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동안 우리 집에서 서른 명이나 모여 큰 행사를 치렀는데 모두 떠나고 나서 보니 다른 때와는 달리 내가 뒤처리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빈집 고쳐 살기 실습을 한 것인데 이들이 걸레 하나까지 깨끗이 빨아서 널어두고 떠난 것이다. 나무 부스러기들도 잘 쓸어 담아 아궁이 앞에 모아 두었고 쓰던 장갑들도 하나하나 짝을 지어 통에 담아 놓았다. 마당에는 담배꽁초 하나 없었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다 쓰러진 시골집을 고쳐 세우고 앞마당에 황토 집을 한 채 지은 게 알려지면서 귀농해서 집을 짓고 살 사람들이 인연 따라 찾아 왔던 것이다. 내가 어머니와 같이 사는 모습에 더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토록 부산하던 집안이 한 순간에 고요해졌다. 가만히 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야생 황차를 만드시는 어느 선생님이 차와 함께 선물 해 주신 동요가수 이성원님의 음반이다. 김소월의 시를 김광수선생이 작곡한 '엄마야 누나야'를 들으면서 어머니 생각을 했다. '섬집아기'가 흘러나오자 왈칵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어머니 방에 나 혼자 앉아 있는 것이 너무 생소했다. 갈매기 울음소리를 듣고 불현듯이 떠오른 아기 생각에 차지도 않은 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서둘러 집으로 달려가는 섬집 엄마의 모습에 우리 어머니가 그대로 겹쳐보였다. 잠시 노인요양원에 가 계신 우리 어머니 말이다.

 

이번처럼 행사가 있거나 외부 강연을 나갈 때는 어머니를 잠시 요양원에 모신다. 두어 달 전부터다. 노인요양원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 때문에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지만 30여 분 거리에 있는 노인요양원을 이용 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가 있어서다. 그즈음 열흘 동안 멀리 호주로 노인요양 연수를 다녀오게 되었고 쇄도하는 강의요청과 바쁜 가을걷이로 떨어져 사는 아내와 서울의 형님을 수시로 불러내려야 했는데 우연히 아는 스님을 만나게 된 것이 발단이다.



초가을 볕이 좋았던 어느 날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를 나갔는데 지나가게 된 고장에 아는 스님이 계시기에 전화를 했더니 마침 읍내에서 손님들과 식사를 하는 중이라며 오라고 해서 함께 하게 되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앉게 되신 어머니가 표변하셨다. 어머니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스님의 모자를 어머니가 할퀴듯이 두 손으로 거머쥐고 집어 던져버렸다. 머리칼이 있었다면 쥐어 뜯겼을지도 모른다.

뭘 권해도 아무것도 안 드시겠다고 버티시더니 난데없이 단감을 가져 오라고 하셨다. 부랴부랴 근처 청과물가게를 뒤졌지만 9월의 상점에는 어디에도 단감이 없었다. 밥그릇도 엎어버린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되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어머니와 동갑이신 친 어머니를 오래 모시다가 작년에 하늘나라로 보내셨던 그 스님은 다음 날 전화를 걸어와서 간곡한 조언을 했다. 요약하면 두 가지다.

어머니 잘 모실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좋지만 다른 형제들이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끼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었고, 반 생태적인 환경이라 할지라도 어쩌면 어머니는 큰 아들 집에 있는 게 다른 자식들 눈치 안 보이고 더 마음이 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처럼 맏이가 아님에도 어머니를 모셨던 스님의 경험도 들려 주셨다. 조언 중 다른 하나가 노인요양시설을 가끔씩 이용하라는 것이었다. 벌써 4년째 어머니에게만 매달려 있는 내가 안쓰럽다는 것이다. 스님이 여러 해에 걸쳐 후원을 하고 있는 노인요양원이 있는데 신뢰 할 만 한 곳이라면서 소개 해 주셨다. 그 노인요양 전문기관이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았다.

 

날씨는 추워지는데 오줌 누신 옷을 거머쥐고 안 벗으려 하고 열흘이 넘도록 "아까 했는데 뭔 목욕을 또 하냐?"며 목욕을 한사코 거부하시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머리도 깎고 목욕도 하기위해 소개 받았던 요양원을 찾았다.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그 요양원의 원장선생은 젊고 활기차고 민첩한 여교무님이었다. 거침없이 농장일도 하셨다. 요양원의 분위기도 익히고 시설도 돌아 볼 겸 나는 요양원 곳곳을 다녔고 원장선생님과 체육실에서 탁구도 치며 놀았다.

