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여 동안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비록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복직을 한 후

내가 바라본 학급 아이들은 이전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교사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던 나에게

“선생님” 하며 다가오는 아이들은 감사한 그 자체였다.

과거엔 학교란 곳이 나에게 직장 그 이상이 아니었다면

 투병 생활 이후의 학교는 나에게 소중함 그 자체였다.

 

 

 

 

 

 열심히 교재 연구를 해서 수업 시간에 지루함을 없애주고 싶었으며,

30명 아이들 하나하나와 상담을 하며

일상의 이야기를 나눠 아이들의 고민을 함께 해 주었다.

 

 

또한 월별 생일파티, 교실올림픽, Mission 보물찾기, 풍선 운동회, 요리 콘테스트 등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선사해 주고 싶어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였으며

그 모든 활동들을 우리 반만의 학급문집을 발간하여 간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2010년

2010년 3월 2일은 나의 소중한 제자 1호와의 만남이 있던 날이다.

사실 2월 말 미리 반 아이들 명단을 받아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지 대강은 파악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2월 말 난 깊은 시름에 젖었었다.

 

 우리 반에 A라는 유명한 명물이 있던 것이었다.

4학년밖에 안 된 녀석이 교장선생님께 의자를 집어 던지고

교장선생님 뺨까지 때려 코피를 흘리시게 만들었다는

 최고의 명물. 정말 감당하기 두려운 상대였다.

 

우리 반 명단에 A라는 아이가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며칠간은 너무 속상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기선제압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상을 쓰고 3월 2일 교탁에 섰다.

 

이름 하나하나 호명을 하며 일어나서 자신을 소개하게 했다.

역시나 A는 만만치 않았다.

일어나지도 않은 것은 물론 내가 화를 내며 나오라고 하니 나오지도 않았다.

1달여간을 매일 상담을 하며 A를 이해하고 내 마음을 전달하고자 노력하였다.

 

A는 매일 학교에서나 집에서 맞고만 자라서 나에게 맞을까봐

많이 두려워서 일부러 내 말을 거부하며 강하게 나왔다고 했다.

선생님은 A를 사랑하며 절대 너를 때리지 않는다고 안아주며

안심시켰더니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A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었던 3월 생일파티 시간에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라는

친구들의 축가를 듣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새삼 학급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을 했었나 보다.

그런 A를 바라보는 내 눈시울도 참 뜨거웠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이 마음에 안 들면 욱해서 발길질부터 하던 다혈질 싸움꾼 B,

절대 지는 건 못 참고 뭐든지 자기가 이겨야만 하는 C등

우리반 대부분의 아이들은 꾸준한 관심과 사랑을 통해 문제행동이 많이 좋아졌으며

무슨 일이 있으면 선생님부터 챙기는 나의 열성적인 팬이 되었다.

 

 

 


 

2011년

2011년 나의 제자 2호가 탄생했다.

5학년 5반은 다시 생각해도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재치면 재치 모든 게 완벽했던 반이었다.

 

그 완벽한 반에서 3월 한 달 내내 지켜본 결과

 D는 유일하게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녀석이었다.

 선생님이 무슨 말만 하면 늘 태클을 걸었다.

 

“과연 그럴까요?”, “과연 그걸 할 필요가 있을까요?”

늘 내가 말하는 것에 반대를 외쳐댔다.

내 인내가 한계에 달했던 2011년 4월 1일 D와 상담을 했다.

1달 동안 D의 말과 행동들을 인해 선생님이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솔직하게 내 심경을 전하며 상담을 시작했다.

 

D는 선생님이 자기 때문에 상처 받았다는 것에 깜짝 놀라했다.

남에게 시비 거는 말투의 자신의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나

잘 고쳐지지 않는다며 펑펑 울었다.

 뜻밖의 모습이었다.

 

평소 늘 강인하게만 보였던 D가 하염없이 울며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직시하는 모습은 여간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D가 문제점을 고칠 수 있게 선생님이 도와주겠다고 말하며

안아주자 D는 자신감을 찾았다.

 

지금 D는 여전히 축구를 좋아해서 깁스를 많이 하는

활동적인 아이이긴 하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여

주변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온갖 영재원 합격은 물론 국제중학교에 들어간 E를 비롯하여

 까칠하지만 감수성 풍부한 글을 쏟아내는 F 등

5학년 5반은 중학교에 올라간 뒤에도 “선생님, 조으다” 라는

플랭카드를 제작하여 함박웃음을 짓게 만드는 나의 제자 2호들이다.

정말 미래가 기대되는 자랑스런 나의 제자들이다.

