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결혼식

|함수연| 만남 2013. 12. 11. 12:24

 

 

“오늘 이 순간부터 덕 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이렇게만 생각하면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법륜 스님의 유명한 주례사이다.

정말이지 주례 선생님 말씀처럼만 산다면 무슨 문제가 있으랴마는

이건 어디까지나 주례사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주례사도 점점 듣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에는 주례 없는 결혼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니 ‘주례 공동구매 7만9000원’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물건 공동구매나 식당 할인권 공동구매는 들어봤어도

주례 공동구매는 금시초문이었다.

알고 보니 신랑, 신부가 다른 커플들과 함께

인터넷에서 주례 선생을 7만9000원에 공동구매해서 모시는 거란다.

하긴 주례를 구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헌데 공동구매를 통해 만난 주례선생은 어떤 분들이며

그분들은 어떤 주례사를 하실지 몹시 궁금했다.

사실 나는 주례 없는 결혼식에 반대 입장이었다.

그런 결혼식을 가보니 자유롭기는 하나

왠지 질서가 없는 것 같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부부로서의 일생을 서약하는 자리인 만큼

보다 경건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전통적 예식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내가 아직도 노땅티를 내고 있는 걸까?

 

 

주례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젊은이들의 입장도 나름 타당성은 있었다.

전통적으로 결혼식 주례로 모시는 분들은

대개가 신랑, 신부의 은사님이나 직장 상사 분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제지간이 옛날 같지도 않을뿐더러

주위에 주례를 부탁할 만큼 존경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단다.

 

 

물론 비싼 사례비도 부담스럽지만 결혼 전 부탁하러 가고,

결혼 후 고맙다고 답례 인사까지 가려니

매우 번거로워서 주례를 기피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고 그동안 틀에 박힌 개념의 혼주 위주로 행해졌던 결혼식이 차츰

신랑, 신부가 주인공이 되는 혼사로 바뀌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아, 주례 없이 행해지는 결혼식도 괜찮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건 얼마 전에 다녀온 결혼식 때문이었다.

 

 

예식장은 태평로에 있는 신랑의 회사 강당이었다.

신랑은 회사원이고 신부는 교사라고 했다.

모든 순서는 주례 없이 사회자의 멘트와 신랑의 프리젠테이션으로 진행되었는데

영하의 날씨와는 달리 실내 분위기는 시종 훈훈했다.

 

 

약 한 시간가량 진행된 예식이

나중에는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까지 들 정도로

인상에 남는 결혼식이었다.

처음 출발은 여느 결혼식과 비슷했다.

양가 어머니의 촛불 점화, 신랑신부 입장과 인사,

그리고는 주례사 대신 신랑이 홀로 무대에 섰다.

 

 

 PPT 화면이 펼쳐짐과 동시에 시작된 신랑의 프리젠테이션!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동기부터 시작하여 양쪽 집안의 가계도와

신부의 프로필, 연애시절의 사진 등 잘 편집된 볼거리들을 영상화면으로 보여주면서

 하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공들여 만든 자료 같았다.

 

 

미모의 신부 사진을 곁들여서 그녀의 출신학교, 경력, 현재의 직장 등

화려한 스팩을 쌓은 배우자를 소개한 반면에

본인 것은 너무도 심플하게(?) 단 한 컷으로 마무리.

‘나, 신랑 김우람은 그냥 회사원!’

여기저기서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 한마디에 나는 그가 따뜻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훈남에다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다음은 축가 순서였다.

선생님께 바치는 제자들의 노래 헌정이랄까,

신부가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이 나와서 박진영의 <청혼>을 불렀다.

고등학생들이 대거 등장하여 통일된 복장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율동까지 곁들인 축가 시간. 당연히 앙코르가 쏟아졌다.

그런데 이제까지 차분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공연 모드로 바뀌더니

 돌발 상황까지 발생했다.

 

 

신부의 두 살바기 조카가 아장 걸음으로 무대 위에 나타난 것이다.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이 꼬마 아가씨, 고사리 같은 손으로 손뼉을 치면서

그 넓은 무대를 휘젓고 다니더니 하객들에게 박수까지 유도한다.

전혀 의도되지 않은 장면에 식장은 일시에 웃음바다가 되었고

식장 안은 더욱 흥겨워졌는데 아기는 자기도 모르게 음악적 본능이 작동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이모에게 바치는 축하 메시지!

스피치 대신 온몸으로 보여준 비언어적 요소가 이날 양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식이 다 끝나고 피로연장에 인사차 들른 신랑신부에게

우리는 아낌없는 박수와 덕담을 건넸다.

가까이서 보니 신랑과 신부가 참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부부는 3주 연구하고, 3개월 사랑하고, 3년 싸우고, 30년 참고 견디는 것이라 했으니

결혼생활이 그만큼 복잡하고 심란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것이리라.

 

 

김종길 시인은 ‘부부’를 이렇게 말했다.

 

놋쇠든, 사기이든, 오지이든

오십 년이 넘도록 하루같이 함께

붙어 다니느라 비록 때 묻고 이 빠졌을망정

늘 함께 있어야만 제격인

사발과 대접

 

 

이제 부부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탄생된 신랑과 신부에게

 나는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들이 사발과 대접처럼 오십 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오래

불꽃보다 뜨겁고 폭풍우보다 힘차게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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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에 문단에 데뷔한 소설가 박완서는 여든에 숨을 거두기까지 쉼 없이 글을 썼다. 그가 77세에 펴낸 <친절한 복희씨>는 노년층 풍속을 세밀하게 그려내 우리나라 실버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최근에 나온 그의 유고집 <노란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해 전 세상을 뜬 작가가 생전에 살았던 경기도 구리의 집은 아치울 노란 집으로 불렸다. 2000년대 초반 그 집에서 쓴 미발표 소설과 산문을 박완서 씨의 딸이 엮어서 만든 책 제목이 바로 <노란 집>이다.

 

 

총 여섯 마당으로 나누어진 글 중에서 첫 장 ‘그들만의 사랑법’은 짧은 소설 형식으로 주로 영감님과 마나님으로 표현되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어쩌면 누추해 보일 수도 있는 노인의 삶을 때로는 쾌활하게 때로는 슬픔과 유머가 적당히 가미된 매우 오묘한 풍경을 보여주어 참 재미있게 읽었다. ‘속삭임’ ‘토라짐’ ‘동부인’ ‘나의 보배덩어리 시절’ ‘휘모리장단’ 등과 같이 우선 글 제목이 정겹고 친근했다.

 

 

‘토라짐’에서는 앙상한 뼈다귀로 남은 굴비 삽화가 등장한다. 점심상에 알배기 굴비를 올릴 때까지만 해도 마나님은 행복감으로 마음이 그들먹했다. 남편과 겸상을 해서 막 수저를 들려는데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런데 잠깐의 전화를 받고 돌아와 보니 며느리가 가져온, 한 마리에 오만 원도 넘는 영광굴비가 뼈만 남은 채 사라져버린 것이다. 영감님이 어찌나 알뜰하게 발라 먹었는지, 머리와 꼬리를 잇는 등뼈의 가시가 빗으로 써먹어도 좋을 정도다.