일부러 오래 머물면서 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었다. 어머니 목욕도 내가 요양보호사 선생님과 같이 해 드렸다. 늘 가마솥에 끓인 물을 뒷방에 있는 욕조로 갖다 부어 목욕을 하다가 요양원의 따뜻한 욕실에서 샤워기로 철철 쏟아지는 온수로 목욕을 시켜드리니 내게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집에서 목욕 할 때는 어머니 기준이 들쭉날쭉 이다보니 물 온도를 맞추기도 쉽지 않고 온풍기와 전기 히터까지 켜 놓고 목욕을 하지만 춥다고 하시던 어머니도 요양원에서 하는 목욕이 만족스러웠던가 보다. 전혀 저항을 않을뿐더러 “그만하라.”는 고함을 치지도 않으셨다.

 

어머니가 생활하실 방과 거실도 따뜻하고 깨끗했다. 방 한편에 늘 쌓여 있는 어머니의 보따리 속에서 때로는 터져버린 홍시가 녹아내리고 뭉쳐 넣어 둔 떡에서 쉰내를 풍기기도 했지만 요양원 방에 있는 개인 물품 보관함은 깨끗하고 밝았다. 방구석에 쌓인 이불도 없었다.


나흘 만에 집으로 모셨는데 그동안 잘 잡수시고 머리고 깎고 목욕도 해서 한 눈에 보기에도 훤하셨다. 요양원에 대한 불평을 쏟아내셨지만 어머니는 여행지를 다녀 온 것처럼 새로운 생활체험 덕에 집에 와서는 상쾌한 나날을 보냈다. 노인 요양원이라는 특별한 나들이 장소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가을날의 특별한 나들이는 계속되었다. 장수군 곁에 있는 진안군에서 ‘마이산축제’를 하는데 안내장에 보니 서커스가 있었다. 잘 들지 못하시는 어머니는 눈으로 보는 것을 좋아하신다. 여러 차례에 걸쳐 기록영화인 ‘워낭소리’나 ‘차마고도’, 그리고 ‘동물의 왕국’같은 영상물을 재미있게 보셨는지라 서커스를 보러 가기로 했다. 어머니가 그리워하며 들려주시는 옛 이야기 중에 자주 등장했던 것 중에 하나가 서커스이기도 했었다. 아홉 살 땐가 외할아버지와 작은 외할아버지 틈새에 끼어 어머니가 봤다는 서커스는 그 즈음에 봤다는 포수에게 잡힌 호랑이 기억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커스 공연장에서 어머니는 옛날에 본 서커스 이야기를 하시느라 입을 잠시도 놀리지 않으셨다. 외발 자전거 타기나 재주넘기를 보면서 나는 손에 땀을 쥐었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옛날 재주꾼들이 더 잘 했다고 우기셨다. 거나하게 한 잔 걸친 동네 주민이 몇 사람 무대 앞에 나와서 추는 막 춤을 보고 어머니는 손뼉까지 치며 추임새를 넣기도 하셨다. 한갓진 나들이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가보다. 서커스 공연을 보고 와서는 여러 날 상태가 좋으셨다.


두 번째로 요양원에 갈 때는 우리 집을 찾은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 카페 회원 다섯 분도 함께 했다. 한나절 내내 요양원 농장에서 오미자도 따 드리고 요양원 할머니들과도 같이 놀아도 드렸다.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를 이길 사람이 없지만 그곳에서는 어머니의 고집과 독불장군식 행동이 통하지 않았다. 옷에 오줌을 실수하면 여지없이 옷을 갈아입혔고 밖에 나올 때는 기저귀를 채웠다. 휠체어도 식판을 팔걸이에 끼워 넣으면 손으로 바퀴를 함부로 만지거나 고정 장치를 조작 할 수 없다. 휠체어에 엑스자로 튼튼한 멜빵을 매 놓으면 휠체어에서 맘대로 내려 올 수도 없었다. 안전이 강화된 대신 자유는 묶였다.