 

 


 

2012년

2012년 나의 제자 3호는 정말 처음엔 정이 안 가는 아이들이었다.

3학년 때부터 담임선생님께 “머리가 붕언가 봐.”, “교통 사고나 나라.” 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던 G는 5학년 올라와서도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날 출근해서 교실에 들어오는 나에게

 “선생님 왜 웃으면서 인사 안 해요?” 라고 따지듯이 물었다.

자신에게 웃으면서 인사 안 했다고 기분 나쁘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그렇게 G는 늘 즉흥적으로 자기 기분 상태를 전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아, 대머리다.”, “너무 못생겼어.”

머리에 필터 기능이 없는 것 같았다.

1년여 시간동안 G를 비롯해 G의엄마와 꾸준히 상담하여

G의 언행이 보다 신중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그 결과 G는 무언가를 이야기할 때 보다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문제 행동을 교정할 수 있도록 도와준 선생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지금 6학년인 G는 교정에서 볼 때마다 달려와서 품에 안기고 있다.

 

생각하면 가슴 한 편을 짠하는 만드는 H라는 제자도 있다.

4학년 말에 공장 프레스에 H 아빠가 깔리셔서 며칠간 의식 불명이셨다고 한다.

며칠 후에 깨어나셨지만 5학년 때를 비롯해 지금까지 투병중이시다.

요즘에 교과서로만 공부하는 아이가 있겠나 싶지만

H는 정말 교과서로만 공부하고도 늘 올백을 맞는 아이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사교육을 받을 형편이 안 되어

교과서를 읽고 또 읽는다고 하였다.

거의 매일 똑같은 옷을 입는 게 안쓰러워 상담 중에

조심스럽게 어떻게 생활하는지 물어보았다.

 

모아둔 돈으로 아끼며 조금씩 쓰고 있다고 말한 H가

 안쓰러워 옷을 선물해 주었더니 수줍게 받아주어 참으로 고마웠었다.

무엇보다 H가 마음에 들었던 건 그 어려운 형편 중에서도

다른 사람을 돕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4월에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는 “희망편지쓰기” 교내 행사가 있었는데

편지 사이에 성금을 넣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생님이 검사하지 않을 줄 알고

 성금을 넣지 않거나 약간의 돈만 넣었는데 H는 정성껏 쓴 편지 사이에

용돈 만오천원이나 넣어 두었던 것이다.

학급에서 최고로 많은 액수였다.

H는 6학년이 된 지금도 수줍게 미소 지으며

 경찰대학교를 목표로 멋지게 생활하고 있다.

 


.    .    .

 

지난 3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은 감사함 그 자체였다.

사랑스런 제자들과 3년 동안 울고 웃으며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제자들의 미소를 떠올리면

피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절도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

제자들의 미소는 나에게 최고의 비타민인 것이다.

 

지금까지 배출한 제자 1호, 2호, 3호는 물론

앞으로 배출될 제자들과 사회에 행복에너지를 전파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 본다.

 

 

 


||| 2013 선생님,학생,부모님 자랑 글쓰기 대회

      학생부문 작품 최우수상 (사천초등학교 교사 남지현) 글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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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희망이자, 미래의 리더가 될

해맑은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푸릇푸릇 돋아나는 새싹과 같다.

 

 

이런 아이들이 저마다의 색과 향을 지닌 꽃으로

피어날 수 있도록, 잘 여문 열매로 맺어질 수 있도록

잘 키워내는 것이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몫일 아닐까?

 

 

 

 

 

사실 요즘 언론에서 보여지는 학교는

 존중과 배려, 사랑과 추억이 없어진 곳으로 전락해린 듯 하다.

하지만 선생님 자랑대회의 사례집의 글들을 읽다보면

울림과 열림을 느낄 수 있다.

 

 

감동이 잔잔히 전해져 마음이 따뜻해지고,

희망의 마음을 열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즐거움이 꽃피는 학교의 중심에는 늘 선생님이 있다.

 

 

진심으로 아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선생님,

아이들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생님,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시고 감성을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생님,

배려와 정의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

 

 

이런 선생님들의 노력은 비록 교실 안에서만 이뤄지지만,

이 사랑은 작은 것,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지리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는 아이들에게

끊임없는 가르침과 사랑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이 시대의 주인공이 아닐까?

