해결해야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입구에는 <100% 국산 팥이 아니면 바로 환불해드리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써져 있었다.

국산 팥으로 만들었다니 왠지 믿음이 갔다.

먹어보니 새알이 듬뿍 들어간 게 팥 국물이 아주 진했다.

내 친구 이름과 같은 봉순이라는 상호도 정겨웠다.

 

서울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은 전북 임실에 있는 ‘행운집’을 찾았다.

이 집은 이번 여행에서 꼭 들르기로 마음먹었던 유일한 곳이었다.

강진읍에서도 18km 떨어진 강진 시장 내에 위치한 허름한 국숫집.

조선일보 오태진 기자가 쓴 칼럼을 보면

행운집에서 국수를 시키면 머리고기 한 접시를 덤으로 준다고 했다.

국수만 파는 집에서 웬 머리 고기?

나는 그 사연이 궁금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신문 보고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예순아홉의 주인할머니는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끼니때가 지나서인지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예전에 술 찾는 장사꾼이 많아서 공짜 술안주로 돼지 머리고기를 냈던 것이데,

국수 손님들이 우리는 왜 안주냐고 해서 국수 찬이 돼버렸다고 한다.

 

4000원짜리 국수 두 그릇을 주문한 우리에게도

역시 삶은 머리고기가 제공 되었으나 기름기가 너무 많아서 먹기가 거북했다.

여러 점을 남겼다.

할머니는 이 아까운 것을 왜 남겼냐며 당신이 맛있게 다 드셨다.

약간 미안했다.

 

곧 이어 김치를 송송 썰어 고명으로 얹은 멸치국수가 양은그릇에 담겨 나왔다.

국물 빛이 보기에는 맹탕 같았는데 한 술 떠보니 뜻밖에도 진국이었다.

면발은 굵으면서도 부드럽고 탱탱한 탄력이 느껴졌다.

 

우리 외에는 손님이 없던 터라 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기네 국수는 백양국수라는 읍내 가내공장에서 받아다 쓰는

자연 건조 국수여서 다른 국숫집과는 면발부터 다르단다.

그리고 김치를 비롯한 채소들도 직접 밭을 일궈 키운 것들로

손님상에 낸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30년 국수 할머니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증명이라도 하듯 이 행운집 사연이 소개된 조선일보 기사가

유리 액자에 담겨져 한쪽 벽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내가 스크랩해서 가져 간 바로 그 신문기사였다.

 

덜거덕거리는 기계에서 뽑아낸 면을 천 말리듯

 대나무에 죽 걸어놓은 하얀 국수들.

우리 어렸을 적 동네에서 흔히 보던 국수 가게 풍경이었다.

공장 국수가 아닌 옛날 수제국수를 삶아서 주는 이 행운집 국수는

추억의 국수로 냄새, 빛깔, 연륜, 기대, 인생관, 기타 등등 수많은 함수를

직감적으로 풀어낸 맛의 결정체였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혹시 마른 국수 한 다발 팔 수 없냐고,

원래는 안 파는데 7000원 주고 하나 가져가란다.

야호, 행운이다!

 

삼일 간의 여정에서 국수만 네 끼,

목포 항 편의점에서 사다먹은 라면까지 합치면 도합 다섯 끼다.

하여 이번 남도 기행이 어쩌다가 국수 여행이 되어버렸지만

아무래도 국수의 본고장은 강원도가 아니겠는가.

춘천 막국수를 비롯해서 횡계의 초계국수, 정선의 콧등치기국수,

원통의 올갱이국수 속초의 물회국수까지.

 

그러고 보니 내가 진짜 국수 광(狂)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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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머니

|함수연| 만남 2013. 6. 24. 10:13

 

미국에 사시던 친정어머니가

7년 만에 돌아오셨다.

 90세의 어머니는 너무나 쇠잔한 몸이었기에

언니와 형부가 LA까지 가서 모시고 왔다.

 

 

칠남매가 차례로 생명을 싹틔우고 깃들었던 몸,

구십여 년의 고단한 행보.