 

요양원에서 노인들의 머리칼은 오로지 관리 대상이고 귀찮은 부속물에 불과했다. 가끔 일부러 미장원에 가서 멋진 미용사의 배려와 환대 속에 다듬었던 머리는 어머니의 존엄과 존중을 드높이기 위한 내 나름의 선택이었다. 이곳에서는 유도선수들처럼 깍두기 머리를 만들어 놓았다. 대신 밥과 새참의 시간과 영양은 정확했다. 생활공간의 온도도 외부 날씨와 무관하게 빈틈없이 설정된 수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요양원에서는 불가능 할까? 머리를 깎을 때도 여러 머리 모양을 보여드리면서 어르신들 스스로 선택하게 하면 안 될까? 옷도 단체복을 입지 않을 수 없을까? 낮이건 밤이건 오줌에 젖지 않는 이상 늘 같은 환자복만 입게 할 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면 잠옷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혀 드리면 안 될까? 아침마다 여러 일상복을 펼쳐 놓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것저것 집어 보며 옷을 골라 입게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 하루는 관리 당하는 하루가 아니라 온전히 주체가 되는 하루가 될 테니 말이다.

 

서커스도 초등학교 저학년 연령대 소녀까지 무대에 등장시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가혹한 훈련과 몸에 대한 혹사가 뻔히 보였다. 어머니도 보기에 딱했던지 오죽하면 "저 어린것들이 어미는 있나? 뼈다귀도 없는 것들이가?"라며 안타까워했을까.


집에 오면 며칠 되지 않아서 '은조네' 가자하시고 요양원에서는 집에 가자고 하신다. 똑 같은 밑반찬이 연이어 밥상에 오르면 먹던 걸 또 먹느냐고 반찬투정을 하시게 된 것도 요양원이라는 아주 특별한 곳으로 나들이를 하신 후로 생긴 어머니의 버릇이다.


한 번은 참으로 오랜만에 햇 들깨로 깨죽을 끓여 드렸더니 "아침에 먹었는데 또 깨죽이냐?"고 하시면서 '은조네' 은 끼니마다 다른 반찬이 나온다고 하셨다. 요양원에서 어머니가 옛날 고향 동네에 살던 '은조'라는 처자를 닮은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만났던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는 요양원을 '은조'라고 부른다.

요양원에서 집으로 돌아 온 날은 밤 새 은조네 흉보느라 여념이 없다. 두 년들이 양 팔을 붙들고 끌고 다녀서 멍이 다 들었다고 팔목을 내 보이시기도 하고 내일 모래면 다 땅 속에 묻힐 노인들만 모여 골골한다느니 불만을 털어 놓는다. 요양원 분들에게 물어 봤더니 요양원에서는 어머니가 내 흉을 본다고 했다. 아들 자랑을 하시다가도 한 순간에 아들 딸 흉을 보신다는 것이다. 특별한 나들이란 자랑과 흉보기가 공존 할 때 더 별미인가 보다.
 

 ........

글을 쓴 전희식 님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존엄성을 지켜드리자는 생각에 전라북도 장수의 산골에 내려가 함께 살며 그 경험을 《똥꽃》, 《엄마하고 나하고》에 담았습니다. 극진한 보살핌과 자연 속의 삶과 노동으로 어머니의 건강이 놀랍게 호전되었지만 때때로 닥치는 시련들로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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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지진. 쓰나미에 이어, 원전 폭발 쓰나미, 경제 쓰나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지진으로 금이 간 일본인들의 마음을 채워주기 위한 한류스타와 누리꾼들의 기부소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한류 스타 배용준은 10억을 기부했고, 이병헌을 비롯 뒤를 이어 기부 행렬이 뒤따르고 있네요. 이병헌은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 친구가 혹은 이웃이 이런 재앙을 당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다면 과연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역사적인 문제 때문에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인식은 접어둔 채, 오직 인본주의와 인류애에 입각해서 행동해야 할 때라 ",며 기부참여를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언론을 통해 일본 대지진 소식을 듣고 보면서, 침착함을 잃지않고 대지진 참사를 이겨내고 있는 일본 시민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일본의 크고 작은 자연재해(지진,화산, 폭설 등)가 많은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방재시스템이 잘 구축되어있지요. 과거의 뼈아픈 경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안전에 대한 교육과 대처 방안도 뛰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지진이 보여준 결과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피해가 심각합니다. 만약 한국에 이런 지진이 발생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국의 방재시스템은 잘 구축되어있는 걸까? 걱정을 해봅니다. 대지진 뿐만아니라 이상기후로 천재지변은 언제든지 국적 불문하고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리히터 규모 9 정도의 지진. 20만명 목숨을 빼앗간 아이티 지진의 규모는 7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일본의 시스템문화가 잘 구축되어있기에 그나마 인명피해를 최소화시킨거지요.


