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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29 무궁무진, 변화무쌍 겨울철 유자氏 이야기 1


 


나는 특히, 그녀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녀들은 내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꽃미남이냐고요? 보자마자 “와~”라며 탄성을 지르는 이도 있지만 누군가를 한눈에 사로잡을 만큼 잘생기진 않았습니다. 이들은 내 외모보다는 내가 품고 있는 자연의 향취를 즐기며, 내 장점들을 재빨리 알아보고 포용할 만큼 영민합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전남 여수시 돌산읍 평사리 산 318번지에 살고 있는, 스물한 살 난 유자나무입니다.

 
밀림 속 유자나무?

한려수도 남해 바닷가 돌산섬에 자리한 두란농장. 1988년부터 이곳에서 내 친구 김광부(66세) 씨와 동고동락 해왔습니다. 그는 한때 큰 배의 선장으로 오대양을 누비던 바다 사나이였으나 푸른 숲이 그리워 고향에 돌아와 산을 개간하고 3천 그루의 유자나무를 심었습니다. 왜 하필 나였냐고요? 나뭇가지에 달린 노란빛 유자 열매가 보석처럼 찬란하고 예뻤다고 합니다. 귀하게 얻은 막내딸을 보자마자 동글동글한 야생 콩란을 닮았다며 ‘두란(豆蘭)’이란 환상적인 이름을 붙인걸 보면 그에겐 그리 뜬금없는 일도 아닌 듯싶습니다.

 
농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대개 눈을 동그랗고 뜨고 이렇게 묻곤 합니다. “아니, 유자는 어디 있습니까?” 하긴 모눈종이에 점찍듯 평지에 일렬종대로 심어진 유자나무, 유자밭만 봐왔던 그들 눈에는 내가 쉽게 보이지 않을 겁니다. 지금 나는 남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쪽 언덕 위, 오동나무 건너편, 소나무 앞에 있습니다. 옆에는 후박나무가 있고, 저 멀리 산벚나무, 대나무, 찔레넝쿨도 있습니다. 고사리, 취, 둥굴레, 산마, 하수오까지 지천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농장이 아니라 울창한 숲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옛날 옛적 내 먼 조상들이 그랬듯 말입니다.

 

마침내 면이 섰습니다

 
김광복 씨는 인공적인 것이라면 질색을 합니다. 플라스틱도 싫어하고 시멘트도 싫어합니다. 농장 입구 길을 시멘트로 포장한 것도 불과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당연히 농약도 싫어할 밖에요. 그래서 이날 이때껏 농약이란 건 단 한 방울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80년대는 바야흐로 대량 생산의 시대였고, 질보다 양이 더 높은 가치였습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약에 취해 해롱댈 때 나는 김 씨의 기대 속에서 맨 정신으로 버텼습니다.

 

남들 눈에는 우리가 우습고 한심스럽게 보였나봅니다. 하루는 농업을 담당한다는 관리들이 찾아와 온갖 잡목으로 우거진 이 곳을 보고는 “이게 무슨 농장이냐”며 혀를 끌끌 차는 걸로 시작해, 나를 향해 “에게, 몇 개 달리지도 않았네”라며 속을 뒤집어 놓은 일도 있습니다. 관행농으로 재배하는 유자나무가 7년이면 첫 수확을 하는데 반해, 나는 적어도 12,13년은 지나야 수확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뭘 몰라도 한참 몰랐던 거지요.

 

남해의 따뜻한 날씨 속에 바닷바람과 풍부한 햇볕을 흠뻑 빨아들이며 뿌리부터 힘을 키울 동안 김씨는 부지런히 퇴비를 만들어 지게에 얹고는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뿌려주었습니다. 닭똥과 톱밥, 설탕을 섞어 발효시킨 것부터 쌀겨, 여수의 멸치공장에서 나온 멸치가루까지!

 

2005년 드디어 유기농농산물 판매처에 유자 열매를 팔고나서 받은 돈은 일금 12만 원. 팔수도 있구나,라고 감격스러워하는 그를 보며 비로소 면이 섰습니다. 나를 믿고 끝까지 기다려준 그가 참 고맙습니다.

 
과잉보호는 사양합니다

 
내가 한 해 동안 얼마나 바쁘게, 또 열심히 살고 있는지 알려드리면 이렇습니다.

4월에 첫 순을 내고, 5월이면 꽃을 피웁니다. 열매가 그러하듯 꽃도 향이 기가 막힙니다. 6월에는 작은 사탕알 만한 연둣빛 열매를 냅니다. 차츰 알이 굵어지고 노란빛을 띠어 10월 말쯤에는 전체가 노랗게 변합니다. 9월까지는 즙이 많지만 10,11월쯤 되면 즙이 줄어들면서 껍질이 두꺼워집니다. 유자 열매는 추워야 본격적으로 익으니 맛과 향은 11월 말이나 12월 초가 가장 좋습니다. 따낸 열매는 생육으로 팔기도 하고, 즙이나 차로 만들어 내놓기도 합니다. 이듬해 봄까지 김씨는 1만 5천여 평 숲 속을 누비며 도장지(웃자람가지)를 쳐냅니다. 가지가 하늘을 향해 직선으로 쭉 뻗으면 열매를 잘 맺지 못하니까 일일이 손으로 잘라주는 겁니다.

