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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가

|함수연| 만남 2013. 10. 14. 12:27

오랜만에 광화문 거리를 찾았다.

거기에는 아직도 내 청춘이 머물러 있어

언제라도 뜨거운 손을 내밀 것만 같고

왠지 모를 아련한 설움 같은 것도 있었다.

 

 

학창시절, 나는 광화문 근처에 있는 학원에서 대학입시를 준비했고

20대 초반에는 YMCA 사진반 동아리 친구들과 어울려

무교동과 청진동을 어지간히 들락거렸다.

 

 

또한 연애시절에는 남편의 직장이 안국동에 있어

약속장소는 대개가 광화문 근처 그 어디쯤이었다.

그러니 광화문은 십 대부터 내 온갖 추억이 서린 다정한 거리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역시

교보문고 빌딩에 걸린 ‘광화문 글판’이었다.

 

 ‘또로 또로 또로 / 책 속에 귀뚜라미 들었다 / 나는 눈을 감고 /

귀뚜라미 소리만 듣는다’ (김영일의 동시 ‘귀뚜라미 우는 밤’)

 

 

 

정말 하늘 맑은 가을이구나...

이 날 글판에 걸린 ‘귀뚜라미 우는 밤’은 독서의 달에 딱 맞는 감성적 시구였다.

 

달 밝은 밤, 멀리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는

서정적이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준다.

그래서 귀뚜라미에게 가을의 전령사라는 말을 붙였나 보다.

 

 

서울 중심가의 계절 변화는 광화문 글판이 옷을 갈아입으면서

시작된다고 어느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1991년 당시 교보생명 창업주인 신용호 회장이 광화문 네거리에 사옥을 지으면서

 “기업 홍보는 생각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자”고 제안하여

시를 내걸기 시작했다고 한다.

 

 

 

 

벌써 20년이 넘었다.

이제는 계절과 호흡하는 당당한 문화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아

 광화문을 찾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과 여유를 선사한다.

어느 해인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문장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때맞춰 광화문 광장에는 벼룩시장도 열렸다.

이순신, 세종대왕 동상을 중심으로

 길게 타원형의 시장 거리가 형성되었다.

중고 의류와 가방은 물론 아기자기한 공방을 옮겨놓은 듯

크고 작은 수공예품들이 아주 많았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들이 어우러져 있는 풍경은

시골의 오일장보다 훨씬 더 소박했다.

나는 혼자였고 특별히 바쁜 일도 없었던 터라

보물찾기 하듯 찬찬히 둘러보았다.

 

 

천천히 걸을 때에만 비로소 보이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도 이채로웠다.

도심 속 타임머신 여행이랄까.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햇볕은 여전히 따가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긴 소매 차림이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더위도 피할 겸 눈요기를 멈추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아, 도심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셔본 게 얼마만인가.

잠시 그윽한 커피 향과 낭만적 풍미에 취해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쿵, 쿵, 쿵!” 가을바람을 깨우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매주 일요일 오후 네 시,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무대에서

 펼쳐지는 문화마당 시간이었다.

 

 

북, 장구, 꽹과리, 기타, 드럼 등 우리 악기에 서양 악기를 더해

구성된 퓨전타악그룹의 사내 네 명이 신들린 듯 흥겨운 우리 가락을 연주한다.

우리 전통악기는 대개가 빠른 것에서 느린 것으로 옮겨가지만

이들의 공연은 계속 빠름-빠름-빠름으로만 이어졌다.

 

 

그러니 신날 수밖에. 외국인들도 더러 있었다.

내 앞줄에 앉았던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들은 아예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까지 춘다.

시간이 흐를수록 땀에 흠뻑 젖은 연주자들과 돌계단을 꽉 채운 관객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신명의 카타르시스를 발산한다.

이 날 공연 중 유일한 여성 멤버가 들려준 노래는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애간장을 녹이는 목청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가을바람에 실려 멀리멀리 퍼져갔다.

 

 

공연이 끝나자 무대 앞에는 음료수와 도넛 같은 먹을거리가 놓여졌다.

공짜 구경에 대한 답례치고는 약소했지만 이 또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한 시간의 공연이 끝나고 나니 거의 저녁 시간,

벼룩시장도 진작에 파장을 했으니 그 넓은 광장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거기 모여든 가장(家長)들은 이제 자기 식솔들을 거느리고 어디론가 저녁을 먹으러 갔겠지...

 

 

집으로 가는 길, 그런데 지하철 5호선 광화문 역 바로 앞에

 ‘가을’이라는 카페 간판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2층 계단을 올라갔으나 정기휴일이라는 안내문만 얌전히 붙어있었다.

 

 

겉모습은 변했어도 세종문화회관 뒤쪽에는

아직 칠공팔공 세대들의 정서가 남아있는 술집들이 더러 있었다.

종로빈대떡집과 사계절을 각각 상호로 내걸고 있는 카페들.

 

 

대표적인 곳이 ‘가을’ 카페였는데

그 곳은 1990년 대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사무실이

광화문 현대해상빌딩에 세 들어있을 때 우리가 자주 들렀던 술집이었다.

 

 

술을 마시다가 마음이 동하면 주인에게 기타를 청해 받아

이문세와 김광석을 노래하는 직장인들을 볼 수 있는 곳.

우리 동료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기타를 잘 치고 재즈를 즐겼던 그녀, 당시 30대였던 그 도 어느덧

50줄에 들어선 회귀한 청춘이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나흘 후, 고대 안암병원으로 동료 선생님 병문안 갔다가

다시 ‘가을’ 카페를 찾았다.

이 선생, 송 선생이 함께 했다.

 

 

초저녁인데도 실내는 이미 만원사례!

손님들은 우리처럼 거의가 인생의 가을을 맞은 사람들이다.

자신의 나이만큼 자신의 때깔로 단풍들거나 들고 있는 사람들...

 

 

첫 스테이지는 무명의 여자 가수 등장.

첫 노래는 김종찬의 ‘당신도 울고 있네요’

다음은 장현의 ‘미련’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명곡(?)이 이어졌다.

모두가 우리 세대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들이다.

 

 

정겨운 옛 노래를 들으니 아직도 마음은 청춘인데

몸만 저만치 가고 있는 느낌이다.

벌써 여러 명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일어나

적당한 몸짓으로 테이블 양 옆을 빙글빙글 휘젓는다.

 

 

그들의 유연한 몸짓에 자리에 앉은 이들의 박수 세례가 윤활유처럼 쏟아진다.

거리낌 없는 저 자유!

가슴이 뜨거워진다. 옆자리의 송 선생은 사진을 찍어 누군가에게 카톡으로 전송한다.

‘흥겹다’ ‘즐겁다’라는 단어로는 모자랄 이 중년 남녀들의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추억? 향수? 또 다른 목마름?

 

 

 

서른 즈음, 두려울 게 없었고 청춘은 마냥 머무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이룰 것 같았다.

젊음이 떠나간 지금, 그럼에도 광화문은

내 무수한 과거를 알고 있기에 김광석의 노래처럼

‘또 하루 멀어져 가도’ 그 거리에 서면 나는 여전히 설렌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니고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니다.

세월이 저 혼자 그렇게 훌쩍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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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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