어딘가 알 수 없지만,

떠나온 곳으로부터 되돌아가기 위해

어머니는 아주 조그마한 몸으로 고향땅에 오신 것이다.

 

 

 

 

불과 몇 해 전 내가 동생네 가서 만났을 때만 해도

어머니는 건강하셨다.

그때도 유월이었다.

 미국의 찬란한 아침 햇살 아래 싱그런 유월의 바람과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는 동생네 집 그 초록빛 잔디밭,

여전히 빨간 립스틱과 메니큐어를 바른 팔순의 코리언 할머니는

셋째딸인 나를 보고서 반갑게 소리쳤다.

“어서 오너라!”

 

 

힘찬 목소리와 더불어 더 이상 희어질 여분도 없는

어머니의 은빛머리는 기다림의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미국에 머문 보름동안 어머니는

외식할 때 빼고는 한국에서보다 더 한국적인 음식으로

 매끼 식사를 차려내셨다.

 

 

하지만 무정한 세월 앞에 이제는 음식도 제대로 못 드시고

날씨가 조금만 변덕을 부려도 겁을 내시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은 해드릴 게 별로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게다가 오빠 언니들은 이미 칠십 세가 넘었으니

그들 또한 어머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노인네가 아니든가...

고령화 사회가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 딸 중에서도 나는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

외모와 식성도 그렇지만 전화 목소리가 똑같아서

예전에 한 집에 살 때 벌어진 에피소드가 참 많다.

특히 우리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 어머니가 받으면

 십중팔구는 내가 장난치는 줄 안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좀처럼 믿지를 않았다.

 

 

또 남들은 좋게 말해서 겸손하다고 하지만

남에게 싫은 소리 절대 못하고

소심하고 숫기 없는 행동거지도 많이 비슷했다.

젊었을 적엔 엄마를 쏙 빼닮은 이런 성격이

스스로 생각해도 답답할 때가 많았다.

 

 

차라리 화통하고 뒤끝 없는 아버지를 닮았으면 어땠을까?

하면서 이 또한 나이가 들면 조금씩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순이 넘은 지금에 와서도 별반 달라진 게 없는 걸 보면

사람의 성정이란 게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크게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칠순 팔순이 되어도 나의 기원(起源)인

현재 우리 어머니의 모습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런데 정작 어머니를 꼭 닮았으면 좋았을

손재주가 내겐 없으니 뭔가 불공평한 것 같다.

 

 

어머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 뜨개질 하는 모습이다.

내가 꼬맹이 때부터 시집 올 때까지

이십여 년 넘게 봐온 너무도 익숙한 광경.

안방에는 알록달록한 털 뭉치가 굴러다녔고

어머니 손에는 항상 털실과 코바늘이 들려 있었다.

가끔씩은 나와 동생을 앉혀놓고

양손에 털실을 걸게 하고는 풀었다 감았다를 반복하셨다.

 

 

또한 마루 난로 위에

올려진 주전자에서는 언제나 물이 끓었고

그 주전자에서 나온 하얀 김에 털실을 쐬면 주름살이 다 펴졌다.

 

 

그 실이 엄마의 손을 거치면 알록달록 조끼가 되고

스웨터가 되고 방석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커다란 이불보까지 탄생되었다.

그래서 넷이나 되는 딸들 시집 갈 때 혼수품목으로

 꼭 엄마표 이불과 방석이 빠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교했다.

 

 

결혼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집 장롱 속에 고이 모셔져 있는

털 이불을 보면 온천수처럼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진다.

당신이 평소 자식들에게

“늙으면 썩어질 몸뚱이, 아끼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여라!”라고

강조했듯이 어머니는 잠시도 가만있지를 않으셨다.

 

 

미국에 계실 때도 화초와 텃밭을 열심히 가꾸어

아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일주일에 두 번은

교회 권사님들과 함께 만두 만들기 봉사를 하셨다.

 

 

어디 만두 만드는 일이 보통 일인가,

한국 주부들도 마트에서 사다 먹는 그 손 많이 가는 음식을

노인네들이 직접 빚어 교회 기금을 마련한다는데

그 중심인물은 언제나 우리 어머니셨다.