일본 대지진을 통해 한국의 방재시스템을 재구축하고 점검해보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합니다. 건축물 또한 마찬가지지요. 종합적인 안전대책문화가 보편화되고 체계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의 참사가 한국에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울러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고, 도움의 손길을 주고 받는 문화가 성숙되어졌으면 합니다. 한류스타들의 일본 대지진 돕기 기부행렬이 일본인들에게 큰 희망으로 되살아 나기를 바랍니다. 나눔은 어려울 때 돕는 것이 더 아름답지요. 돈이 아니라도 마음이 담긴 글 하나 말 하나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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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가정에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현재 가족구성원이 어떤 감정상태인지, 무슨고민이 있고, 무슨일을 앞두고 있는지, 어떤것들을 필요로 하는지 등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누리며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은 가족의 대화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아버지들은 야근을 밥먹듯이 하시고, 엄마들도 대부분 맞벌이를 하시고, 아이들은 빡빡한 학교일정에 과외, 학원 등으로 서로 한 식탁에 앉아 밥 한번 먹기도 힘듭니다.
특히 스마트폰이란 놈이 사람들 손에 들려지면서 이제는 사람이 앞에 있어도 각자 자기 휴대폰을 보며 킥킥대는 그런 시대가 되었죠.^^

이런 상황에... 한 엄마가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을 두었는데 요즘들어 말할때 마다 볼멘소리로 대꾸하고 짜증을 자주 낸다고합니다.
알수 없는 이상하고 문법에도 맞지 않는 단어를 자꾸 써서 주의를 주면 엄마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린다고 합니다. 이 엄마는 아이와 대화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고민을 해결 간단한 TIP! 

좀 더 아이와 가까이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아이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입까지 다물어버리니 무척 속이 상하시겠네요.
요즘은 초등생들도 인터넷에 많이 노출되다보니 외계어라고 부르는 단어를 사용하여 부모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정말 얄미울 땐 ‘너도 시집가서 꼭 너 같은 애 하나 낳아서 키워봐라’ 고 말하고 싶은데 차마 말로 할 수는 없고 아이가 커갈수록 부모의 역할이 힘들기만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어렸을 때도 친구들을 만나면 늘 하는 이야기가 ‘우리 엄마는 어쩜 그렇게 말이 안 통하니?’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은 흘렀어도 부모가 자녀의 세계를 이해하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닌가 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아이들은 자아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되고 그런 자기들을 수용해주지 못하는 부모, 세상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춘기 시기에는 욕도 많이 하게 되고 사사건건이 불만을 표시하게 되죠. 크는 과정이라고, 부모를 의지하던 어린아이에서 혼자 결정하고 책임져야하는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여주세요. 이때의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이나 부모들의 훈계보다 또래 문화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느끼기 전에는 부모님의 말씀은 그냥 잔소리에 지나지 않죠.
지금 따님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님의 명령과 직접적인 개입이 아닌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또, 어머니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로 이야기 할 때는 나무라기보다 ‘요즘 너희들은 참 기고발하구나’ 라는 말로 따님을 인정해주세요. 그리고 나서 그 단어가 어떤 뜻인지 묻고 아이들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면 따님도 그전 보다 마음을 열고 어머니와 대화하지 않을까요?

이 시기에는 자녀들과 관계가 나빠지거나 멀어지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에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령과 개입은 절제 하되, 엄마가 너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세요. 따님이 중요한 순간에 스스로 대화를 시도 할 수 있도록 부모의 현명한 기다림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 도움: 조향숙 | KACE 부모교육 전문 지도자, 부모&자녀 상담실 상담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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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학과 새학기를 앞둔 2월의 끝자락.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씨가 자신의 트위터 남긴 글이 인상적이네요. " 새학년 맞이하는 부모님들. 다른 아이를 보지 마세요. 다른 부모의 말은 듣지 마세요. 심지어 자기 아이도 보지 마세요. 차라리 자기를 보세요. 자신이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 올해 뭘 발전시킬지 생각하세요. 그럼 분명 좋은 부모가 되실 거예요 " 


자녀가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것보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성찰하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가끔 부모님들은 자신의 자녀와 다른 사람의 자녀들을 비교해서 바로보거나 말을 할 때가 많지요. 적절한 비교와 비유는 자녀들에게 자극도 되겠지만, 과유불급. 지나치면 부족하것보다 못할 때가 많습니다. 


