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전국을 꽁꽁 얼어붙게 했던 동장군의
기세가 주춤해졌을 무렵 우리는 겨울 바다를 보러
동해안을 찾았다.
사실 겨울 바다를 찾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들뜨고 환상적인 일인데 오고 가는 여행길에서
문학적 감성까지 덤으로 얻는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나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남편의 의도는 나와 달리
상당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동해안 최북단 항구인 대진 항에 가서
새해에 못 본 일출을 볼 것이며
싱싱한 명태와 도루묵도 실컷 먹고
오겠다고 단단히 별렀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예상과는 달리 아무리 찾아도 명태와 도루묵은
보이질 않았는데 저녁을 먹으러 찾아간
식당 아저씨가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자기도 선주(船主)인데 명태 잡아본 지가
언제인지 모른다며 대진 항에 명태 씨가 말라버린 것 같다고
혀를 쯪쯪 찼다.
아, 남편의 실망스런 표정이란...
세 시간 넘게 달려오면서,
중간에 배고픈 것도 참고 오매불망 얼큰한 명태찌개만 떠올렸는데
현지 사정이 이렇다니 어쩌겠는가.
차선책으로 그 지역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백촌 막국수 집을 찾아갔으나
거기는 이미 영업시간이 종료된 상태.
“내일 다시 오세요!”라고 소리치는 주인 여자가 야속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다시 화진포로 와서
숙소를 잡은 다음 국수 한 그릇으로 대충 저녁을 때웠다.
항구에 어둠이 내리니 아무 것도 할 게 없었다.
그러니 다음 날 일출이나 기대할 수밖에.
이튿날 아침 7시 반이 조금 넘자 한겨울을 박차고
찬란히 솟아오르는 태양, 수평으로 쏟아지는 붉은 빛에
기(氣)가 똘똘 뭉쳐있는 느낌이다.
갑자기 내 가슴이 요동을 친다.
“야호, 너무 멋져! 장관이다!” 나는 함성을 터트렸다.
그런데 이렇게 흥분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그 차가운 바닥에 앉아서 오랫동안
땅과 해의 기운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성스럽기까지 했다.
저 광활한 우주 속에 내가 속해 있다는 걸 깨닫는 행복,
자연과 마주치면 누구든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없으리...
하지만 낭만적인 감상에 오래 잠겨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웠다.
부지런한 어선들이 아침 바다를 헤쳐 가는 풍경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차 안에서 잠시 몸을 녹인 후 서둘러 화진포 바닷가로 향했다.
산과 바다와 호수가 어우러지고 울창한 송림이 펼쳐진 곳.
호숫가 갈대들은 추운 탓에 보석 같은 얼음을 달고 있었고
갈대숲은 철새들로 넘쳐 났다.
백로, 청둥오리, 천연기념물 201호라는 고니까지.
산과 나무들 그리고 지나가는 시간마저도 호수로 빠져드는 듯했다.
화진포에는 한때 남북 최고 권력자들의 휴양지도 있었다.
1954년 지었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에는
그가 생전에 애용했던 물품들이 주인을 대신해서 자리 잡고 있었고
호숫가 맞은편에 있는 김일성 별장 입구에는 그의 가족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그 곳 역시 6.25전쟁 전까지 김일성 가족들의 여름 휴양지였다는데
전망만큼은 이 대통령 별장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았다.
3층 전망대에 올라서니 탁 트인
동해 바다와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히 바다를 향해 뻗어진 바위들의 기이한 파노라마가 절경이었다.
바람과 파도가 경연을 벌인 그것들은 전형적인 풍화 현상이 빚은
천연의 조각 작품이 아니던가.
둥글고 평화로운 것이 있는가 하면
각지고 날카로운 것,
벌집 모양을 이룬 것, 또 어떤 바위는 바닷물이 쳐서
그대로 얼어붙어 마치 하얀 띠를 두른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바람과 파도는 걸작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내 눈은 날씨와는 반대로 뜨겁기만 했다.
다음 여정은 건봉사. 대진 항이 동해안 최북단 항구였다면
건봉사는 민통선에 있는 최북단 사찰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민간 통제구역이었고
아직도 곳곳에는 철조망과 지뢰밭 표시가 있어 긴장감이 돌았는데
그래서일까 들어가는 절차도 꽤나 까다로웠다.
거기에는 사명대사 동상과 수많은 부도 탑이 있었고
오래된 절에서 풍기는 시간의 냄새가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건봉사가 유명한 건 부처님 진천사리를 만나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절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 진천사리는 사명대사가 일본까지 가서 찾아왔다고 했다.
절 입구에는 불이문(不二門)이라고 쓰여 있었다.
두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면 번뇌의 세계에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일까?
내 멋대로 해석하다가 남편에게 물으니 그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폭설이 내린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천지 사방에는 파란 하늘과 눈부신 설산뿐이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이 생각났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건봉사 주변은 그야말로 눈의 고장이었다.
인적 없는 평화로운 산사에서 역사를 회상하면서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자신을 돌아보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길들이 여러 갈래로 펼쳐져 있었는데
청정한 그 길이 우리에겐 상쾌한 산책로였지만 스님들에겐 참선의 길이었다.
마침 스님 한 분과 마주쳤다.
추운데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는 스님의 권유가 있었지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그냥 나왔다.
남편은 진작부터 와 보고 싶은 절이었는데 소원을 풀었다며 좋아했다.
유레카(eureka 찾았다는 뜻)라도 외치고 싶을 정도라고 한다.
버리는 자는 진정 평온을 얻는다고 잠시나마
내면의 욕망을 털어버린 듯했는데
그러나 남편은 아직도 명태에 대한 미련은
못 버린 듯 이번에는 거진 항으로 가잔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상 무리였다.
내가 우겨서 곧장 서울로 차를 몰았다.
남편의 아쉬움을 달래 주고자 중간에 원통 오일장에 들렀다.
제일 먼저 생선 파는 곳으로 갔으나 거기에도 생태는 없었다.
하여 생태 대신 동태를, 그리고 도루묵과 임연수를 샀다.
사실 겨울 바다 구경을 핑계로 해서
싱싱한 생선과 회를 먹겠다고 야심차게 달려갔건만
이틀 동안 우리가 먹은 거라곤 막국수와 순대국 한 그릇이 전부였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동태찌개에다 도루묵조림으로 포식을 했다.
막걸리도 곁들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은 본의 아니게 참 알뜰한 여행을 한 셈인데
남편은 건봉사 절을 찾은 것이 가장 큰 의미였다고 말한다.
나는 일출 본 것?
언제 어느 때 만나더라도
늘 신비로운 자연과의 교감!
벌써 남녘에는 봄이 움틀 준비를 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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