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유감

|함수연| 만남 2014.08.18 11:37

말복과 입추가 지나고 전국의 학원이나 어린이집 방학도 거의 끝났다.

지칠 줄 모르고 자지러대던 매미울음도 한결 잦아든 걸 보면

그동안 만원사례였던 전국의 피서지도 한산해지리라.

올해는 장마가 실종되고 연이은 폭염주의보에다 태풍예보까지 겹치니 다른 해보다

유독 여름이 길게 느껴진다.

 

 

 

 

온몸을 덜덜 떨며 하루에도 몇 번씩 찬물을 뒤집어쓰고 나오지만

 그때 뿐, 자리에 앉자마자 등 고랑엔 어느새 뱀처럼 굵은 땀줄기가 스멀스멀 흘러내린다.

나는 원래 땀을 잘 안 흘리는 체질인데 농사일하면서부터 땀구멍이 열렸는지

아니면 갱년기 증상이 뒤늦게 찾아온 건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줄줄 땀이 난다.

더구나 이번 여름에는 완성해야 할 원고가 잔뜩 밀려 있어

진도도 안 나가는 글을 붙들고 있노라니 ‘죽을 맛’이란 게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항시 TV 속 피서 행렬을 피하여

남들이 다 다녀온 후에나 떠나는 한적한 여행을 택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상 식구들이 다 뿔뿔이 흩어져 각자 휴가계획을 잡게 되었다.

나는 싱가포르 사는 여동생이 9월 초에 한국에 와서 삼 주 간 머무른다고 하여

그때쯤 네 자매가 함께 철지난 바닷가로 떠나볼까, 생각중이다.

 

 

식구들이 함께 휴가를 못간 더 큰 이유는

미국 사는 조카가 국내에 인턴사원으로 근무하게 되어 7월 한 달간 우리 집에서 출근을 했기 때문이다. 며칠에 한 번씩 하던 빨래와 와이셔츠 다림질을 매일 해야 했고 입이 짧은 아이를 위해 마트도 더 자주 드나들 수밖에 없었으니, 여름 손님은 호랑이보다도 무섭다는 말을 톡톡히 실감했다. 거기에다 먼데서 손님이 두어 차례 다녀갔으며 주말에는 그 알량한 농사짓는다고 농장에 틀어박혀 있으니 남는 시간이라야 밤 시간뿐이었다. 그래서 더위도 더위지만 그보다는 할 일을 못한데서 오는 압박감이 나를 더 숨 막히게 했던 것 같다.

 

 

하루 종일 찬 음식을 찾고 선풍기는 아예 끼고 살았는데

그럴수록 짜증만 더해져, 결국 나중에는 다 포기하고 그냥 더위를 즐기기로 했다.

조카가 인턴 근무를 마치고 돌아간 후 나는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갔다.

약속은 물론 동네 마트에도 안 갔다. 필요한 건 남편과 딸에게 전화로 부탁했다.

막상 일주일을 꼼짝 않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더워죽겠다고 모두들 비명을 질러대도 34도의 폭염이

그다지 못 견딜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틀지 않은 채, 책상에 앉아 자판기를 두드리면서

등줄기가 땀으로 얼룩지는 것을 참고 있노라면 일종의 자학적인 쾌감마저 느껴졌다.

아예 천둥벌거숭이가 되기를 작정하고 한 가지 일에 힘을 쏟으니 오히려 몸과 정신이 가벼워지면서 마치 집에서 극기 훈련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마음먹으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더위를 피하려고 전전긍긍했던 일들이 너무나 바보짓 같았다. 어쨌든 두문불출한 덕에 새로운 글 두 편이 탄생되었으니 앞으로 얼마동안 더 이 상태로 지내도 좋을 듯싶었고 나름 성취감도 컸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부채 하나만으로도 거뜬히 났던 여름 날씨를 지금에 와서

더 못견뎌하는 이유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과학적으로는 지구온난화현상 때문이라고 말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참을성 부족에서 오는 현상 같았다.

 

 

길을 나서면 냉방이 잘된 버스와 전철이 있고

집에서도 에어컨이며 선풍기며 다들 갖추고 있으니 더위를 느낄 겨를이 없어

참을성도 그만큼 적어진 탓이 아닐까.

 

 

또한 여름을 건강하게 나기 위해서는 충전이 필요하며

그래서 휴가 여행은 필수라고 ‘여행을 떠나요!’를 외치며

한꺼번에 떠나는 풍토, 그것도 될 수 있으면 되도록 멀리, 해외여행이면 더 좋고...

 

 

휴가라고 해서 소비를 하고 비행기를 타야만 충전이 되는 것은 아닐진대,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여름 인사는 “휴가 잘 다녀오셨습니까?”로 변하고 말았다.

피서철 한꺼번에 요란하게 나서서 교통체증에다 관광지의 바가지요금 등 길 위에다

많은 돈과 시간을 뿌리고 와서도 여행만 다녀오면 정말로 충전이 되고 행복해지는 걸까?

 

 

사실 여름의 맛은 더운데 있는 게 아닌가, 누가 그랬다.

여름은 견디는 계절이라고.

일단 무조건 견뎌야지 아니면 하늘의 더위와 내 속의 더위가

스파크를 일으켜 불상사가 날지도 모른다고...

내가 겪어보니 지금의 이 더위를 지그시 견디며 물러나 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괜찮은 여름나기의 한 방법이리라.

제 아무리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머지않아 서늘한 가을바람에 자리를 내주게 되니까 말이다.

 

 

지나고 보면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

계절의 변화 또한 영원히 지속되지 못한다는 자각만으로도

 이 여름이 소중하게 느껴질 터.

하긴 유한성(有限性) 앞에서 소중하지 않은 게 어디 있으랴,

마음이 하늘을 만들고 축생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고 하니

더위를 이기는 것 역시 마음먹기 나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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