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김경집| 완보완심 2013. 10. 4. 13:56

 

아직 달이 완전히 꽉 차진 않았지만 이미 휘영청 밝은 가을밤입니다.

수연재 창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에도 꼬리를 문 전조등과

후미등의 불빛이 이어집니다.

 

 

 

멀리 그리고 오래 떨어져 있다가도 이렇게 한 날을 잡아 모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바람 등을 나누며

모처럼 한 솥의 음식을 먹는 명절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런 초가을 밤입니다.

 

 

예전과 달리 교통수단이며 통신시설이 있어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연락하고 오갈 수 있지만

이렇게 무모하게(?) 고향으로 달려가는 건 참으로 대단한 일이지요.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두보(杜甫)의

 <<악양루에 올라(登岳陽樓)>>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고향인 장안 일대가 적의 여전히 적의 점령하에 있어서

가지 못하는 애절한 심정을 담았지요.

 

 

만년에 가족과 헤어져 장강을 정처 없이 떠돌다

우리의 추석에 해당하는 중양절에 지었던

<<등고(登高)>>는 절절하게 애잔합니다.

 

 

그 시가 중국의 시 가운데 최고의 반열에 오른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담겨진 그의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더욱 다가옵니다.

예전에는 그저 시험공부로 배웠을 뿐 정서적 공감은 솔직히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시심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습니다.

 

<<두시선집>>을 읽다가 한 수를 읽어봅니다.

 

 

못 가는 고향

 

강물이 푸를수록

새하얀 물새

청산엔 타는 듯

붉을 꽃떨기...

 

이 봄도 그렁저렁

가고 있는 걸

이 몸은 어느 해나

돌아가련고?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불과 스무 자 한 자 한 자마다 꾹꾹 눌러 담긴

곡진한 사연과 애절함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그리고 행간마다 서린 깊은 속내의 절절함이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고향을, 부모를, 동기간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를 상실하는 것이고,

그래서 늘 자신을 다잡고 보듬는 원형의 자궁을 본성적으로 그리워하는 것이겠지요.

 

 

여우도 제 고향을 바라보며 머리를 둔다지요.

우리의 수구초심(首丘初心)도 유전자 속에 이미 깊이 내재된 모양입니다.

그곳에서 자랐건 그저 부모님의 고향이건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이며

고향집이 주는 독특한 가족사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명절이 주는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어머니까지 지난해에 돌아가신 뒤

명절이 주는 느낌은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정서로 다가옵니다.

언제든 통화할 수 있었고,

 당신이 몸 져 누우시고 귀도 어두우셔서 통화는 하기 어려워도

 아무 때나 달려가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어머니가 떠나신 후

이제 당신의 묘에 가야만 만날 수 있게 되니 이전의 추석이나 성묘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지난 주말에 형제들 모여 소분(掃墳, 흔히 벌초라고 하는)을 했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선산 지키시던 작은아버님이 해주셨고,

돌아가신 뒤에는 사람을 사서 했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하기로 했습니다.

 

 

예초기를 준비하긴 했지만 묘에 오르는 길목 주변에 잡목이 자라서 길부터

정비해야 했기에 모두 도회의 손방들인 우리 형제들은 겁이 나서

예초기는 아예 차에 모셔두고 낫을 들었습니다.

 

 

솔직히 낫질이라곤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으니

요령보다는 힘으로 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다행히 둘째형님이 낫질을 잘해서 아마도 절반 이상을 했을 겁니다.

 

 

그렇게 산에서 부모님을 뵙는 소회가 애잔했습니다.

이제는 그곳에 가야만 뵐 수 있습니다.

보듬고 쓰다듬던 손길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으로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어떤 교통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부모님의 존재는 당신들이 기거하시는 곳이 아니라

당신들과 마음과 뜻이 통하고 이어지는 곳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둔한 저는 그것을 어떤 물질적 공간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90 평생을 늘 당신 자식들 걱정하고 기도하시던 어머니가

이젠 쉰 중턱 어느 결에 넘어선 아들의 가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아, 부모가 바로 고향임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이제 더 이상 계시지 않는데도 그 먼 길 달려가는 건

이젠 당신의 혼령이 머무는 그 곳이 바로 고향 자체임을 알았던 거지요.

 

 

물질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 공간이 훨씬 더 너르고 깊다는 걸

어찌 미욱하게 이제야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묫길에만 만날 수 있다는 좁은 소견으로 어찌 이 세월 살아왔는지

참 부끄럽고 어리석습니다.

 

 

어쩌면 이것도 나이가 들어가는,

애들 눈으로 보면 늙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하겠지요. 너무 일찍 그걸 알고 느끼면서 어찌 정신없이 살아 갈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모두 제 나이에 걸맞게 깨닫고 느끼며 살아가라고

그렇게 절묘하게 시간의 칸을 질러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추석 한가위 명절이라 해도 흥분이나 설렘은 없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를 뵐 수 있으니 이미 마음은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적당히 선선하고 맑은 가을바람이 은근쩍 소슬한 기운까지 들먹입니다.

길고 맵던 여름 무더위 때는 이 시간이 올까 싶더니

그래도 제 시간 맞춰 물러가는 겸손은 갖췄습니다.

 

 

저 또한 그런 겸손과 너그러움을 이 가을에 배워야겠습니다.

휘영청 꽉 찬 보름달에 아직은 테두리 하나쯤 덜 찬 달이지만 그 빛은 교교합니다.

그 달빛 쏟아지는 읍성 한 바퀴 거닐며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모든 이의 마음에 고향이 주는 푸근함과

너그러움의 위로가 지친 삶의 피폐함을 덜어 내주는 그런 명절 밑이기를 빌어봅니다.

 

 

여전히 꼬리를 물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행렬 위에도 부드러운 달빛이 쏟아집니다.

그 달빛 가득 안고 세세히 빚어 가으내 우리 모두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달빛이 참 곱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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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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