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의 산실, 능소원
|함수연| 만남 2013. 3. 11. 15:41
스터디 모임을 마친 후 강동구 둔촌동에 위치한
‘도원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장소 선택은 내가 했다.
일전에 남편과 함께 갔다가 문이 닫혀 있어
헛걸음질 한 경험이 있기에
언젠가 다시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참이었다.
다섯 명의 일행과 함께 찾아간 그 식당자리는
소설가 부부의 살림집이자 방기환 선생의
그 유명한 고전소설 <어우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밥을 먹으러 갔다기보다는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가게 된 것이다.
보훈병원 정문 왼쪽 켠에 자리한 이 식당은
한때 ‘능소원’이라는 이름으로
방기환과 그의 아내인 소설가 임옥인 선생이
20년 넘게 살던 집이었다.
우리나라 소설가 1세대에 해당되는 이들 부부는
아내가 남편보다 14살이나 연상이었고
문단에서는 내로라하는 잉꼬부부로,
로맨티스트로 통했다니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부부는 능소화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기 집 호를 능소원이라 지었고 집 주위를
능소화로 뒤덮었다고 한다.
또한 <어우동> 소설에 등장하는 기생 이름도 능소화였으니
이들 부부의 능소화 사랑이 어떠했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장마철에 등처럼 환한 능소화가 온 집을 밝힌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작가의 집 ‘능소원’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도 유명했다.
70년대 초, 방기환은 저작권료로 받은 돈으로
당시에는 꽤나 변두리인 서울의 동쪽 끝 둔촌동에
땅 천여 평을 사서 갖가지 나무와 화초를 심고
한쪽 마당을 잔디밭으로 만들어 문우들의
세미나나 토론장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가끔씩은 문단의 가난한 후배나 제자들이
그곳에서 결혼식도 올렸단다.
그런데 동네에서 작은 공원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던 이 집은 보훈병원을 지을 때
길을 내느라고 집 앞 절반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1993년과 1995년 작가 부부가 차례로 세상을 뜬 후,
능소원은 대중음식점으로 탈바꿈했다.
처음에는 콩나물국밥집이었다가 다시
‘도원 식당’이라는 고깃집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나는 신혼 초부터 둔촌동에서 오래 살았기에 이렇듯
능소원의 영욕의 세월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전에 콩나물국밥집일 때는 몇 번 드나들었지만
고깃집으로 바뀐 후에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내가 1980년 초반부터 둔촌아파트에 살았으니
능소원의 실체를 진작에 알았더라면 오며가며 내가 좋아하는 꽃,
능소화를 실컷 보고 혹여 그들 부부와도 마주치지는 않았을까...
그곳은 우리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번씩 가는 약수터길 중간에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했을 것 같다.
류시화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 제목이 다시금 떠오른다.
식당주위는 겨울이라 삭막함이 더했고
월요일 저녁이라서 손님도 없었다.
게다가 언제 손을 봤는지 식당 입구 아치형의 철 대문은
녹이 잔뜩 슬어서 ‘여기가 정말 능소원 자리가 맞나?’ 싶었다.
능소화의 전설만큼이나 애틋한 능소원.
문학의 산실, 작가의 산실로서 이름만이라도 명맥을 이었으면 좋으련만
고깃집으로의 변신은 매우 안타까웠다.
척박했던 시절, 그래도 <어우동>이라는 고전소설이
탄생한 자리가 아니던가.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면 문학작품과 관련된 명소들이 참 많다.
전남 장성에 가면 홍길동의 고향으로 알려진 홍길동 마을이 있고
강원도 봉평에는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생가가 있다.
해마다 9월이면 메밀꽃 축제가 열려 전국의 관광객들이 몰려드는데
봉평은 문학작품을 가공해서
엄청난 관광수입을 올리는 본보기 마을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경기도 양평에 ‘소나기 마을’이 건립되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서 영감을 얻어
지은 문학 테마 파크이다.
거기에는 황순원 문학관이 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요 장면들을 재현해 놓았다.
소년이 소녀를 업고 건넌 징검다리, 오두막, 수수볏단 등이
소나기 마을 곳곳에 배치돼 있다.
사실 양평은 황순원 선생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런데도 선생의 문학관이 양평군에 들어선 것은
작품 속에서 소녀가 양평으로 이사 간다는
말 한 마디 때문이라고 하니
약간의 억지가 가미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21세기는 문화의 시대, 그래서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문화의 고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이렇게 안간 힘을 쓰는데
문학의 역사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는 능소원은
왜 그냥 버려두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각박할수록 스토리가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
그러니 이제라도 그 공간은 관할 구청인 강동구에서 사들여
인근의 일자산과 더불어 지역주민에게
문화와 휴식이 있는 쉼터로 만들어주면 좋겠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그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고기에다 청국장까지 먹고 나니 적당한 포만감에,
노소녀(老少女)들의 눈가에는 천진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배도 부르고 옆에는 나이 들어
세월을 함께 해준 고마운 벗들도 있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쓸쓸했다.
하긴 살면서 허허롭지 않은 날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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