 

 

2013 선생님 자랑대회가

당신의 편지를 기다립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2012 선생님자랑대회 글쓰기 공모 글>

 

선생님은 나에게 어떻게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신 분이다. 3학년인 된 나는 친구들의 입장에 생각하고 양보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늘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반 모두에게 칭찬을 해주셨다. 칭찬 스티커를 모으면 재미있는 영화를 보거나 좋은 책을 사주셨다. -김남경(오류남초등학교 3학년) 글 중에서-

 

5학년 마지막 날, 선생님은 우리를 한 명씩 직접 부르시곤 눈물을 흘리면서 6학년이 되어서도 열심히 하라며 조언해주시고 포옹해주셨다. 항상 원칙을 가지시고 열심히 하는 아이에게는 아낌없는 칭찬을, 규칙을 어기는 아이에게는 따끔한 충고를, 그리고 우리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조언을 해주신 박가영 선생님. 학년이 바뀌는 시기에 전학을 가게 되어 힘들어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전학 가서도 열심히 하고 건강해. 그리고 넌 잘 할 수 있을꺼야”라고 해주셨다.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 윤재민(월천초등학교 6학년) 글 중에서

 

선생님은 제가 체육시간에 공을 맞아 울었을 때에도 “울면 안돼!”라고 하시지 않고 “많이 아프지?”라며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 주셨어요. 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말씀만 해주셨죠. 반 아이들을 위해 조언해주시거나 설명하실 때에도 자세히 모두가 이해할 때까지 친절히 얘기해주셨어요. 그때도, 지금도 성대결절로 마스크를 쓰고 다니시는 선생님을 뵈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 김서영(월천초등학교 4학년) 글 중에서

 

선생님은 친구들을 못 사귀는 친구들이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항상 먼저 챙기시며, 지도해 주셨습니다. 학업이 부진한 아이들에게는 더 신경써서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왕따를 당하는 친구들에는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직접 우리 사이에 들어오셔서 도와주셨습니다. 2학기 때 제가 다리가 다쳐서 걷지를 못했을 때 선생님은 저를 직접 업고 계단을 내려가 주셨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 문현진(중곡초등학교 6학년)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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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일 때문이었지만, 그저 좋았습니다. 흐뭇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움도 진했습니다. ‘이 좋은 선생님들이 더 신나게 가르칠 수 있는 그런 학교,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

 

고군분투랄까요.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에 대한 사랑과 교직에 대한 소명의식을 무기삼고 위안삼아 그렇게 힘들고 외롭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눈가에 잔웃음이 서려있는 것은 늘 그런 아이들 틈에서 지내는 작은 보상일까요.

 

선생님들이 생각났습니다. 선생님들을 만나니, 저의 선생님들이 그립습니다. ‘아, 난 참 행복한 아이였구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열한 분의 담임선생님 모두(내리 2년 담임을 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참 좋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출석하는 교회에는 저의 고등학교 일어 선생님도 출석하십니다. 지독한 근시라 교탁 바로 앞에 앉은 저는 일어 시험 결과가 나오는 날이면 늘 선생님께 꿀밤 한 대 씩 맞았습니다. “일어 못하는 은홍아(늘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이번엔 몇 점 맞았니?” 저는 가끔 당당하게 “11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구, 잘했다.” 꽝! 평균 9점 대였으니, 11점이면 엄청 잘 한 것이지요.

 

“일어 못하는 은홍아.” 저는 선생님이 그렇게 부르는 게 실지 않았습니다. 내심 좋았습니다. 그 부름에서 선생님의 관심과 애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꼿꼿한 어깨와 날카로운 눈매와 약각은 시니컬한 미소로 한 카리스마 하셨던 선생님을 교회에서 뵐 때면, ‘이젠 늙으셨구나.‘ 외람되게도 그런 측은지심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선생님 죄송합니다”). 졸업하고 10년이 넘어 뜻하지 않게 한 교회에서 다시 뵌 선생님께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 선생님, 그래도 대입 시험에서는 만점 받았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일본 정부 정책 자료집 번역해서 첫아이 분유 값도 벌었습니다.”

 

“일어 못하는 은홍아. ” ...“ 은홍아, 넌 일어 잘 할 수 있어.” 그렇게 들렸나 봅니다.

 

최근 또 다시 학교와 선생님에 관한 우울한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르치는 일에 소명 받은 선생님들이 구름 같이 일어나 학교와 나라와 세상을 선한 사회로 만들 날이 오리라는 것을.



* 글쓴이 : 김은홍(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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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고생하지 마라"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와
힘든 마음에 "편하게 지내볼까?" 하다가도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면 "그래! 내가 이렇게 예쁜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하며
마음을 다잡는다는
김은숙(49) 선생님.
(2007년 당시 서울영풍초 교사)

'훌륭한 선생님을 알고 있다.'는 어떤 어머님의 말에 불쑥 인터뷰를 부탁드렸다.
"제가 어디에 드러낼 만큼 잘한 것은 없어요."라며 거절에 거절을 거듭하신다.
               