 

 

이렇듯 부지런하고 에너지 넘치던 그 분은

이제 워커에 의존하지 않고는 걸을 기력조차도 없으시다.

아마 날이 갈수록 엄마의 서있는 시간은 점점 더 짧아지리라.

 

 

지난주, 싱가포르에 사는 막내딸도 엄마를 보러 한국에 왔다.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엄마와 네 딸이 함께 밥을 먹었다.

같은 곳에 살지 않는 엄마와 딸들,

따뜻한 밥에서 풍겨 나오는 기분 좋은 냄새,

반찬을 놓아주는 엄마의 손과 가끔씩 터져 나오는 잔소리.

아, 얼마나 그리웠던가...

 

 

영양가 없는 수다가 밤새 이어졌고

이날 우리 딸들은 거의 고혈압 수준으로 흥분하여

“오우, 우리 엄마 열라 멋져!”를 외쳐댔다.

싫지 않은 듯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순진한 웃음이 꽃처럼 피어났다.

 오랜만에 보는 웃음 띤 어머니 얼굴...

 

 

내가 어머니 하면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다.

 정채봉의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란 시다.

젖먹이 때 엄마를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시인이

엄마를 그리워하며 쓴 시라고 했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단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입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

한 명의 아이를 온 열정을 바쳐

평생 사랑하고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오직 부모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www.kace.or.kr

KACE 부모리더십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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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는

책제목만큼이나 매우 강렬한 인상을 던져준 책이었다.

책이 나온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며칠 전 신문을 보니 연예계의 독서광이라고 소문난

탤런트 차인표 씨가 최근에 읽고 추천하고 싶은 책 목록 중에

이 책도 들어 있었다.

 

책의 작가는 미국의 존 라빈스라는 사람으로

그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상속을 거부하고

생태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더욱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제까지 나는 가급적 인스턴트식품을 멀리하고

자연식 위주의 식단을 꾸리려고 애썼고

그래서 채소들도 직접 길러먹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책을 다 읽고 나니 우리의 식생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름 문제점이 많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건강을 위해 자주 먹었고

자연식품이라 여겼던 달걀과 우유들이

실은 항생제와 방부제 덩어리라는 것.

그리고 닭 소 돼지들이 사육되어지는 과정이

너무나 야만적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을 접한 후 한동안은 도저히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가축들이 인간을 위해 마지막 제물로 바쳐지는 그 순간

그것들이 도살당해서 우리 몸속으로 들어올 때,

이 불쌍한 동물들의 살과 알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축들이 사육되어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질병, 비참함, 공포, 분노들이

몸 속 켜켜이 쌓였다가

그 축적된 것들이 식탁으로 고스란히 옮겨져

고기와 함께 모두 먹게 된다니

가히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맛있게 고기를 먹을 때

가축들이 느꼈던 한과 분노까지 함께 씹다니……

또한 ‘유기적’ ‘자연적’ ‘친환경적’라는 상표가 붙은 품목들도

매우 신중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런 말들은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일 때가 많았고

느슨한 의미로도 해석될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규제되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사실을 알고 나니

육식 섭취를 최소한으로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저자는 이런 제품들을 사먹지 않더라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단백질과 그 외의 영양소들은

얼마든지 다른 음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플라톤과 톨스토이, 간디 같은

고매한 인물들은 일찍부터 육식을 거부해 왔다는 사실을

그는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채식 위주의 식단을 고집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나의 정신세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바깥일을 하면서 외식의 기회가 점점 늘어나는

사회 구조상 육식을 안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비록 현실적인 상황은 그렇다 하더라도

좀 더 자연인에 가까운 삶에 다가가려면

음식부터 다스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깨끗한 음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하고

기름지고 화려한 음식이 아니라 두세 가지의 반찬으로도

정갈하게 차려서 정결한 마음으로 하늘을 떠올리듯 숟가락을 든다면...

 

정말로 나이를 먹으니

이젠 진수성찬을 마주 하게 되면 걱정부터 앞선다.

과식할 확률이 높으며

먹고 남은 음식물 쓰레기 문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사람이 사는데 먹는 즐거움보다 더 큰 게 어디 있냐고.