 

 

앗, 마나님의 경악! “영감 입은 입이고 내 입은 주둥이요?” 말하고 싶지만 평생 제 입 밖에 모르는 영감과 살아왔거늘 새삼 웬 지옥 불같은 증오란 말인가? 하긴 저 영감이 무슨 잘못이람. 아들을 저따위로 키운 시어머니 탓을 하다가 난 또 뭔가. 내가 저 영감을 저렇게 길들인 걸. 자신을 다독거려도 보지만 그래봤댔자 남는 건 허망함밖에 없다. 한바탕 허망감이 휩쓸고 지나가니 다시는 열리지 않을 빗장처럼 마음이 무겁게 닫힌다. 그러나 영감님은 마나님이 왜 토라졌는지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순박한 우리네 남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렇듯 작가는 노년기 부부에 대한 넉살과 익살, 소시민적 행복의 허위의식을 은근슬쩍 꼬집는다. 읽다보면 우리 세대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랄까, 누더기 옷에서 이 잡던 때를 그리워하는 궁상스러운 소리를 해대도 “그럼, 그렇고말고!” 하며 저절로 맞장구를 치게 된다.

 

 

우리는 늦도록 해로하는 부부를 보면 서로 등 긁어줄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좋으냐고 부러워들 한다. 소설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손자들한테 선물 받은 효자손이 집안 여기저기 굴러다니건만 영감님은 한사코 마누라 손만 찾는다. 차가운 효자손 대신 적당한 체온으로, 적당한 거칠음으로, 가려운 곳을 적당히 알아서 긁어주는 마누라 손은 영감님의 유일한 사치다. 마치 손길을 타는 어린애 같다. 이제 영감님의 등은 청년의 등도 아니고 장년의 등도 아니다. 삭정이처럼 쇠퇴해가는 노년의 몸이지만 마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온몸에 생기가 돋고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하지만 마나님은 그 반대다. 한때 그녀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 떡판처럼 든든하고 기름진 등판은 어디가고 영감님 등을 긁어주면 어쩔 수 없이 만져지는 굽은 등뼈 마디도 섬뜩하거니와 치마폭 하나 가득 떨어지는 허연 비듬과 늙은이의 강한 체취가 불러일으키는 혐오스러운 이물감 때문이다. 이러면 죄 받지 싶은 심각한 죄의식에 사로잡혔다가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정직한 내면의 소리 같기도 하다.

 

 

문학작품 속에서만이 아니라 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년기 삶에 대해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회자 되고 있다. 과거 노인하면 나이가 든 늙은 사람을 말했다. 나이로는 보통 65세 이상을 노인이라 칭한다. 그러나 미국 의학협회에서는 노인의 정의를 달리한다. 자신을 늙었고, 배울 만큼 배웠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고 느낄 때라고 한다. ‘이 나이에 그깟 일은 뭐해.’라고 생각하거나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젊은이들의 활동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때, 현재보다는 좋았던 과거 시절을 그리워할 때 노인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요즘 노인은 예전의 노인이 아니다. 91세의 할아버지와 74세의 할머니가 식스팩을 자랑하며 세계 최고령 보디빌더로 기네스북에 오르는 세상이다. 그런가하면 올해 타계한 일본의 백한 살 할머니 시인의 스토리도 주목을 끈다. 아흔아홉에 낸 첫 시집 <약해지지 마>가 150만부나 팔리면서 실버 세대 창작 붐을 일으켰었다. 지금 일본에서는 환갑 넘은 신인 작가와 시인들이 줄줄이 등단하고 있다. 우리 신춘문예에서도 50.60대 당선자가 낯설지 않다.

 

 

노인 문제 전문가들은 이제 은퇴 후 8만 시간을 다시 짜야 한다고 주장한다. 8만 시간은 60세 은퇴자가 80세까지 20년간 수면, 식사 등을 빼고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사실 요즘 은퇴자들은 100세까지 살 각오(?)를 해야 하니 20년을 더한다면 무려 16만 시간이 큰 강처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과연 나도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행복한 노년을 누릴 수 있을까...

 

 

최근 서울시가 ‘노인’ 명칭을 ‘어르신’으로 바꿔 사용하기로 했단다. 노인들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첫 조치라고 한다. 명칭 하나로 대접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노인 보다 어르신 하면 왠지 지혜와 연륜을 가진 어른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아서 좋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주인공인 늙은 어부를 이렇게 묘사했다. ‘머리가 허옇고 수척하지만 두 눈만큼은 바다 빛깔이고 쾌활함과 불굴의 의지로 불탄다.’ 머리카락은 은빛이지만 마음과 눈빛은 언제나 청춘인 어르신들, 그들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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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공사

|함수연| 만남 2013. 9. 6. 10:50

‘이 곳에서는 성행위를 할 수 없음’

 

 

볕 좋은 4월의 어느 날,

중랑구의 모 초등학교에서 학부모 특강을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나는 깜짝 놀랐다.

 

 

 

 굴다리 옆 회색 담벼락에다 누군가

 붉은 색 글씨로 그렇게 써 놓았던 것이다.

커다란 가위 그림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잠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누가 이런 데서 성행위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니

‘성행위’가 아니라 ‘상행위’였던 것을

누가 바깥 점을 지우고 대신 안쪽에다 점을 찍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상행위가 성행위로 바뀌고

점 하나에 뜻이 아주 이상야릇하게 변질되고 만 것이다.

 

 

그렇겠지, 하면서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흔히들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사물을 보고 표현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따위 짓을 했을까?

 

 

 만일 젊은 여자들과 학생들이 본다면 얼굴 붉힐 일이며

 남자들도 그 글을 읽고 컴컴한 굴다리를 통과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감상에 젖게 되거나

또한 음흉한 마음을 품게 되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었다.

 

 

 글쎄, 내가 너무 비약했나?

아무튼 한시 바삐 본래대로 고쳐 놓아야 할 것이다.

 

 

또 한번은 양평대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경험했던 일이다.

모처럼 친구들과 용문산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시 양평에서 팔당 쪽으로 넘어오는 왕복 2차선 길은 만성정체구역인지라

그 날도 우리는 차가 막힐 거라는 생각에 용문사 절은 구경도 못한 채

근처 식당에서 점심만 먹고는 서둘러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헛수고였다.

 

 

서울로 들어오는 차들은 양수리 근처에서부터

꼼짝을 못하고 긴 행렬을 이루었으니...

나는 거의 체념한 상태로 일찍 가긴 다 글렀구나.

설마 오늘 안으로야 들어가겠지 하는 느긋한 심정으로

차창 밖을 두리번거리는데 범상치 않은 글이 내 눈에 들어왔다.

 

 

공사 중인 시멘트 다리 맨 꼭대기에 ‘혼이 담긴 시’라고 내용이 낯설긴 했으나

글씨만큼은 아주 또렷한, 이상한 표어 하나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밑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시공사 흥화 건설’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 문예회관 공사도 아니고 다리 만드는데

무슨 놈의 혼이 담긴 시?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다리 공사와 시(詩)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함께 타고 있던 세 명의 친구들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들 역시 이상하다는 반응뿐이었다.

답답했다.

당장 내려 현장 소장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공사 현장에 혼이 담긴 시가 왜 끼어들게 되었을까?

