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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사절

|함수연| 만남 2012. 11. 19. 10:35

가을이 깊어지면서 본격적인 추수철에 접어들자

우리 집에는 각종 택배가 도착했다.

 

 

 

10월 중순 경에 청도 반시를 시작으로 해서

곶감, 현미찹쌀과 서리태, 메주콩, 유자차, 쌍화차, 꼬막까지,

거의가 농산물 아니면 수산물이었다.

 

 

종류만큼이나 지역도 다양했다.

횡성, 상주, 포항, 전라도의 고흥과 벌교에서 온 물건들.

남편이 지역 특산물을 총망라해서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배달을 시킨 것이다.

 

 

사나흘 간격으로 오는 물건들은 거의가 박스 주문이라

양도 엄청나게 많았다.

따라서 제대로 보관을 하지 않으면

돈만 날릴 판인데 우리 집 냉장고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남편은 다 못 먹을 것 같으면 주위에 나눠주라고 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양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남편에게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택배 사절을 선언했다.

 

 

남편이 가입한 ‘귀농 사모’ 카페에다 신청해서 받는 농작물들은

거의가 유기농이고 값도 싼 편이라

처음 잡곡류들이 배달돼 왔을 때는 나도 좋아했다.

곡물은 어차피 두고 먹을 일용할 양식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머지 물건들은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다.

조금 비싸더라도 먹고 싶을 때마다 조금씩 사다 먹는 게

여러 날 냉동 보관했다 먹는 것보다 훨씬 신선하고 경제적이라는 걸

살림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그리고 무조건 산지 주문이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걸

남편에게 재차 말했다.

더구나 식구도 없는데 그건 분명 낭비였다.

어쨌든 협박과 읍소를 거듭한 끝에

다시는 택배 주문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데 작심삼일도 아니고 그로부터 이틀 후에 메주콩 한 말과

꼬막 한 상자가 또 왔다.

나하고 약속하기 전에 이미 주문했던 터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니 우리 집이 마트도 아니고, 너무 화가 났다.

나는 필요 없으니 환불하라고 했다.

헌데 남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도대체 메주콩을 어디에 쓸 거냐고 물었더니

두유도 갈아먹고 콩비지도 해먹을 거란다.

청국장까지 하시겠단다.

오, 맙소사. 지난 가을에 우리가 농사지은 무로 만든 시래기와 무말랭이가

아직도 잔뜩 있는데 이제 청국장까지 만들라니...

하긴 남편은 평소에도 된장 고추장을 직접 담가 먹으면 좋겠다고

내게 은근한 압력을 가해왔다.

 

 

언젠가 내가 하소연을 하니 언니가 말했다.

“너는 맏며느리인데다가 또 무엇이든지 재료만 갖다 주면 겁내지 않고 잘해내니까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보니 언젠가 친구 남편도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다.

 

“지현 엄마가 다 감당할 만하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이번 사건의 핵심은 남편의 무분별한 소비 형태

그것도 온통 먹을거리뿐인 과소비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

내가 일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원이 아니었다.

 

 

메주콩과 꼬막이 배달된 날,

나는 그것들을 현관문 앞에 그대로 놓아둔 채 집안에 들이질 않았다.

남편은 별 말이 없었다.

자기가 약속을 안 지킨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녁에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다말고 벌떡 일어나더니

저 멀리 벌교에서 왔다는 그 꼬막을 상자 째 들고 나가버렸다.

 

돌아온 후에도 꼬막을 어떻게 처리

했는지 나는 묻지 않았고

남편 역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음 날 저녁에 203호 아줌마가 찾아왔다.

“어제 꼬막 맛있게 잘 먹었어요. 아주 싱싱하던데요.”

 

 

그러면서 생닭 한 마리를 내밀었다. 토종닭이라고 했다.

“네, 꼬막이라고요?”

닭 봉지를 안고 내가 잠시 어리벙벙해 있는 사이에

남편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아, 맛있게 드셨습니까? 근데 뭐 이런 걸 다...”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여자가 사들이고 남자들이 만류하는 입장이라는데

우리 집은 그 반대였다.

 

 

헌데 이상한 것은 남편의 소비가 어느 특정한 것,

예컨대 씨앗이나 화초, 먹을거리들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기 와이셔츠라도 스스로 사 입으면 좋으련만

옷이라든가 신발 가구 따위들은 관심 밖이다.

 

 

남편의 관심은 오로지 먹는 것.

제철에 나는 질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뿐인데

농사일을 시작하면서부터 그 생각은 더욱 강화된 것 같다.

 

 

중학교 때 ‘엥겔계수’라는 걸 배웠는데 생활비 중에서 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적을수록

 ‘선진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애들 학비도 다 끝났으니 이제 우리 부부는 먹고살 일만 남았다.

하지만 남편의 이런 음식물 과소비가 멈추지 않는 한

앞으로의 우리 생활은 시간으로 보나 비용으로 보거나

엥겔계수가 점점 높아지는  ‘후진형’이 될 것이니 이를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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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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