선생님에게서 '나쁜 여자'의 매력을 느낀다.
나쁜 여자의 튕김만큼이나 매력적인 선생님의 겸손함.
그러면 그럴수록 선생님을 만나고픈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만난 선생님과의 솔직한 이야기는 3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방과후 한 시간, 학부모와 함께

교직생활을 한 지 24년.

처음에는 아이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아이들과 리코더도 불러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영어도 해보며
김 선생님은 반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돕고 싶었다.

그런데 국어가 안 되는데 과연 대화가 되고 음악, 미술, 영어가 될까?
'그래! 국어가 먼저겠다.'란 생각이 들면서
연수란 연수는 쫓아다니며 독서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처음엔 아이들만 잘 가르치면 될 줄 알았는데 교실 환경만으론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부모의 변화가 먼저였던 것이다.
그 후부터 방과 후에 한 시간 정도는 부모님들과 함께 보낸다.

부모님이 읽었으면 하는 책을 권해드리고 그 다음 주엔 서로 소감을 얘기한다.
학부모들은 그저 대화를 할 뿐인데도 서로 배우고 느끼는 바가 많다고 한다.



부모님, 제가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교를 전적으로 믿고 있는 학부모들이 많지만
솔직히 교사 1명이
한 반에 30명이 되는 아이 모두를 챙기기는 어렵답니다.

부모님, 아이가 수학점수 50점을 받아왔을 때 어떻게 하세요?
어떤 학원이 잘 가르치는지만 알아보고 계시진 않나요?
그 전에 아이가 왜 수학을 못하게 됐는지 생각해 보시고 선생님과 함께 고민을 나누세요.
               
아이에게 진정 필요한 건 자신의 마음을 읽어줄 
부모님의 관심일 지도 모르니까요.
 

<아이들이 직접 만든 책 / 가격은 300원, 출판사는 사랑>



선생님, 같은 교사로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매일 아침 그림동화를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1학년부터요.

그리고 아기에게 조금씩 밥 먹는 법을 알려주듯 매일 한 문장씩 글을 짓게 해서 철자와 띄어쓰기를 지도해 주세요.
한 문장에서 두 문장, 세 문장 … 그 글들이 모여 나중엔 멋진 글이 된답니다.

학년 초에 책들을 모아 학급문고를 만드세요.
그리고 근무했던 학교를 떠나면서는 아이들 이름으로 그 책을 오지의 학교에 기증해 보세요.
그 책을 보낼 때는 반드시 아이들과 함께 하시고요.
뿌듯해 하는 아이들의 미소를,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마음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왜 하필 1학년부터냐고요?
고학년이 되면 깊게 배인 습관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 우리 1학년부터 함께 시작해 봐요.



선생님, 다른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몽글몽글 쉬고 싶다는 생각에도 그 순수한 열정 잃지 않으신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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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길’ 하면 떠오르는 것은 코스모스 줄지어진 신작로다. ‘신작로’, 어른들이 부르는 대로 새로 난 길을 그렇게 불렀다. 길이야 새로 냈지만 아스팔트가 귀할 때이니 누런 먼지가 폴폴 날리던 황톳길이었다. 그 길이 아직도 정겨운 것은 학교 앞부터 우리 집이 있는 춘천댐 발전소까지 피어있는 코스모스 때문이다. 집에서부터 코스모스만 따라 가도 능히 학교에 닿을 수 있었다. 하교길 코스모스 꽃길은 놀이터나 다름 없었다. 색색 꽃잎을 따서 손톱에 침 발라 붙이면 매니큐어 바른 것처럼 야한 손톱이 되었다. 성장을 한 숙녀가 된 양 친구들끼리 서로의 손톱에 찬사를 보이기도 했다.


꽃은 우리가 모종을 심어 자라 핀 것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던 날 우리는 고사리 손으로 담임선생님께서 시키는 대로 모종을 심었다. 잘 자라 키가 크자 선생님께서는 또 우리들을 병아리처럼 쭉 몰고 가 순치기를 가르치셨다. 코스모스 목을 똑 하고 부러뜨리는 게 무척이나 아까웠으나 그렇게 순을 쳐야 꽃이 많이 올라온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나중에 보니 정말 가지가 많이 벌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코스모스와 함께 자연을 들여다보는 법도, 아깝지만 잘라야 하는 법도, 있는 것을 더욱 좋게 만드는 법도 보고 배웠다. 훗날 생각해보면 내가 늘 다정한 엄마지만 아이를 단호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 시민운동가로 지극히 공정하려 노력하며 사는 것의 바탕에는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윤강원 선생님이 계신다.