공사 책임자의 특별한 철학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시를 읊는 마음으로 평화와 여유를 가지고 일을 하라는 뜻일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고 집에 와서도 그 의문은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로부터 서너 달 후,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 시인

최하림 선생 댁을 다녀오면서 그 의문은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것은 ‘혼이 담긴 시’가 아니라 ‘영혼이 담긴 시공’이었는데

‘영’자와 ‘공’자가 떨어져 나가서 그리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뜻이 통하는 제대로 된 글귀를 보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만약 이날도 ‘혼이 담긴 시’가 그대로 붙어있었다면

나는 또 여러 날 머리 나쁜 나를 스스로 들볶았을 테고

급기야 건설회사에 전화로라도 문의했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나보고 걱정도 팔자란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칠 일이지 괜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나.

그러나 어쩌랴,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길을 가다보면

맞춤법 틀린 간판은 왜 그리 많은지...

 

 

언젠가 식구들과 양평 해장국집을 갔다.

메뉴판을 뒤적이다가

‘24시간 정성 드려 고아 만든 새로운 보양식 출시’라는

글을 보는 순간 나는 또 직업병(?)이 발동하고 말았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주인을 불러

‘정성 드려’가 아니라 ‘정성 들여’가 맞는 말이니 다시 쓸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혹시 언짢아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싹싹한 여주인은 당장 고치겠다며 오히려 고마워했다.

 

 

어디 그뿐인가.

노래방에 ‘래’자가 떨어져나가

‘노-방‘이 된 것처럼 글자 한 자씩 떨어져나간 간판도 자주 보인다.

따라서 거리에는 글씨 공사를 해야 할 곳이 참 많은 것 같다.

반면에 서울시에서는 해마다 아름다운 간판 공모전을 한다는데

그래서인지 최근의 간판들은 예전에 비해 글씨가 작고

색깔이나 디자인에서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섬마을 밀밭집’(해물 칼국수집) ‘첫날밤 분홍 이불’(이불집)

‘낮에는 해처럼 밤에는 달처럼’(안경집) ‘오, 나그네여 쉬어 가게나’(전통찻집).

이런 감성적인 간판을 달고 있는 상점들은 왠지

호감이 가고 한번쯤 들러보고 싶은 곳이다.

 

 

일찍이 언어는 ‘사상의 옷’ ‘존재의 숲’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가뜩이나 어지러운 세상에 우리가 생각 없이 함부로 쓰는 말과 글 때문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고,

이 사회가 더 정신없고 혼탁해진다면

그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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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여행

|함수연| 만남 2013. 7. 23. 17:15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 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다.

하루하루 일상을 살다보면 불현듯 끈끈한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되는데

이 시에서처럼 마음이 허할 때나 삶이 허기질 때,

나도 문득문득 국수가 생각난다.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국수가 더욱 땡긴다.

우리 집 식구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매콤달콤한 비빔국수인데

여름에는 콩국수도 자주 해먹는다.

예전에는 콩을 삶아 믹서기에 갈고 체에 내리는 일이 여간 번거롭지 않았는데

지금은 여러 곳에서 콩 국물을 만들어서 파니까 언제라도 손쉽게 해 먹을 수가 있다.

 

올 봄 남편과 둘이 3박4일 일정으로 남도 기행을 떠났었다.

사실 처음부터 국수만 먹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찌하다보니 진짜 국수여행이 되고 말았다.

 

맨 처음 들른 곳은 오천 항에 있는 바지락 칼국수 집.

세트 메뉴를 시키니 6000원에 바지락 칼국수와 비빔칼국수가 나란히 등장하는데

양이 꽤나 푸짐했다.

가격 대비 맛도 괜찮았다.

게다가 무한리필을 해준다니 식당 안은 그야말로 문전성시!

종업원들은 뛰다시피 하며 음식을 날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호로록 호로록 얼른 먹고

기다리는 다음 손님들을 위해 우리는 재빨리 일어섰다.

 

식사를 마쳤으면 얼른 일어나 가주는 것,

프로페셔널한 손님의 기본 아니겠는가.

들어갈 때 입구에 신발이 마구 뒤엉켜 있어서 혹시나 신발이 바뀌지는 않을까

은근 걱정을 했으나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은 전남 담양의 메타세콰이어 숲길을 걷고 나서

그 유명한 ‘담양 국수거리’로 갔다.

50년 전 죽세공품 시장에서 국수를 팔던 진우네 집을 시작으로

관방제림을 따라 열 곳이 넘는 국숫집이 모여 있었다.

이곳 역시 원조 격인 진우네 집만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북적거렸고

다른 집들은 매우 한산했다.

 

진우 엄마인지 할머니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아주머니가

줄서기를 잘 하라며 손님들에게 엄포를 놓는다.

그 자신만만함이 약간 거북스럽기도 했지만 우리 역시 군소리 없이 차례를 기다렸다.

 

이것도 원조 프리미엄인가?

명성에 비해서 맛은 그저 그랬다.

특이한 건 잔치국수를 소면이 아닌 중면으로 삶아서 양은그릇에 담아주었다.

멸치 국수에 삶은 달걀을 곁들여서 먹는 게 특이했다.

삶은 달걀은 천원에 3개, 국수 값까지 합쳐도 한 사람 당 오천 원이면 충분했다.

 

며칠 전 KBS의 인기프로 ‘한국인의 밥상’에서 전국의 소문난 국숫집을 찾아다녔는데

이 담양 국수거리도 소개가 되었다.

최불암 씨가 우리가 갔던 바로 그 진우네 식당에서

손님들과 어울려 국수를 먹는 장면이 나왔다.

 

어찌나 반가운지... 국수는 잘난 음식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박하다.

각자 양푼 하나씩 들고 가게 앞 평상에 둘러앉아

국수를 먹으니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금세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었다.

그러니 주머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국수는 위안의 음식이자 교감의 음식이다.

 

어쩌면 국수 국물의 멸치 냄새는 어린 시절 고향의 냄새와도 같다.

따라서 국수를 먹는 것은 고향에 가는 것,

 옛 고향집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국수로 점심을 해결했으니 저녁은 조금 거하게 먹고 싶었다.

담양의 명물인 떡갈비를 먹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이 길을 잘못 안내하는 바람에 전혀 다른 곳을 찾아갔다.

 

차를 돌려 다시 시도했지만 어디 숨었는지

우리가 가려는 식당은 좀체 안 나타났다.

나는 그냥 아무거나 먹자 했지만 남편은 기필코 떡갈비를 먹겠단다.

왔다갔다 그러기를 몇 차례, 이렇게 거리에서 헤매다보니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코끝이 매운 날씨였다.

그 무엇이라도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일단 숙소로 차를 돌렸다.

모텔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바로 앞에 ‘봉순 네 팥칼국수집’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날은 어둡고 배는 고프고, 빨리 허기를 해결해야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입구에는 <100% 국산 팥이 아니면 바로 환불해드리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써져 있었다.

국산 팥으로 만들었다니 왠지 믿음이 갔다.

먹어보니 새알이 듬뿍 들어간 게 팥 국물이 아주 진했다.

내 친구 이름과 같은 봉순이라는 상호도 정겨웠다.

 

서울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은 전북 임실에 있는 ‘행운집’을 찾았다.

이 집은 이번 여행에서 꼭 들르기로 마음먹었던 유일한 곳이었다.

강진읍에서도 18km 떨어진 강진 시장 내에 위치한 허름한 국숫집.

조선일보 오태진 기자가 쓴 칼럼을 보면

행운집에서 국수를 시키면 머리고기 한 접시를 덤으로 준다고 했다.

국수만 파는 집에서 웬 머리 고기?

