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찰이 요구되는가?
|김경집| 완보완심 2012. 11. 30. 14:41인격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이며
능동적일 때 존립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교육이 비주체적이고, 타율적이며,
수동적이기 때문입니다.
12년 넘게 그렇게 교육받았고,
학교 밖으로 나온 세상 또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거기에 잘 적응된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적응’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철저하게 텍스트 추종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의심도 질문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불필요하고 오히려 짐만 된다고 여길 뿐입니다.
텍스트는 분명 그럴만한 가치와 용도가 있습니다.
인류의 지성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 체계입니다.
그것이 지적 바탕을 마련하여 보다 나은
지식을 생산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그것만을 요구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텍스트 추종에만 매달리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텍스트 자체가 권력이 되어
갈수록 텍스트 의존이 높아지고,
그 텍스트를 차지한 사람이 권력과 부를 쥐고
텍스트를 통해 지배하려 합니다.
텍스트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체계입니다.
그러므로 텍스트 추종의 교육은 자칫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게 만드는 독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힘 있는 사람들은 결코 텍스트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육을 망친 진짜 이유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주체성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텍스트는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지식체계입니다.
내가 그 텍스트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텍스트는 그 자체가 답이기 때문에 그냥 수동적으로 따르기만을 요구합니다.
그 답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세상에 답은 하나뿐이라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답만 추종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질문은 바로 나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질문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개인’, ‘주체적 자아’를
원천적으로 포기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 교육에서 이렇게 질문을 말살한 것은
결국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격으로서의 나를 억압하고 있는 셈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바로 참된 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이 발표의 중심주제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성찰은 근사하게 느껴집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성찰은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마음이나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찰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적어도 오늘 우리의 전체 주제에 비추어볼 때,
바로 주체적 인격의 회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인문학적 가치이기도 합니다.
앞서 우리의 시끄러움과 요란함을 무한도전을 빗대 말씀드린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체적 인격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성찰을 위해서는
차분하고 조용하게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까 고독은 ‘자발적 고립’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찰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아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익명의 타자 속에 아무리 함께 묻혀 있는 한 진정한 자아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사전적 의미로서의 성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면
성찰은 바로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종일 뛰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만 생각할 뿐 정작 누가, 왜 달리고 있는지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에도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가끔은 천천히 걸을 수 있어야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도 살갑게 만나게 됩니다.
세상을 우리에게 무조건 달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약간의 보상도 마련합니다.
그렇게 달려서 얻은 게 한 뼘이라도 넓은 집, 좀 더 크고 성능 좋은 차,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할 지위입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목적일까요?
물론 그것만으로도 뿌듯하고 대견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 삶에 대한 성찰조차 마련하지 못하면서
달려간 사람이 끝내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서,
인격의 주체로서 성취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성찰은 내가 나 자신이 되는 중요한 과정이고 정신행위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인격으로 대면하고 인격으로 대화하고 고민함으로써
부족한 삶을 반성하고 보다 참된 나를 지향하는 힘의 바탕입니다.
조용히 물러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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