3월을 앞둔 오늘 하루. 입학과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부모입장에서 자신이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지, 뭘 발전시킬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계획을 세워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잘 성장하기를 바라신다면 부모 입장에서도 어떤 변화와 자세가 필요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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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교수가 작년에 한 케이블 방송에 출연해서 공개한 이른바 '안철수 잡지 공부법'이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자신은 잘 모르지만, 꼭 알아야 될 전문지식이 있다면 스스로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원고를 쓰겠다고 요청했다고 하지요. 마감일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지요. 이른바 컨트롤 엑스(cx), 컨트롤 카피(cc) 인터넷 시대 글쓰기는 금방 표가 납니다. 이리 저리 떠도는 정보들을 갈무리해서 편집된 글은 깊이가 없지요. 그래도 이런 식으로 글을 쓰다보면 하지 않은 것보다는 지식이 습득됩니다. 육화는 되지 않지만. 


시골의사 박경철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잡지도 중요한데, 잡지를 계속 읽으면 그 분야에 준 전문가가 되죠. 안 선생님(안철수 교수)도 늘 그것을 강조하시던데, 잡지의 심층성은 상당히 중요하거던요. 저도 모 시사잡지 창간호부터 서재에 보관하고 있었죠...." 박경철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신문을 읽었다고 합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신문을 읽게된 것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한 박경철. 이야기를 전해들으면서,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책을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배달을 했지요. 신문배달을 하면서 이 친구는 신문을 외울 정도 수준이 되었지요. 한자도 선생보다 더 잘 알 정도였으니까요. 가방에는 빈 도시락과 신문만 있었던 친구. 교고서도 친구들 빌려서 공부했던 친구. 이 친구는 뒤에 서울대에 합격했습니다. 개천에서 용나왔다고 말했지요. 정말 그 친구 집은 썩은 물내음 진동하는 개천가에 있었습니다.


공부하는 비법을 소개하는 책과 정보는 흘러넘칩니다. 공부를 잘하고 전문가가 되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이 아닐까요? 요즘같은 인터넷 시대. 예를 들어 '입학 선물'과 관련된 주제의 글을 쓴다면 입학 선물 관련 전문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정보는 개방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능력, 자기와의 약속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신문과 잡지사에 근무하는 분들은 좋으시겠습니다. 그만큼 책임감있게 알찬 내용을 독자들에게 선사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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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선보이고 있는 <100년의 기업>. 오늘은 포르투갈 황제의 빵을 만들고 있는 제과 명가 '콘페이타리아 나시우날'이 소개되었다. 1829년에 만들어진 제과점. 182년의 역사를 가진 빵집. 볼루 헤이(Bolo Rei) 케익은 포르투갈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즐겨 먹는 빵이다. 황실에 빵을 공급하는 빵집을 떠나,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 빵을 먹는다. 방송을 보면서 18년 전 유럽을 방문했을 때 먹었던 볼루 헤이 케익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머리보다 입속을 파고든다.



5대 째 가업을 이어온 제빵집을 보면서, 한결같은 맛을 이어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것은 바로 원칙. 100년이 넘게 이어 내려온 빵만들기 원칙과 여기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자부심. 최고의 빵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제빵집은 외부 투자자나 기업으로부터 인수제의를 숱하게 받았지만, 그 유혹을 떨치고 오직 많은 사람에게 좋은 빵을 제공한다는 원칙아래 그 장인의 손길과 맛길을 지키고 있다.