나는 그 사연이 궁금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신문 보고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예순아홉의 주인할머니는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끼니때가 지나서인지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예전에 술 찾는 장사꾼이 많아서 공짜 술안주로 돼지 머리고기를 냈던 것이데,

국수 손님들이 우리는 왜 안주냐고 해서 국수 찬이 돼버렸다고 한다.

 

4000원짜리 국수 두 그릇을 주문한 우리에게도

역시 삶은 머리고기가 제공 되었으나 기름기가 너무 많아서 먹기가 거북했다.

여러 점을 남겼다.

할머니는 이 아까운 것을 왜 남겼냐며 당신이 맛있게 다 드셨다.

약간 미안했다.

 

곧 이어 김치를 송송 썰어 고명으로 얹은 멸치국수가 양은그릇에 담겨 나왔다.

국물 빛이 보기에는 맹탕 같았는데 한 술 떠보니 뜻밖에도 진국이었다.

면발은 굵으면서도 부드럽고 탱탱한 탄력이 느껴졌다.

 

우리 외에는 손님이 없던 터라 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기네 국수는 백양국수라는 읍내 가내공장에서 받아다 쓰는

자연 건조 국수여서 다른 국숫집과는 면발부터 다르단다.

그리고 김치를 비롯한 채소들도 직접 밭을 일궈 키운 것들로

손님상에 낸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30년 국수 할머니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증명이라도 하듯 이 행운집 사연이 소개된 조선일보 기사가

유리 액자에 담겨져 한쪽 벽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내가 스크랩해서 가져 간 바로 그 신문기사였다.

 

덜거덕거리는 기계에서 뽑아낸 면을 천 말리듯

 대나무에 죽 걸어놓은 하얀 국수들.

우리 어렸을 적 동네에서 흔히 보던 국수 가게 풍경이었다.

공장 국수가 아닌 옛날 수제국수를 삶아서 주는 이 행운집 국수는

추억의 국수로 냄새, 빛깔, 연륜, 기대, 인생관, 기타 등등 수많은 함수를

직감적으로 풀어낸 맛의 결정체였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혹시 마른 국수 한 다발 팔 수 없냐고,

원래는 안 파는데 7000원 주고 하나 가져가란다.

야호, 행운이다!

 

삼일 간의 여정에서 국수만 네 끼,

목포 항 편의점에서 사다먹은 라면까지 합치면 도합 다섯 끼다.

하여 이번 남도 기행이 어쩌다가 국수 여행이 되어버렸지만

아무래도 국수의 본고장은 강원도가 아니겠는가.

춘천 막국수를 비롯해서 횡계의 초계국수, 정선의 콧등치기국수,

원통의 올갱이국수 속초의 물회국수까지.

 

그러고 보니 내가 진짜 국수 광(狂)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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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는

책제목만큼이나 매우 강렬한 인상을 던져준 책이었다.

책이 나온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며칠 전 신문을 보니 연예계의 독서광이라고 소문난

탤런트 차인표 씨가 최근에 읽고 추천하고 싶은 책 목록 중에

이 책도 들어 있었다.

 

책의 작가는 미국의 존 라빈스라는 사람으로

그는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상속을 거부하고

생태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해서 더욱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이제까지 나는 가급적 인스턴트식품을 멀리하고

자연식 위주의 식단을 꾸리려고 애썼고

그래서 채소들도 직접 길러먹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책을 다 읽고 나니 우리의 식생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름 문제점이 많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동안 건강을 위해 자주 먹었고

자연식품이라 여겼던 달걀과 우유들이

실은 항생제와 방부제 덩어리라는 것.

그리고 닭 소 돼지들이 사육되어지는 과정이

너무나 야만적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을 접한 후 한동안은 도저히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가축들이 인간을 위해 마지막 제물로 바쳐지는 그 순간

그것들이 도살당해서 우리 몸속으로 들어올 때,

이 불쌍한 동물들의 살과 알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축들이 사육되어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질병, 비참함, 공포, 분노들이

몸 속 켜켜이 쌓였다가

그 축적된 것들이 식탁으로 고스란히 옮겨져

고기와 함께 모두 먹게 된다니

가히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맛있게 고기를 먹을 때

가축들이 느꼈던 한과 분노까지 함께 씹다니……

또한 ‘유기적’ ‘자연적’ ‘친환경적’라는 상표가 붙은 품목들도

매우 신중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런 말들은 서로 다른 뜻으로 쓰일 때가 많았고

느슨한 의미로도 해석될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규제되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사실을 알고 나니

육식 섭취를 최소한으로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저자는 이런 제품들을 사먹지 않더라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단백질과 그 외의 영양소들은

얼마든지 다른 음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여서 플라톤과 톨스토이, 간디 같은

고매한 인물들은 일찍부터 육식을 거부해 왔다는 사실을

그는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채식 위주의 식단을 고집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나의 정신세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바깥일을 하면서 외식의 기회가 점점 늘어나는

사회 구조상 육식을 안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비록 현실적인 상황은 그렇다 하더라도

좀 더 자연인에 가까운 삶에 다가가려면

음식부터 다스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깨끗한 음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하고

기름지고 화려한 음식이 아니라 두세 가지의 반찬으로도

정갈하게 차려서 정결한 마음으로 하늘을 떠올리듯 숟가락을 든다면...

 

정말로 나이를 먹으니

이젠 진수성찬을 마주 하게 되면 걱정부터 앞선다.

과식할 확률이 높으며

먹고 남은 음식물 쓰레기 문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사람이 사는데 먹는 즐거움보다 더 큰 게 어디 있냐고.

 

인간의 기본 생활양식인 의식주 중에서도

사실 먹는 행위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순위에 속한다.

그것은 생존과 직결되어서

예전엔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요즘엔 어떡하면 좀더 적게 먹고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를

모든 사람들이 고민한다.

 

그래서 방송에서도

‘잘 먹고 잘 사는 법’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프로그램이나

건강을 주제로 한 프로의 시청률이 매우 높은 것 같다.

 

나도 한때는 남편을 따라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들을

거리를 마다 않고 찾아다니는 것이 취미였으며

유명 음식점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였다.

 

지금도 가끔씩 맛집 소개를 해달라는 전화를 받곤 한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농장에서 자급자족한 먹을거리로

소박하게 차려먹는 집 밥이

값비싼 식당의 산해진미보다 더 맛있다.

 

위장과 환경에 부담을 덜 주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없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현대인의 가장 무서운 질병인

암도 음식으로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김상원의 <천연 산물의 위력>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암은 바이러스다. 박테리아에 의해 감염되는 것이 아니다.

 음식의 종류에 따라 과잉섭취와 부족 현상이 심화될 경우,

 영향의 불균형에서 세포가 변질되고 정신적으로 원망과 불안

 그리고 심한 스트레스에 의해서 임파구가 본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즉 자생력이 최악의 상태로 저하되었을 때 발병하게 되는 것이다.’

 

세월 따라 모든 것이 변하듯 입맛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육식, 건강을 망치고 세상을 망친다>

이 책은 우리의 일상적인 식생활이 건강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또한 육식 위주의 식생활이 왜 나쁜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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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자존감 낮았던 때가 초등학교 시절이 아닌가 싶다.

호적이 잘 못 되는 바람에 한 학기를 늦게 입학했고

집에는 부모님이 안 계셨으니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나는 외톨이 신세였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에 와서 낮잠을 자다 깼는데

사방이 뿌연 게 꼭 아침 같았다.