 

인간의 기본 생활양식인 의식주 중에서도

사실 먹는 행위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순위에 속한다.

그것은 생존과 직결되어서

예전엔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요즘엔 어떡하면 좀더 적게 먹고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를

모든 사람들이 고민한다.

 

그래서 방송에서도

‘잘 먹고 잘 사는 법’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프로그램이나

건강을 주제로 한 프로의 시청률이 매우 높은 것 같다.

 

나도 한때는 남편을 따라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들을

거리를 마다 않고 찾아다니는 것이 취미였으며

유명 음식점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였다.

 

지금도 가끔씩 맛집 소개를 해달라는 전화를 받곤 한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농장에서 자급자족한 먹을거리로

소박하게 차려먹는 집 밥이

값비싼 식당의 산해진미보다 더 맛있다.

 

위장과 환경에 부담을 덜 주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없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현대인의 가장 무서운 질병인

암도 음식으로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김상원의 <천연 산물의 위력>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암은 바이러스다. 박테리아에 의해 감염되는 것이 아니다.

 음식의 종류에 따라 과잉섭취와 부족 현상이 심화될 경우,

 영향의 불균형에서 세포가 변질되고 정신적으로 원망과 불안

 그리고 심한 스트레스에 의해서 임파구가 본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즉 자생력이 최악의 상태로 저하되었을 때 발병하게 되는 것이다.’

 

세월 따라 모든 것이 변하듯 입맛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이 책은 우리의 일상적인 식생활이 건강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또한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 왜 나쁜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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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자존감 낮았던 때가 초등학교 시절이 아닌가 싶다.

호적이 잘 못 되는 바람에 한 학기를 늦게 입학했고

집에는 부모님이 안 계셨으니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나는 외톨이 신세였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에 와서 낮잠을 자다 깼는데

사방이 뿌연 게 꼭 아침 같았다.

얼른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당시에는 2부제, 3부제 수업을 했던 터라

학교는 오후 늦게까지 학생들로 북적였다.

 

 

정신없이 뛰어가 우리 반 교실로 들어갔는데

내 자리에는 딴 아이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선생님도 반 친구들도

전혀 익숙한 얼굴들이 아니었다.

 

 

그때의 황당함이란!

나는 울면서 돌아왔고 오는 길에 위로라도 받을까 싶어

가게에 들렀는데 엄마는 위로는커녕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사냐며 혼쭐을 내셨다.

그래서 더욱 서럽게 울었던 기억.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치매감에 빠져 있던 그때의 그 장면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한편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집에는 할머니와 일하는 언니가 있었는데도

하루 두 번씩이나 학교에 가는 나를

왜 붙잡지 않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실수투성이에다 공부에 흥미도 없으니

학교생활이 자연히 싫어질 수밖에.

요즘 말로 하면 나는 학습지진아내지는

학습부적응아였다.

하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한참 뒤처지는 나를

담임선생님들은 나름 귀여워해주셨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시험지나 문구류를

우리 지물포에서 죄다 갖다 썼고

아마도 사장인 아버지는 돈을 안 받거나

무진장 싸게 공급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긴 하지만...

당시 아버지는 청량리 전차 종점 부근에서

지물포와 운수업을 동시에 운영하고 계셨다.

게다가 전교 1.2등을 다투었던

언니 오빠들이 다 우리 학교 출신이 아니던가.

 

 

형제들이 많다보니 우리 집은 날마다 전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내가 유치원 다닐 때

제일 맏이인 큰오빠는 대학원생이었으니

일곱 형제가 전부 학생인 때가 있었다.

 

 

매일 아침, 먹는 일에서부터 차비며

준비물 살 돈을 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일찍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을 주셨다.

나이에 따라 차등을 두었는데 초등학생인

나는 1000원쯤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 돈의 개념을 몰랐고 돈 쓸 일도 별로 없어서

나는 그걸 꼬박꼬박 모아두었다.