명품과 명품 기업은 하루 아침에 탄생되지 않는다. 빵뿐만 아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최근 서울대 음대 교수의 폭행사건이 화제가 되었다. 그 교수는 도제식교육을 변명삼아 말했다. 18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빵집  '콘페이타리아 나시우날'도 제빵 기술도 도제식 교육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폭력이 도제식 교육이 될 수 없다. 포르투갈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변함없는 맛을 전수시키기 위해 이 빵집의 맛을 되살려 후배들에게 전수시키고 있는 것은 빵에 대한 애정이다.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평생 직장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 맛의 깊이를 100년이 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원칙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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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를 받고 있는 서울대 음대 교수. 서울대측은 학생들의 제보를 바탕으로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폭행 뿐만 아니라 여러 비리 상황도 나오고 있지요. 음악공연연주회 표를 학생들에게 강매하거나, 수업 운영 방식에서도 여러 비리가 포착된다고 합니다. 어제 MBC 뉴스데스크에서 보도가 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사태가 더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저까지 해당 교수는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잠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 교수가 MBN(매경) 기자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성악과만의 독특한 도제식 교육이 폭행 의혹으로 확대됐다'며 눈물을 흘렀다고 하네요. 도제식교육. 특히 문화예술계나 장인교육은 도제식으로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도제식 교육은 학교교육 시스템이 갖추어진 않은 중세 때부터 이루어졌지요. 도제식은 필요하지만, 악용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또한 상습적 폭행과 실력을 배양하고 기능을 전수시키겠다는 명목으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도제식교육은 이런 구분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분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도제식교육을 잘 살리면 배우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교육 과정보다 생생하게 체득할 수 있습니다. 도제식 교육. 특이 장인기업이나 가가손손 가업소기업이 많은 일본의 경우 도제식교육이 잘 발달 되어있습니다. 일 이년이 아니라 몇 십년을 한 길을 걸으면서 자기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지요.


하지만 학생들에게 표를 강매하거나 폭행을 저지른 의혹을 받은 교육자가 도제식 교육 운운하는 것은 왠지 변명처럼 들립니다. 자칫 도제식교육 전체를 매도할 수 있으니까요. 도제식 교육의 장단점을 잘 살려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쪽록 서울대측이 학생과 교수 의견을 잘 살펴 진상을 가려내야겠지요. 아무튼 이번 사건을 통해 도제식 교육이 함부로 폄하되거나, 도제식 교육을 빚대어 인권을 무시하는 교육방식도 개선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중세의 길드에서 나온 교육방식이죠. 사부가 있고 제자가 있고, 해당 사부의 비기를 나중에 뛰어난 수제자를 채택해서 전수하고 그 제자가 또 같은 대물림을 하는 방식으로 뛰어난 품질과 장인정신 뭐 그런것에 많이 비유되죠. 중세의 역사를 공부하시다보면 길드와 가내수공업쪽을 보시면 많이 나옵니다. 도제식 교육방식이 열리게 될려면 꼭 뛰어난 사람이 자신만의 비기로 남이 모방하기 힘들고, 독특해야만 하죠. 이것은 뛰어난 인재들끼리의 대물림이 되어야 하므로 문화적으로 기술의 중시하는 현상이 있어야만 남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scieng.ne (작성자 :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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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음대 교수 한 분이 지속적으로 학생들을 구타한 사실이 제기되었네요. 한 여학생이 교수로부터 얼굴을 맞아 병원 치료를 받는 와중에 학교측에 진정이 들어와서 진상조사에 나섰다고 합니다. 보도(뉴스 커뮤니티)에 따르면 해당 교수는 훈육차원에서 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그 행위가 구타인가요? 폭언입니까? 0년 동안 상습적으로 구타를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참 걱정되네요. 스포츠 관련 전공자들이 맞았다는 소식은 많이 들었지만, 음대교수님까지 합류를 하셨다고 하니 기각 막힙니다. 초중고 체벌금지가 아니라 이제 대학교도 체벌금지라는 말이 나와야 하는 건가요. 


때려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누구나 폭력을 행사하겠지요. 구타는 일시적인 효과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부정적 효과가 큽니다. 맞아본 사람이 때린다고, 맞은 학생이 음대 교수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오죽하면 때릴까하고 말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훈육은 얼굴을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  뚱뚱부을 정도로 때리는 것이 훈육입니까. 교육자라는 분이 훈육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아셔야지요. 10년 동안 구타를 해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교수님에게 음악을 배운 학생들이 참 딱하네요.  예술치료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로 정신적 치료를 하는 거지요. 폭력을 당한 사람의 상처와 마약으로 찌든 사람, 외상후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음악을 통해 치유하는 과정. 그런데 폭력을 치유할 수도 있는 음악이 음악을 전공하는 교수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네요.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기 바랍니다. 불성실하다면 성적으로 표출시키면 됩니다. 폭력을 당한 사람도 충격이겠지만 그런 행위를 지켜 본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 건지...... 얼굴 맞아가면서 배우라고 힘든 대학을 부모님들이 보내신것은 아니지요. 스승의 참 가치는 배려와 인내에서 나온 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음악이 세계 평화를 앞 당길 수 있을까?