얼른 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당시에는 2부제, 3부제 수업을 했던 터라

학교는 오후 늦게까지 학생들로 북적였다.

 

 

정신없이 뛰어가 우리 반 교실로 들어갔는데

내 자리에는 딴 아이가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선생님도 반 친구들도

전혀 익숙한 얼굴들이 아니었다.

 

 

그때의 황당함이란!

나는 울면서 돌아왔고 오는 길에 위로라도 받을까 싶어

가게에 들렀는데 엄마는 위로는커녕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사냐며 혼쭐을 내셨다.

그래서 더욱 서럽게 울었던 기억.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기가 어딘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치매감에 빠져 있던 그때의 그 장면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한편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집에는 할머니와 일하는 언니가 있었는데도

하루 두 번씩이나 학교에 가는 나를

왜 붙잡지 않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실수투성이에다 공부에 흥미도 없으니

학교생활이 자연히 싫어질 수밖에.

요즘 말로 하면 나는 학습지진아내지는

학습부적응아였다.

하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한참 뒤처지는 나를

담임선생님들은 나름 귀여워해주셨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시험지나 문구류를

우리 지물포에서 죄다 갖다 썼고

아마도 사장인 아버지는 돈을 안 받거나

무진장 싸게 공급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긴 하지만...

당시 아버지는 청량리 전차 종점 부근에서

지물포와 운수업을 동시에 운영하고 계셨다.

게다가 전교 1.2등을 다투었던

언니 오빠들이 다 우리 학교 출신이 아니던가.

 

 

형제들이 많다보니 우리 집은 날마다 전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내가 유치원 다닐 때

제일 맏이인 큰오빠는 대학원생이었으니

일곱 형제가 전부 학생인 때가 있었다.

 

 

매일 아침, 먹는 일에서부터 차비며

준비물 살 돈을 타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일찍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을 주셨다.

나이에 따라 차등을 두었는데 초등학생인

나는 1000원쯤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 돈의 개념을 몰랐고 돈 쓸 일도 별로 없어서

나는 그걸 꼬박꼬박 모아두었다.

그때 언니들은 고등학생이었으니까

용돈이 나보다 훨씬 많았을 텐데도

월말만 되면

나한테 돈을 꾸어달라고 자주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는 세상에 공부하는 놈하고

저축하는 놈한테는 못 당한다며

어려서부터 돈 관리(?)를 잘하는 나를 보고

이담에 아주 잘 살 거라고 하셨다.

그랬다면 오죽 좋으랴...

 

 

암울했던 초등학교 시절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사건이 있었으니

5학년 말에 내가 쓴 동시 한 편이

학교 신문에 실린 것이다.

한번도 남의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특히 아버지가 많이 기뻐하셨는데

그 시를 오려서 안방 금고 안에다

보관해놓고 우리 집에 놀러오는

어른들에게 보여주셨다.

 

 

 내게 오죽 자랑거리가 없으면 저러실까 싶어

어린 마음에도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것이 동기부여가 되어

이후 나는 동시(童詩)와 한자(漢字)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도 때도 없이

뭔가를 끄적거리는 아이로 변하게 되었다.

 

 

거의 낙서 수준이었지만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기록물이 쌓여가니 뿌듯했고

국어시간이 더욱 좋아졌다.

특히 시 암송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대학은 국문과를 갈 것이며 국어선생님이 되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지면서 긍정의 에너지가 마구마구 솟구쳤다.

 

 

한편 어렸을 적에 우리 집 안방 벽장에는

먹을 것이 참 많았다.

계절별로 나는 온갖 과일과 셈베이,

약과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 형제들이 가장 탐냈던 것은 바나나였다.

 

 

그것은 아버지만 잡수시는 음식이어서 더욱 탐을 냈다.

부드럽고 달콤한 노란색 열매,

냄새만 맡아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 당시 바나나는 꿈의 과일이었다.

 

 

오죽하면 그 바나나가 먹고 싶어서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세월이 변해 이제는 비슷하게 생긴 옥수수보다도

 싼 아주 흔한 과일이 되고 말았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변한 것이 어찌 그뿐이랴.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 학습지진아였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조금씩 만회가 되었지만

중학교 올라가서도 여전히 존재감 희박한 그런 아이였다.

그러다가 중3 때 고교 입시를 앞두고

당시 장안에서 유명한 안국동 과외 팀에 합류하면서

나의 인생 역전이 시작되었다.

 

 

여학생만 있는 학교와는 달리

남학생들과 함께 과외공부를 하면서

성적이 쑥쑥 올라갔다.

덩달아서 성취감도 올라갔다.

그 전까지 부모님은 내가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나 제대로 갈 수 있을는지,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고등학교 일차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고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해서

국어과 중등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거의 학습지진아 수준이었던 어린 시절과

부모교육 강사 노릇을 하면서 평생교육의 길을 걷고 있는

현재의 내 모습을 견준다면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늦트인 나는

스스로를 대기만성 형이라고 생각한다.

 언니들도 그랬다.

나는 머리보다는 노력형이라고...

 

 

지난 3월부터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집 근처 구민회관에서 논술공부를 하고 있다.

올해 초, 중학교 교과서가 개편되고

융합형 인재교육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바뀐 학교 현장의 소리를 듣고 싶었기에 수강신청을 하였다.

 

 

정원이 25명인 수강생 대부분은

초등학교 학부형들이었고 중학교 학부형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두어 주가 지난 어느 날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엄마가 내게 물었다.

“연세도 있으신 것 같은데 세 시간씩 앉아 있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아뇨! 전혀 힘들지 않아요. 재밌어요.”

 

 

그 엄마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또한 겉모습으로 봐서는 요가 교실이나 갈 법한데

 뒤늦게 이런 공부를 왜 할까 하는 의구심도 서려 있는 듯했다.

 

 

나이 들면서 잃은 것은 시력이고

얻은 것은 심력이라고

나는 아직도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고 공부가 재미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자기주도학습이 잘 되는 편이다.

나의 다음 도전 과목은 ‘노인학’ 그 중에서도

자서전 쓰기와 웰다잉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다.

배움은 어느 한 장소에 꽂혀 나부끼는 깃발도 아니고

어떤 시간대에 꼭 새겨야만 하는 나이테도 아니기에

이순의 나이에도 배움의 희열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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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모임을 마친 후 강동구 둔촌동에 위치한

‘도원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장소 선택은 내가 했다.

 

 

일전에 남편과 함께 갔다가 문이 닫혀 있어

헛걸음질 한 경험이 있기에

언젠가 다시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참이었다.

다섯 명의 일행과 함께 찾아간 그 식당자리는

소설가 부부의 살림집이자 방기환 선생의

그 유명한 고전소설 <어우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밥을 먹으러 갔다기보다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가게 된 것이다.

보훈병원 정문 왼쪽 켠에 자리한 이 식당은

한때 ‘능소원’이라는 이름으로

방기환과 그의 아내인 소설가 임옥인 선생이

20년 넘게 살던 집이었다.

 

 

우리나라 소설가 1세대에 해당되는 이들 부부는

아내가 남편보다 14살이나 연상이었고

문단에서는 내로라하는 잉꼬부부로,

로맨티스트로 통했다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부부는 능소화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기 집 호를 능소원이라 지었고 집 주위를

능소화로 뒤덮었다고 한다.