그때 언니들은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용돈이 나보다 훨씬 많았을 텐데도

월말만 되면

나한테 돈을 꾸어달라고 자주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는 세상에 공부하는 놈하고

저축하는 놈한테는 못 당한다며

어려서부터 돈 관리(?)를 잘하는 나를 보고

이담에 아주 잘 살 거라고 하셨다.

그랬다면 오죽 좋으랴...

 

 

암울했던 초등학교 시절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사건이 있었으니

5학년 말에 내가 쓴 동시 한 편이

학교 신문에 실린 것이다.

한번도 남의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특히 아버지가 많이 기뻐하셨는데

그 시를 오려서 안방 금고 안에다

보관해놓고 우리 집에 놀러오는

어른들에게 보여주셨다.

 

 

 내게 오죽 자랑거리가 없으면 저러실까 싶어

어린 마음에도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어

이후 나는 동시(童詩)와 한자(漢字)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도 때도 없이

뭔가를 끄적거리는 아이로 변하게 되었다.

 

 

거의 낙서 수준이었지만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기록물이 쌓여가니 뿌듯했고

국어시간이 더욱 좋아졌다.

특히 시 암송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대학은 국문과를 갈 것이며 국어선생님이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지면서 긍정의 에너지가 마구마구 솟구쳤다.

 

 

한편 어렸을 적에 우리 집 안방 벽장에는

먹을 것이 참 많았다.

계절별로 나는 온갖 과일과 셈베이,

약과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형제들이 가장 탐냈던 것은 바나나였다.

 

 

그것은 아버지만 잡수시는 음식이어서 더욱 탐을 냈다.

부드럽고 달콤한 노란색 열매,

냄새만 맡아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 당시 바나나는 꿈의 과일이었다.

 

 

오죽하면 그 바나나가 먹고 싶어서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세월이 변해 이제는 비슷하게 생긴 옥수수보다도

 싼 아주 흔한 과일이 되고 말았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변한 것이 어찌 그뿐이랴.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 학습지진아였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조금씩 만회가 되었지만

중학교 올라가서도 여전히 존재감 희박한 그런 아이였다.

그러다가 중3 때 고교 입시를 앞두고

당시 장안에서 유명한 안국동 과외 팀에 합류하면서

나의 인생 역전이 시작되었다.

 

 

여학생만 있는 학교와는 달리

남학생들과 함께 과외공부를 하면서

성적이 쑥쑥 올라갔다.

덩달아서 성취감도 올라갔다.

그 전까지 부모님은 내가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나 제대로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고등학교 일차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고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해서

국어과 중등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거의 학습지진아 수준이었던 어린 시절과

부모교육 강사 노릇을 하면서 평생교육의 길을 걷고 있는

현재의 내 모습을 견준다면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늦트인 나는

스스로를 대기만성 형이라고 생각한다.

 언니들도 그랬다.

나는 머리보다는 노력형이라고...

 

 

지난 3월부터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집 근처 구민회관에서 논술공부를 하고 있다.

올해 초, 중학교 교과서가 개편되고

융합형 인재교육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바뀐 학교 현장의 소리를 듣고 싶었기에 수강신청을 하였다.

 

 

정원이 25명인 수강생 대부분은

초등학교 학부형들이었고 중학교 학부형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두어 주가 지난 어느 날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엄마가 내게 물었다.

“연세도 있으신 것 같은데 세 시간씩 앉아 있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아뇨! 전혀 힘들지 않아요. 재밌어요.”

 

 

그 엄마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또한 겉모습으로 봐서는 요가 교실이나 갈 법한데

 뒤늦게 이런 공부를 왜 할까 하는 의구심도 서려 있는 듯했다.

 

 

나이 들면서 잃은 것은 시력이고

얻은 것은 심력이라고

나는 아직도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고 공부가 재미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자기주도학습이 잘 되는 편이다.

나의 다음 도전 과목은 ‘노인학’ 그 중에서도

자서전 쓰기와 웰다잉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다.

배움은 어느 한 장소에 꽂혀 나부끼는 깃발도 아니고

어떤 시간대에 꼭 새겨야만 하는 나이테도 아니기에

이순의 나이에도 배움의 희열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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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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