최근 읽기를 마친 책 제목은 <엘 시스테마, 꿈을 연주하다>입니다. 엘 시스테마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기도 했지요. 베네수엘라의 음악혁명이라고 불리는 엘 시스테마(El Sistema). 베네수엘라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이야기입니다. 남미국가에서 쿠바와 더불어 음악의 뿌리가 깊었던 베네수엘라. 하지만 식민지 시대를 거치고, 여느 남미 국가처럼 서양음악 분야에서 뒤떨어지지요. 하지만 유럽인만이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엘 시스테마(국립청소년 오케스트라)의 산파 역할을 한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있어지요. 이분은 9살 때부터 음악 악기를 연주한 분입니다. 경제학자인 아브레우 박사가 왜 오케스트라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던졌을까요?

 

아브레우 박사는 음악을 어린이가 앞으로 자기 삶에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음악과 예술이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측면을 꿰뚫고 있었던 거지요. 1975년 만들어진 엘 시스테마는 이후 베네수엘라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거듭나게 됩니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그들의 음악을 듣기 위해 초청하고 있지요. 그뿐만 아닙니다. 엘 시스테마 프로젝트는 다른 나라에서도 파급되는 효과를 낳았지요. 재능은 있지만, 가난 때문에 음악을 하지 못한 많은 아이들이 엘 시스테마 프로그램을 거쳐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는 아브레우 박사



아브레우 박사는 베네수엘라 곳곳을 누비며, 음악을 가르칩니다. 페몬 인디언 어린이들이 단 석 달 만에 바이올린을 배울 정도였으니까요. 스즈키 교육법. 스즈키 신이치가 창신한 교육기법. 아들들이 자라면서 모국어를 자연스럽게 익히듯 악보를 읽기에 앞서 반복적으로 음악을 듣고 연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누구나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교육관입니다.

 

아브레우박사는 결혼도 하지 않고 음악을 위한 열정, 교육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성직자 같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의 생각의 씨앗은 지금 많은 남미국가에 퍼져 나갔지요. 아우레우박사는 바랍니다. “베네수엘라는 하나의 거대한 교육기관이 되어야 해요. 목적을 자각하는 현명하고 선진적이며 심층적인 교육 시스템을 갖는다면 베네수엘라는 합당한 미래를 맞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꾼 이야기. 엘 시스테마. 그 실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음악은 역격을 희망으로 바꾼다(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음악으로 아이들에게 미래를 선물한 작은 실험이 이제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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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1947~)은 미국의 동물학자 이름이자 그녀의 자서전적인 영화 제목이다. 템플 그래딘은 2살 때 뇌 장애 판정을 받고 특별시설에 격리 입원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자폐증이 사회에 인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자폐증으로 간주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자폐증과의 경계가 모호한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진단 받았다. 아스퍼건 증후군은 지능은 정상이지만 언어감각이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병이다. 템플 그랜딘이 여러 차례 대중강연에서 언급했든 자신의 병을 시나브록 극복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선생과 어머니의 관심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탬플 그래딘은 자신의 스승 권유로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다. 그의 천재성을 인정해 준 선생이 있었기에 새로운 도전의 길에 선 템플 그래딘. 템플 그래딘은 어려움에 봉착 할 때마다 새로운 문을 열고 나가야 한다는 선생의 말을 떠올리면 난간을 극복해갔다. 템블 그레딘은 특히 동물(소와 가축)에 재능을 보였다. 소의 움직임(동선)을 따라 농장(가축공장)의 구조를 파악하고 동물들에게 인도적인 방식(비학대적인 가축시설)으로 가축시설이 꾸려지게 끔 설계를 하는데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자신의 머리 속에 그림으로 모든 것을 떠올리는 천재성.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가축장 관계인사들은 탬플 그래딘의 열정과 실력을 인정해 주기에 이른다. 동물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템플 그래딘은 이후, 자폐증 환자를 위한 대중 강연을 통해 자신의 인생 행로를 통해 얻은 경험을 나누기 시작한다. 2010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뽑힐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 되었다.