 

 

또한 <어우동> 소설에 등장하는 기생 이름도 능소화였으니

이들 부부의 능소화 사랑이 어떠했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장마철에 등처럼 환한 능소화가 온 집을 밝힌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작가의 집 ‘능소원’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도 유명했다.

 

 

70년대 초, 방기환은 저작권료로 받은 돈으로

당시에는 꽤나 변두리인 서울의 동쪽 끝 둔촌동에

땅 천여 평을 사서 갖가지 나무와 화초를 심고

한쪽 마당을 잔디밭으로 만들어 문우들의

세미나나 토론장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가끔씩은 문단의 가난한 후배나 제자들이

그곳에서 결혼식도 올렸단다.

그런데 동네에서 작은 공원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던 이 집은 보훈병원을 지을 때

길을 내느라고 집 앞 절반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1993년과 1995년 작가 부부가 차례로 세상을 뜬 후,

능소원은 대중음식점으로 탈바꿈했다.

 

 

처음에는 콩나물국밥집이었다가 다시

‘도원 식당’이라는 고깃집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나는 신혼 초부터 둔촌동에서 오래 살았기에 이렇듯

능소원의 영욕의 세월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전에 콩나물국밥집일 때는 몇 번 드나들었지만

고깃집으로 바뀐 후에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내가 1980년 초반부터 둔촌아파트에 살았으니

능소원의 실체를 진작에 알았더라면 오며가며 내가 좋아하는 꽃,

능소화를 실컷 보고 혹여 그들 부부와도 마주치지는 않았을까...

그곳은 우리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번씩 가는 약수터길 중간에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했을 것 같다.

 

 

류시화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 제목이 다시금 떠오른다.

식당주위는 겨울이라 삭막함이 더했고

월요일 저녁이라서 손님도 없었다.

 

 

게다가 언제 손을 봤는지 식당 입구 아치형의 철 대문은

녹이 잔뜩 슬어서 ‘여기가 정말 능소원 자리가 맞나?’ 싶었다.

능소화의 전설만큼이나 애틋한 능소원.

 

 

문학의 산실, 작가의 산실로서 이름만이라도 명맥을 이었으면 좋으련만

고깃집으로의 변신은 매우 안타까웠다.

 

 

척박했던 시절, 그래도 <어우동>이라는 고전소설이

탄생한 자리가 아니던가.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면 문학작품과 관련된 명소들이 참 많다.

 

 

전남 장성에 가면 홍길동의 고향으로 알려진 홍길동 마을이 있고

강원도 봉평에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생가가 있다.

해마다 9월이면 메밀꽃 축제가 열려 전국의 관광객들이 몰려드는데

봉평은 문학작품을 가공해서

엄청난 관광수입을 올리는 본보기 마을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경기도 양평에 ‘소나기 마을’이 건립되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서 영감을 얻어

지은 문학 테마 파크이다.

거기에는 황순원 문학관이 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장면들을 재현해 놓았다.

소년이 소녀를 업고 건넌 징검다리, 오두막, 수수볏단 등이

소나기 마을 곳곳에 배치돼 있다.

 

 

사실 양평은 황순원 선생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런데도 선생의 문학관이 양평군에 들어선 것은

작품 속에서 소녀가 양평으로 이사 간다는

 말 한 마디 때문이라고 하니

약간의 억지가 가미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21세기는 문화의 시대, 그래서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문화의 고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렇게 안간 힘을 쓰는데

문학의 역사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능소원은

왜 그냥 버려두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각박할수록 스토리가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

그러니 이제라도 그 공간은 관할 구청인 강동구에서 사들여

인근의 일자산과 더불어 지역주민에게

문화와 휴식이 있는 쉼터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그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고기에다 청국장까지 먹고 나니 적당한 포만감에,

노소녀(老少女)들의 눈가에는 천진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배도 부르고 옆에는 나이 들어

세월을 함께 해준 고마운 벗들도 있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쓸쓸했다.

 

 

하긴 살면서 허허롭지 않은 날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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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라도 올 것 같은 잔뜩 흐린 날씨,

구미협의회에서 강의를 끝내고

터미널에 도착하여 동서울 행 차표를 끊었다.

 

 

출발 시간까지는 아직 40분의 여유가 있어

커피 한잔을 사들고 의자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다.

 

 

 

대합실 안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히터 주변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이들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빛바랜 주황색 의자에 앉아서

잔뜩 웅크린 채 TV만 보고 있었다.

 

 

겨울날 터미널 근처는 바람이 더 맵고 을씨년스럽다.

예전 같으면 난로라도 있어서 훈기를 더했을 텐데

넓은 대합실에 난방 기구라고는 작은 히터 한 대뿐,

냉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버스터미널에 가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있다.

특히 계절이 바뀌면 계절병이 도져 서울의 바짝 마른

회색 빌딩 숲을 떠나고픈 욕구를 주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떠날 때가 많은데

장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곳이 지방의 작은 도시여도 좋고 시골이어도 좋다.

한적한 어촌이면 더욱 좋다. 다만 혼자여야 한다.

남들은 청승맞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가끔씩은 일상의 치열함에서 한 걸음 물러나 생각을 정리하고 오면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요즘 힐링이 대세라는데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그러려면 외롭더라도 나 홀로 여행이 제격인데

처음이 어렵지 몇 번 시도하다 보면

혼자만의 여행에서 얻는 매력이 의외로 많다.

 

 

한편 터미널에 가면 꼭 누군가가 나를 찾아서

먼 길을 달려와 방금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나에게 달려올 것만 같은 생각도 든다.

 

 

하여 누가 온다는 약속도 없는데

괜스레 인파에 휩쓸리는 숱한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원초적인 본능이 아닐까.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되는 그 곳,

거기에는 행복한 여행도 있고

오랜만에 마주한 친지과의 설레는 상봉도 있겠지만

때로는 멀리 떠나는 가족을 배웅하고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터미널을 빠져 나가는 사람도 있으리라.

 

 

마침 내 앞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 한 쌍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각자 커다란 가방 하나씩을 갖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떠났다가 바로 되돌아 올 모양새는 아니었다.

 

 

가방의 크기로 봐서는 이박삼일이나 삼박사일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아님 해외여행?

뭐가 그리 좋은지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연신 웃음보를 터트리고

남자는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

 

 

찰랑찰랑하니 여자의 머릿결이 참 고와 보였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 함께 멀리 둘만의 여행을 떠나고 싶고

그리하여 함께 머물고 싶은 그런 간절함으로 손을 꼭 잡은 젊은 연인들.

 

 

겨울날의 오후, 칙칙한 터미널 분위기 속에서

청춘의 반란은 두드러져 보였다.

나에게도 저렇게 푸르른 시절이 있었나,

아무 근심 없이 해맑게 한껏 웃었을 때가...

 

 

미소를 머금고 젊은이들 사랑의 구경꾼 노릇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 껌을 팔아달란다.

70대 중반쯤 되었을까,

남루한 옷차림에다 깊은 주름살이 패어있는 할머니의 얼굴은

마른 검불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노란색의 쥬시후레쉬껌 한 통에 천 원이란다.

보아하니 개시도 못한 듯했다.

버스표 끊고 남은 잔돈 이천 원으로 껌 두 통을 샀다.

너무도 고마워하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보니 일전에 읽었던

오탁번 시인의 <해피 버스데이>라는 우스운 시가 떠올랐다.