 

나는 물을 무척 많이 먹는 나무입니다만, ‘자연 그대로’를 외치는 그는 일부러 물을 더 주는 법이 없습니다. 덕분에 빗물과 바닷바람이 실어다 주는 짭조름한 물까지 잘 빨아들이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가는 중입니다. 힘들지 않냐고요? 글쎄요, 과잉보호는 사양합니다.

 

특히, 겨울에 안성맞춤

 
이제 열매 자랑을 좀 해볼까 합니다.

향은, 가히 감동적입니다! 모두들 내 앞에서는 코를 벌름거리며 무장해제 됩니다. 향수나 화장수, 방향제의 원료로 쓰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특유의 오일 성분은 피부에 좋은 영향을 발휘합니다. 영양도 풍부합니다. 비타민C의 함량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사과의 25배, 레몬의 3배로 과일 중 단연 으뜸입니다. 칼슘도 사과, 바나나보다 무려 10배나 더 많이 들어 있어 성장기 아이의 뼈 성장에, 어른들의 골다공증 예방에 도움을 줍니다. 8종류의 유기산 중 가장 많이 든 것은 구연산으로 이 성분은 비타민C와 함께 피로 회복에 좋습니다. 현미에 든 비타민B1도 있으니 평소 백미 먹는 이에게 권할 만하지요.

 

플라보노이드, 히스페리딘같은 항암성분도 가지고 있으며 이는 혈압을 안정적으로 조절해주어 뇌졸중을 예방합니다. 동의보감에서는 술독을 풀어주어 음주자에게 좋다고도 나와 있습니다. 사시사철 곁에 두고 먹어도 좋지만 이맘때면 감기가 잦고, 줄어든 일조량으로 쉽게 피로해지며, 피부가 건조해지고, 뇌졸중 발병률이 높아지는 것을 감안할 때 특히 겨울에 먹기 좋은 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포인트는 껍데기! 건더기까지 꼭꼭 씹어 먹고

 

 

열매는 무척 시어서 그냥 먹기 보다는 껍질과 과육을 얇게 저민 다음 설탕에 절여 차로 즐겨 먹습니다. 생즙을 내어 주스처럼 마시기도 합니다. 즙과 물을 2대 8 비율로 섞고 꿀을 한 숟가락 넣어 마시면 피로 회복에 그만입니다. 만약 차로 먹는다면 뜨거운 물보다는 따뜻한 물을 권합니다. 비타민C는 뜨거운 물에 약하니 말입니다.

 

유자차의 활용은 무궁무진합니다. 잼처럼 빵에 발라먹어도 좋고, 샐러드에 끼얹을 드레싱을 만들 때 넣으면 향긋함과 새콤함이 샐러드의 격을 한층 높여줍니다. 생선 조림에 넣는다면 유자향이 비린내를 물리쳐 평범한 조림 요리의 반전을 맛볼 수 있습니다. 유자약식과 유자설기, 유자양갱, 유자카스텔라, 유자머핀, 유자셔벗도 일품입니다. 유자 넣은 유자식혜, 유자식초, 유자술도 있습니다. 기억하기 어렵다고요? 꿀, 조청, 물엿, 설탕 대신! 그리고 상큼한 향이 필요한 어느 음식에든 넣으십시오.

 

여름이 지나면 유자차의 색이 변할 수 있는데, 냉동실에 두고 먹을 만큼만 덜어 냉장고에 보관한다면 변하는 속도를 늦출 수 있습니다. 유자차를 마실 때 건더기를 먹지 않는 이들이 많은데 그 영양을 생각한다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유자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한의학에서는 노란 겉껍질, 흰 속껍질, 과육, 씨를 각각 한약재로 만들어 치료에 사용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좋은 영양들 거의가 과육보다 껍질에 몰려있으니 건더기까지 꼭꼭 씹어 모두 드십시오. 잘 만들어진 유자차라면 쫀득쫀득 씹힐 겁니다.

 

울퉁불퉁 못생겨야 진짜

       

 


마지막으로 당부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내년에는 부디, 내 열매를 좀 더 느긋하게 기다려주길 바랍니다. 유자는 12월 초순이 가장 잘 익었을 때이고, 맛있을 때입니다. 나를 좋아해주는 것은 기쁘고 고마운 일이나 10월부터 성화를 하는 통에 좌불안석입니다. 나는 성장촉진제를 먹지 않는 유자입니다. 때때로 김 씨는 너무 오래 품고 있게 하여 미안하다고 하지만, 마지막 한 알까지 잘 키워내는 것은 나의 중요한 소임입니다. 남들보다 빨리 먹겠다는 생각보다는, 딱 알맞은 때에 더불어 먹겠다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 열매는 예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울퉁불퉁 거뭇거뭇 못생겼을 겁니다. 죽었다 깨나도 말간 얼굴은 될 수 없습니다. 울퉁불퉁하고 온통 노르스름하며 두툼한 껍질, 그것이 내 열매의 참 모습입니다.

 

올 겨울도 나와 함께 건강하길, 내가 지닌 향과 영양으로 몸의 감기는 물론 마음의 감기도 말끔히 치유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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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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