영화 템플 그레딘은 한 개인의 자전적 논픽션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살필 수 있다. 학부모나 선생, 학생이 같이 감상하면 좋을 영화인 이유는 가정과 학교를 잇는 가교역할을 어떻게 학부모나 선생이 하는냐에 따라 학생이 변화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주는 교훈을 떠나 완성도에 있어서도 모자람이 없다. 템블 그레딘의 역할을 소화해 낸 여배우 클레어 데인즈의 연기력도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한다. 감동과 재미, 짜임새가 있는 영화를 만난다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졸업 시즌이다. 졸업과 함께 많은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학생들.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지 않은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영화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 집념과 집중력이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자폐증이 뭔지 약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자폐증은 일종의 연속체로서 매우 심각한 수준인 말을 하지 않는 아이부터 천재적인 과학자와 엔지니어들까지 이어집니다. (중략) 제가 사교성이 없어서 어릴적부터 배운 여러가지 중 한 가지는, 제 자신이 아닌 제 작품을 팔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축일을 할 때 쓴 방법은 제가 그린 그림, 사물을 그린 그림들을 보여준 것입니다. 또 한 한가지 도움이 된 것은 어린 시절이었던 50년도에 예절을 배운 것입니다. 가게의 선반에서 물건들을 꺼내서 여기저기 던질 수가 없다는 걸 배웠습니다.

 

제 과학 선생님은 저를 공부하도록 만들었죠, 저는 공부하기 싫어했던 얼간이였거든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가 경험을 쌓고 있었다는 거죠. 저는 너무 많은 영리한 아이들이 기초적인 일들을 배우지 못한 것을 보고 있어요. 어떻게 시간을 지키는가 하는 것 들이죠. 저는 여덟살 때 그런 것을 배웠죠. 할머니의 일요일 파티에서는 식사예절도 배웠죠. 그런 것들은 제가 매우 어렸을 때 배운 것입니다. 또 제가 열세살이었을 때 양장점에서 옷을 팔았습니다. 대학에서는 견습생을 했었죠.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할당된 일을 어떻게 하는가도 배웠죠.


제가 어렸을 때 원했던 전부는 말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말하길, “자, 다른 그림도 그려보자.” 다른 것을 어떻게 하는지도 배워야만 합니다. 한 아이가 레고에 집착하고 있다고 해보죠. 그 아이가 여러 다른 물건들을 만들도록 해야 합니다. 자폐적 사고에 대한 특징은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만약에 아이가 경주용 차를 사랑한다면, 경주용 차를 수학 공부에 이용하는 겁니다. 경주용 차가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보게 합시다. 달리 말해서, 그 집착을 이용하는 거죠. 아이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하는 것 중 하나죠. 

* 템플 그랜딘의 TED 강연에서 발췌 수록


                    * view subtitles를 클릭해서 한글자막은 선택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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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불렸던 고 이태석 신부의 삶의 궤적을 담아낸 휴먼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가 설 연휴 안방을 찾아갔다. 시간은 없고 마음만 있었던, 많은 분들이 TV에서 상영된 울지만 톤즈를 보며 울었다. 이번 설 연휴는 다큐멘터리가 많이 방송되어, 그 어느 설 보다 음식 맛이 아니라 방송 보는 맛이 있었다. 부산 산동네에서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난 이태석 신부. 9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의 어머니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자갈치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해서 아이들을 키웠다고 한다. 어렸을 때 겪은 슬픔과 가난. 초등학교 때 본 영화 한 편이 고인을 의술과 신부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벨기에 출신의 선교사 다미앵 신부. 그는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다 자신도 같은 병에 걸려 죽게 된다. 몰로카이의 성자. 고인의 초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방송인 신경민 씨는 몇 주 전에 울지만 톤즈를 보고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남겼다.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의 다큐를 QOOK TV로 봤습니다.우선 헌신,봉사가 놀랍고 음악,수학,공학재능이 부럽고 죽음앞에 의연함도.."네 도움이 필요하다면 누군지,어딘지,피부색,믿음을 묻지 말고 몸,시간,돈을 던져라"는 말 생각납니다..." 빈민의 아버지라 불렸던 프랑스 아베 피에르 신부는 신앙인으로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가장 고통 받는 자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오늘낭 우리는 사람의 권리만을 이야기할 뿐, 의무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존재는 운명적으로 의무를 갖고 태어난다. 모든 것은 이 의무를 실현하기 위해 실행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의무는 권리의 근거이다"(피에르 신부)


수단 뿐만 아니아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는 내전과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고 이태석 신부는 신앙인을로서 의사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 의무를 다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물질만이 아니다. 불행한 자들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고인은 그런 이유를 보여주었다. 고인은 지금 가고 없지만, 그가 실천했던 행동은 또 다른 이에게 존재의 이유가 되어 그 향기를 너 멀리 넓게 퍼뜨릴 것이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여러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어떤 어려움이 닥친다해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다."(울지마 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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