 

 

해피 버스데이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해피 버스데이 투유!

 

 

실제 상황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훈훈해졌다.

다소 지루했을 40여 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드디어 탑승! 손님은 나까지 포함해서 고작 여섯 명.

서울 가는 기름 값도 안 될 적은 인원이었다.

승객이 적어서일까 기사는 얼어죽지 않을 만큼만 히터를 틀어주었다.

나는 외투를 단단히 여민 다음 팔장을 끼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위는 그런대로 견딜만했으나 발이 몹시 시려워 잠이 오질 않았다.

털장갑을 벗어서 발에다 꼈다.

구미에서 서울로 오는 세 시간 동안 나는 계속 그 자세로 있었다.

겨울이 점점 깊어가는구나...

버스가 구미 IC를 빠져 나오자

홍시 같은 노을이 천천히 서산마루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서울이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다시 일상이고 아파트 숲이다.

머릿속은 빠른 속도로 분주해지고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의 목록도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몹시 배가 고파서 당장은 밥 생각뿐이었다.

마중 나온 남편은 뭐라도 먹고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냥 가겠다고 했다.

어딘가 또 들러서 자리를 잡는다는 게 귀찮고 번거로웠다.

시간도 많이 늦었다.

“엄마, 아빠 어서들 오시와요!”

 

집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딸이 밥상을 차려놓았다.

메뉴는 뚝배기 불고기 일명 뚝불!

거기에다 막 썰은 포기김치와 구운 김이 전부였다.

아까 남편이 밥 먹고 들어가자고 했을 때

나는 식당 밥이 아닌 가정식 밥이 먹고 싶었다.

아침은 씨리얼, 점심은 수강자들과 스파게티를 먹었으니

쌀밥에 고기반찬이 반가울 수밖에.

 

 

<춘향전>에서 한양에 과거시험 보러 갔다가

상거지 차림으로 돌아온 이몽룡이 월매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밥아, 너 본지 오래다.” 하며 아귀아귀 먹던 그 장면,

내가 꼭 그 꼴이었다.

 

 

밥 한 공기에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나니

지친 몸과 마음에 다시 에너지가 차오르고 생기가 돌았다.

날마다 먹는 밥이지만 확실히 밥처럼 신축성이 강한 음식은 없는 것 같다.

 

 

사실 이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남편한테서 온

문자메시지가 생각났다.

‘결혼기념일 축하해요.

우리 앞으로 더 사랑하고 행복하게 삽시다!’

생전 문자메시지라곤 ‘그래’ ‘알았어’ 같은

단답형이 고작이었는데

글쟁이 마누라를 두시더니

어느 새 이런 수준급(?) 모국어까지 구사할 수 있다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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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녀 지우가 탈장 수술을 받고난 후

처음 병원에 가는 날이다.

오늘의 미션은 배에 차있는 물을

주사기로 뽑아내는 일.

 

 

그런데 병원에 대한 두려움이

큰 두살바기 아기가 침대에 얌전히 누워서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

나는 가기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회사에 반차를 내고 오겠다던 딸은

사정이 있어 못 오고

양쪽 할머니(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나서야 했다.

그래서 불안이 더 컸다.

 

 

 

 

딸은 계속 문자를 보내왔고

의사에게 물어보라는 주문도 많았다.

아이가 왜 갑자기 먹는 양이 줄었는지,

이제 통 목욕을 시켜도 되는지,

수술부위 매듭은 저절로 없어지는지 등등...

아마도 워킹맘들이 가장 가슴 아플 때가 이런 때이리라.

 

 

아무리 사회적 소신이 확고한 엄마들이라도

이렇게 아이가 아플 때에 함께 해주지 못한다는 시점에서는

갈등과 회한 속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아무튼 걱정을 해도 병원엔 도착했고,

담당의사의 수술 관계로 진료는 예약된 시간보다 30분 이상 늦어졌다.

한창 걸음마에 재미를 붙인 아이가 가만히 앉아있을 리가 없다.

고 짧은 다리로 종종거리며 병원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가 저를 쳐다보는 어른들에게는 빠이빠이 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이날 소아과 외래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힘없고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우리 지우가 제일 발랄해 보였다.

 

 

세상에 나온 지 이제 겨우 1년4개월,

아이의 인지구조에는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믿음이 굳게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누구든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애착형성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서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만 3세까지 형성된 안정된 애착형성이 평생을 간다고 하지 않던가.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그런데 병실 문을 채 들어서기도 전에

아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한다.

자지러지듯 우는 아이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두 할머니는 같이 우는 형색이었는데 의사는 아무 표정 없이

간호사에게 물 뽑을 주사기를 가져오라고 주문한다.

그때 안사돈이 말했다.

 

 

“선생님, 오늘 꼭 물을 빼야 하나요?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그러시겠어요? 그럼 일주일 후에 다시 나오세요.

그동안 물이 몸 안으로 조금씩 흡수될 수도 있으니까요.”

의사는 선선히 허락했다.

나도 안도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아이가 너무 가여워서 다음으로 미뤘는데

 마음 약한 할머니들이 일처리를 야무지게 못했다고

혹시 딸이 뭐라 하지는 않을까.

만일 딸이 같이 왔다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하라고 했겠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병실 문을 나서니 아이는 언제 그랬냐 싶게 다시 명랑해졌다.

울음 끝이 짧은 아이,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눈을 닦아주고

바나나 한 개를 까주었더니 단숨에 먹어치운다.

 

 

곁들인 우유 한 병도 원샷! 그리고는 몇 개 안 되는 앞니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다.

너무 귀엽다.

세상 어느 화가의 어떤 그림을 가져다 놓아도

이만큼 행복하고 평화로운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모유를 먹어서인지 한 점 물살이라곤 없는

탱탱함으로 똘똘 뭉친 작은 아이, 제 어미를 쏙 빼닮았다.

되돌아 온 자리는 어디던가, 내 작은 몸으로 낳은 딸이

또 딸을 낳아 이렇게 세월의 산맥을 이루었구나.

 

 

요즘 와서 지우 덕분에 미소 짓는 날이 많아졌는데

아이와 함께 책 볼 때가 더욱 그렇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한다면 틀림없이

총명한 아이가 될 거라는 믿음 때문에

갓난아기 때부터 책을 통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고 싶었다.

 

 

다행히 아이는 책 보는 시간을 좋아했다.

책 볼 때만큼은 집중력을 발휘하여 다 읽을 때까지 지그시 앉아 있는다.

또 어떤 책을 가져오라고 주문하면 제 책이 꽂혀있는 곳으로 가서

그 책을 용케도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벌써부터 책을 밝히다니, 우리 지우는 천재인가 봐!”하며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지우의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죤 두이의 ‘공유된 경험’이 참으로 중요한 개념임을 깨닫는다.

지금은 모든 학습이 반복된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이니까...

그래서 오뉴월 하루 빛이 무서운 아이 시절에 가슴 속 환희를 공유하는 기쁨을

지우와 더 많이 나누고 싶다.

 

 

지우가 빨리 커서 공원도 가고 전시회도 가고 연극도 함께 보러 가는 날을

나는 손꼽아 기다린다.

어차피 제 엄마는 직장에 가서 할 수가 없을 테니

그 역할을 할머니가 맡을 수밖에.

그런데 아침에 엄마가 회사에 가고난 후부터 저녁 퇴근시간까지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따라 다니고는

저녁에 엄마가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는 시점부터 잠들기 전까지는

 제 엄마만 쫓아다닌다.