첫 학교, 첫 선생님 기억은 내게 언제나 새롭다. 모두가 가난한데다 시골이라 더욱 어려워 초등학교에 입학해보니 1학년은 교실도 없이 학교 운동장 한 쪽에 쳐진 시퍼런 군용 천막에서 공부를 했다. 사람들이 드나들 때 마다 차가운 봄바람이 함께 들어왔으나 그나마 그때는 빛이 들어와 어두컴컴한 실내가 밝아졌다. 교실에 앉아있으면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천막 밖에서 손을 넣어 꼬집고 장난을 쳤다.


때론 ‘이게 무슨 학교람. 교실도 없고.’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이 또한 재미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야외수업이 되었으며 날마다 밖으로 다니는 수업이었다. 돌개바람이 휘몰아치면 천막이 뒤집어지고 선생님께서 나눠 준 종이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다른 집, 밭으로 날아갔다. 아이들은 잘 되었다며 신나게 뛰어나가서 잡는다고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망건을 쓴 밭주인은 곰방대를 물고 있다 뛰쳐 나와 아이들 몰아내느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우리는 좋게 보면 언제나 열린 학교에 다녔고 나쁘게 말하면 집 없는 거지처럼 떠돌아다녔다. 꽃이 피는 계절이 되었을 때는 들로 산으로 다니며 공부를 했다. 사실 무엇을 배웠는지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지만 들꽃이 피어있는 낯모르는 사람 산소에 삥 둘러 앉아 선생님 말씀을 들은 기억도, 강가에서 있었던 기억도 있다. 따뜻해지면 햇살 아래 앉아 선생님 말씀을 옛 얘기처럼 들었다.


선생님 나이는 마흔 정도였는데 자그만 체구에 늘 뒷짐을 지고 다니셨다. 웃으면 볼에 예쁜 보조개가 생겼다. 늘 뭔가를 부지런히 하고 계셨다. 선생님께서는 날이 더워지자 아이들을 몰고 강가로 갔다. 조약돌을 주워다가 아이들 목 때를 밀어 씻겨주셨다. 한 아이 한 아이 반들거리는 조약돌로 씻기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선생님은 아직 어리광쟁이일 나이에 최소한의 보살핌도 못 받는 시골 아이들을 말없이 챙기셨다.


수업이 끝나면 항상 소사 아저씨와 학교 뒤쪽에 큰 솥을 걸어놓고 불을 지피고 계셨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물으니 아이들이 너무나 가난하여 밥을 굶고 와 교실에 앉아서 졸고 있어 선생님은 옥수수죽 한 그릇이라도 먹여 보내려고 하시는 일이라고 했다. 선생님은 ‘가르치는 일이 먹이는 일보다는 앞설 수 없다’며 직접 교육청에 가서 신청을 하여 겨우 옥수수가루를 얻어와 손수 죽을 끓여 먹이셨다. 학교가 파할 때 나는 그 옥수수죽 냄새는 아주 구수했다. 항상 웃고 따뜻한 선생님이지만 집에서 밥 먹을 수 있는 내게 단 한 번도 죽 한 숟가락 주신 적이 없었다. ‘아, 맛있겠다.’ 하는 생각에 멀리서 쳐다는 봤지만 나는 선생님과 눈이 마주칠까봐, 혹시 주실까봐 부끄러워 한 번도 죽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런 날은 학교에 서성거리는 것도 송구스러워 바로 집으로 왔다.


학년 말, 하루는 교실 난로 옆에 앉게 되었는데 강이 다 얼도록 추운 날,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발이 젖어 학교에 온 아이를 위해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하셨다. 춘천댐은 건설 현장이었기에 외자상자 같은 폐자재들이 많이 나와 아버지께서 학교에 적극적으로 보냈지만 단 한 번도 나를 다르게 대하신 적이 없고 어린 아이지만 더 베풀게 가르치셨다. 누구에게나 웃는 낯으로 대하고 칭찬은 엄청나게 하고 나를 정말 예뻐하셨지만 특별대우는 없었다.


이런 기억으로 나는 우리 아이들을 기르면서 두려움이 없었다. 세상 삼라만상이 다 우리 아이를 키워주는 스승이므로.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언제 어디서고 그런 스승들을 만나 내 인생이 피어난다는 것도 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럴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아이를 자연에 내 놓고 어떤 스승을 만나든 그 분의 좋은 점을 아이가 들여다보도록 거들어주었다.

윤강원 선생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더라.

*글:서형숙(엄마학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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