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백

 

현대사회의 잘못된 프레임 때문에 자신감 상실한 아버지 갈수록 늘어
자신을 믿을때 좋은 부모 될 수 있어

 

 

 

 

 

 

경북의 산골 중학생이었던 A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짬짬이 공부를 했다. 어느 여름날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벌컥 방문이 열리면서 성난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뙤약볕에서 애비는 죽어라 일하고 있는데, 아들이란 놈이 방구석에서 책이나 보고 있다’며 A가 보던 책들을 부엌 아궁이 속으로 던져 버렸다. 며칠후 A는 염소를 몰고 풀먹이러 나갔다가 염소를 나무에 묶어두고 냇가에 가서 멱을 감고 놀았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염소가 온데간데 없었다. 온 산을 헤맸지만 결국 못찾고 해질 무렵에야 털레털레 집으로 향했다. 불호령을 각오한 A에게 아버지는 말없이 이순신 장군이 그려진 오백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다. “니 오늘 마음고생 많았제? 맛있는 거 사 묵으라!”

A는 지금도 돈독한 부자유친을 유지하고 있는 선배이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퇴근후 강의실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비벼가며 아빠 교육을 받던 젊은 아빠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A의 아버지가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로서의 기상은 충만했던 것 같기 때문이다. 왠지 자신감이 없고, 아이들 눈치보기에 바쁜 요새 젊은 아빠들과 달리 말이다.

오늘날 아빠들이 기백이 약해진 이유가 뭘까? 아버지 노릇에 대해 잘못된 프레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프레임1은 ‘아버지를 자식을 위한 수단적 존재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식을 먹여살리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오는 도구로만 인식하다보니 속빈 강정처럼 자아를 잃어간다. 물론 가족을 등따시고 배부르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자 최고의 보람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란 하나의 역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남자에게는 아버지 외에도 수많은 다른 이름이 있다. 다이아몬드를 평면으로만 깎으면 전혀 아름답지 않다. 수많은 각도의 컷(cut)에서 다이아몬드의 영롱함이 나오는 것이다. 아버지의 실존적 삶이 풍성해질 때 아버지 노릇도 살아나지 않을까?

게다가 아버지가 수단적 존재에 머물 때 아버지 노릇은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은 노동이 된다. 희생 정신과 의무감으로 각오를 다져야 한다면 ‘자연산 좋은 아버지’는 나오기 어렵다. ‘희생정신으로 약 먹듯이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는 ‘미소지으며 자식을 대하는 아버지’를 결코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잘못된 프레임2는 ‘돈으로 아버지 노릇을 잘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다. 아버지노릇이란 백화점에서 카드 긁고 척하니 걸칠 수 있는 기성복이 아니며, 백화점 식당가로 올라가서 호기롭게 주문하는 코스요리도 아니다. 돈을 쓰면 쓸수록 다른 누군가가 아버지 노릇을 대신하게 된다. 영혼과 사랑이 결핍된 그리고 상혼에 물든 그 어떤 사람들에 의해 말이다. 아버지와 아이들도 그걸 느낀다. 그래서 돈으로 아버지노릇을 사는 아버지들은 아이들과 뒹굴면서 몸으로 때우는 아버지들 앞에 서면 왠지 켕기게 된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와서 처음 하신 말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었다고 한다. 혼자 잘났다는 의미로 흔히 인용되고 있지만, 부처님이 독선을 말씀하셨을 리는 없다. 다른 존재에 기대어 비로소 내가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홀로 있더라도 존귀한 존재라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그러니 가족을 위해 자신을 불태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한걸음 물러나자. 돈을 벌어다 주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기죽지도 말자.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자는 게 아니다. 오히려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라도 먼저 자기자신이 충만해지자는 거다.

문득 아버지 우상화를 외치던 친구가 생각난다. 아들 둘을 둔 그는 집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고 있고, 끊임없이 ‘아버지 우상화’ 작업에 힘쓴다고 농반진반으로 말하곤 한다. 언제 그가 가진 아버지로서의 기백에 대해 찬찬히 들어보고 싶다.


김혜준 아버지다움연구소 소장

 

 

 

 

 

출처 경상일보

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1270 

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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