 

 

할머니는 안중에도 없다.

역시 엄마는 엄마다.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은 퇴근 시간과 맞물려 무척 복잡했다.

그러나 추운 거리의 어수선함과는 상관없이

지우는 친할머니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외할머니의 품에 안겨 동요메들리를 즐기고 있었다.

 

 

가끔씩 율동(?)도 곁들인다.

그런 귀염둥이 손녀를 안고 있는 나는

온기 가득한 난로를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아플 때 옛날에는 친정어머니가

 ‘네 배는 똥배, 내 손은 약손.’ 하면서 배를 문질러 주셨는데

아이의 수술 부위가 하필이면 배꼽자리인지라 그도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지우에게 속삭여 주었다.

“지우야, 세상은 경이롭고 신기한 것 천지란다.

그래서 끊임없이 도전하며 사는 거란다.

두드려보고, 눌러보고, 던져보고, 밟아보고, 하고 또 하고 해도 해도 또 하고 싶은...

하지만 병원 가는 일은 도전 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크렴. 힘내라 아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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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인데도 식구들이 다 나가고

혼자 있게 되니 무료했다.

남편은 새벽같이 강원도 홍천으로 놀러갔고

딸은 해외 출장 중이었다.

 

 

따라서 더 이상 나갈 사람도 없고

올 사람도 없는 이 시간.

늦잠이나 잘 요량으로

다시 침대 속으로 향하는데

때마침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언니! 나야, 다행히 집에 있었네.

 나, 다음달 12일 한국에 다니러 갈 거야.”

“그래? 잘 됐다.”

 

 

싱가포르에 사는 여동생의 전화였다.

곧 여름 방학을 맞는 두 아들과 함께 와서

시어머니가 계시는 수원에 머무를 것이며,

이번에 와서 꼭 해야 할 일,

그리고 선물은 무얼 사가면 좋겠냐는 등

꽤 긴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 밀려오던 잠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아무리 무료해도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할 필요까지는 없는 터라

찌뿌둥한 몸을 집안 일로 풀기로 하고 청소와 빨래부터 해치웠다.

 

 

 

 

 

아이들 방에 이불과 침대보까지

다 벗겨내서 세탁기를 두 번이나 돌렸다.

혹시 동생네 식구가

며칠 자고 갈지도 모르니까

 침구 정리는 미리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곤 쇠고기를 듬뿍 넣어 끓인 떡국으로

혼자만의 아침상을 차렸다.

반찬은 배추김치와 동치미가 전부였지만

부유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셨다.

 

 

혼자 마시는 커피는 더욱 향기로웠다.

커피를 마시면서, 음악을 들으면서,

잠시 여유롭고 격조 높은(?) 분위기에 취해 있다가

불현듯 누군가에게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그래, 어머님한테 편지를 쓰자.’

 

 

제주도에 사시는 어머님은 이사한 우리 집에 처음 오셔서

무엇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셨는지 4박 5일 동안

있는 듯 없는 듯 계시다가 가셨다.

팔순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호기심에다

 말씀도 재미나게 잘 하셔서 늘 이야기보따리가 풍성했던 분이신데,

끼니때가 되면 차려놓은 밥만 말없이 드실 뿐 도통 말이 없으셨다.

 

 

‘내가 뭘 잘못 했나?’ ‘이사 와서 새롭게 장만한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거슬려서

그러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매일 수업해 가면서

혼자 이삿짐 꾸리느라 동분서주했건만 애썼다는 칭찬 한마디 없이

입 꽉 다물고 계신 어머니가 야속했다.

대화가 끊긴 채 한집에서 며칠을 지내자니

마치 사포 같은 것에 긁힌 듯 마음이 쓰라렸다.

 

 

시동생과 어머님이 제주도로 가시고 난 후

곧 바로 편지를 썼다.

이사하게 된 배경과 자금내역을 상세히 썼고

아울러 어머님이 무엇 때문에 그리 언짢으셨는지,

그간 불편했던 내 마음을 글로 정리해서 부쳤다.

 

 

물론 이런 내용들은 어머님이 우리 집에 계시는 동안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말로 하면 감정이 실려 차분한 대화가 힘들 것 같아

문자언어로 대신했다.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내 판단일 뿐,

이번에는 별로 유쾌한 내용이 아닌

편지를 받고 난 후의 어머님 반응이 염려스러웠다.

 

 

2주 후, 검정색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지 세 장 분량의 긴 답장이 제주에서 날아왔다.

거기에는 어머님이 오해하셨던 부분도 들어 있었고

당신의 지난날의 아픈 회상도 담겨 있었다.

없는 집에 맏며느리로 시집 와 고생 많았다는 이야기도 처음으로 하셨다.

 

 

그리고 사연 끝에다 그 동안 서로 앙금처럼 남아 있었던

섭섭한 마음일랑 다 잊자는 당부의 말과 함께

‘사랑한다!’는 말도 몇 번이나 덧붙이셨다.

 

 

코끝이 찡했다. 역시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말보다 글의 힘이 컸다.

만일 마주보고 이야길 했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그토록 쉽게 할 수 있었을까?

 

 

살다보면 이렇게 꼬이고 꼬인 매듭 같은 시간을 건너야 하는 일도 있는 법,

결국 그때의 일은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돼 이름다운 이해로 끝났다.

사실 내 편지를 받고 어머님이 더 노여워하지는 않으실까 걱정도 많이 했는데

다행히 며느리의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하여

 답장까지 보내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오랫동안 봉사하신 경험도 작용했던 것 같다.

생전 처음 받아본 어머님의 편지글.

황해도 해주에서 여고를 졸업하신 어머님의 글 솜씨는 훌륭했고 감동적이었다.

남편 말대로 글공부를 계속하셨다면 아마 박완서 못지않은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답장을 받고 나서 이젠 어머님께 가끔씩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화보다는 따뜻하고 정감이 있는 그런 편지를.

인터넷이 일반화 된 요즘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메일이나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글을 쓰고 읽지만

글을 써야 한다는 절박함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속도감이 없어서인지 편지 쓰기는 점점 실종되어 가는 느낌이다.

 

 

편지를 다 쓰고 나서 TV 요리 시간에 소개된 ‘해물완자 전골‘을

만들기 위해 장보기를 했다.

보기에 재료와 요리법이 간단하면서도 푸짐해 보였다.

음식을 만들면서 언뜻언뜻 부엌 창문으로 지나가는 사람 구경도 하고

김치 볶음밥도 만들어 먹었다.

 

 

저녁엔 삶은 고구마로 식사를 대신하고

좀처럼 진도가 안 나가는 책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를 집어 들었다.

역시 더디다.

베란다 화단 옆 의자에 앉아 책을 건성으로 읽다가 장미꽃과 눈이 마주쳤다.

장미꽃에게 착하다는 눈인사를 해주었다.

게으름 피지 않고 주어진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자기 할 일을 다 했으니 말이다.

 

 

예쁜 꽃, 착한 꽃.

그런데 없는 솜씨 부려가며 만든 해물전골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은 왜 여태 소식이 없을까?

아무도 없는 텅 빈집에서 세끼 밥 다 찾아 먹고

빨래와 청소하고, 전화 받고, 편지 쓰고, 인터넷하고...

혼자 있는 시간은 길고도 풍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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