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라도 올 것 같은 잔뜩 흐린 날씨,

구미협의회에서 강의를 끝내고

터미널에 도착하여 동서울 행 차표를 끊었다.

 

 

출발 시간까지는 아직 40분의 여유가 있어

커피 한잔을 사들고 의자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다.

 

 

 

대합실 안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히터 주변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이들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빛바랜 주황색 의자에 앉아서

잔뜩 웅크린 채 TV만 보고 있었다.

 

 

겨울날 터미널 근처는 바람이 더 맵고 을씨년스럽다.

예전 같으면 난로라도 있어서 훈기를 더했을 텐데

넓은 대합실에 난방 기구라고는 작은 히터 한 대뿐,

냉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버스터미널에 가면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이 있다.

특히 계절이 바뀌면 계절병이 도져 서울의 바짝 마른

회색 빌딩 숲을 떠나고픈 욕구를 주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떠날 때가 많은데

장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곳이 지방의 작은 도시여도 좋고 시골이어도 좋다.

한적한 어촌이면 더욱 좋다. 다만 혼자여야 한다.

남들은 청승맞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가끔씩은 일상의 치열함에서 한 걸음 물러나 생각을 정리하고 오면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요즘 힐링이 대세라는데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그러려면 외롭더라도 나 홀로 여행이 제격인데

처음이 어렵지 몇 번 시도하다 보면

혼자만의 여행에서 얻는 매력이 의외로 많다.

 

 

한편 터미널에 가면 꼭 누군가가 나를 찾아서

먼 길을 달려와 방금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나에게 달려올 것만 같은 생각도 든다.

 

 

하여 누가 온다는 약속도 없는데

괜스레 인파에 휩쓸리는 숱한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어쩌면 이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원초적인 본능이 아닐까.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되는 그 곳,

거기에는 행복한 여행도 있고

오랜만에 마주한 친지과의 설레는 상봉도 있겠지만

때로는 멀리 떠나는 가족을 배웅하고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터미널을 빠져 나가는 사람도 있으리라.

 

 

마침 내 앞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 한 쌍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각자 커다란 가방 하나씩을 갖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떠났다가 바로 되돌아 올 모양새는 아니었다.

 

 

가방의 크기로 봐서는 이박삼일이나 삼박사일은 족히 될 것 같았다.

아님 해외여행?

뭐가 그리 좋은지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연신 웃음보를 터트리고

남자는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

 

 

찰랑찰랑하니 여자의 머릿결이 참 고와 보였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 함께 멀리 둘만의 여행을 떠나고 싶고

그리하여 함께 머물고 싶은 그런 간절함으로 손을 꼭 잡은 젊은 연인들.

 

 

겨울날의 오후, 칙칙한 터미널 분위기 속에서

청춘의 반란은 두드러져 보였다.

나에게도 저렇게 푸르른 시절이 있었나,

아무 근심 없이 해맑게 한껏 웃었을 때가...

 

 

미소를 머금고 젊은이들 사랑의 구경꾼 노릇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 껌을 팔아달란다.

70대 중반쯤 되었을까,

남루한 옷차림에다 깊은 주름살이 패어있는 할머니의 얼굴은

마른 검불처럼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노란색의 쥬시후레쉬껌 한 통에 천 원이란다.

보아하니 개시도 못한 듯했다.

버스표 끊고 남은 잔돈 이천 원으로 껌 두 통을 샀다.

너무도 고마워하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보니 일전에 읽었던

오탁번 시인의 <해피 버스데이>라는 우스운 시가 떠올랐다.

 

 

해피 버스데이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해피 버스데이 투유!

 

 

실제 상황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훈훈해졌다.

다소 지루했을 40여 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드디어 탑승! 손님은 나까지 포함해서 고작 여섯 명.

서울 가는 기름 값도 안 될 적은 인원이었다.

승객이 적어서일까 기사는 얼어죽지 않을 만큼만 히터를 틀어주었다.

나는 외투를 단단히 여민 다음 팔장을 끼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위는 그런대로 견딜만했으나 발이 몹시 시려워 잠이 오질 않았다.

털장갑을 벗어서 발에다 꼈다.

구미에서 서울로 오는 세 시간 동안 나는 계속 그 자세로 있었다.

겨울이 점점 깊어가는구나...

버스가 구미 IC를 빠져 나오자

홍시 같은 노을이 천천히 서산마루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시 서울이다.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니 다시 일상이고 아파트 숲이다.

머릿속은 빠른 속도로 분주해지고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의 목록도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몹시 배가 고파서 당장은 밥 생각뿐이었다.

마중 나온 남편은 뭐라도 먹고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냥 가겠다고 했다.

어딘가 또 들러서 자리를 잡는다는 게 귀찮고 번거로웠다.

시간도 많이 늦었다.

“엄마, 아빠 어서들 오시와요!”

 

집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딸이 밥상을 차려놓았다.

메뉴는 뚝배기 불고기 일명 뚝불!

거기에다 막 썰은 포기김치와 구운 김이 전부였다.

아까 남편이 밥 먹고 들어가자고 했을 때

나는 식당 밥이 아닌 가정식 밥이 먹고 싶었다.

아침은 씨리얼, 점심은 수강자들과 스파게티를 먹었으니

쌀밥에 고기반찬이 반가울 수밖에.

 

 

<춘향전>에서 한양에 과거시험 보러 갔다가

상거지 차림으로 돌아온 이몽룡이 월매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밥아, 너 본지 오래다.” 하며 아귀아귀 먹던 그 장면,

내가 꼭 그 꼴이었다.

 

 

밥 한 공기에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나니

지친 몸과 마음에 다시 에너지가 차오르고 생기가 돌았다.

날마다 먹는 밥이지만 확실히 밥처럼 신축성이 강한 음식은 없는 것 같다.

 

 

사실 이날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남편한테서 온

문자메시지가 생각났다.

‘결혼기념일 축하해요.

우리 앞으로 더 사랑하고 행복하게 삽시다!’

생전 문자메시지라곤 ‘그래’ ‘알았어’ 같은

단답형이 고작이었는데

글쟁이 마누라를 두시더니

어느 새 이런 수준급(?) 모국어까지 구사할 수 있다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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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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