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과 직장생활에도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
|김혜준| 아버지다움 2015. 6. 4. 09:41
가정과 직장생활에도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
일 매진하느라 가정에 소홀한 경우 많아
세월 흐를수록 벌어진 사이 회복 어려워, 가정에 쏟을 노력·시간 미리 배분해야
달포 전 잘나가는 방송사에 있는 A선배와 점심을 같이 했다. 옻닭을 분해하면서 A선배에게 물었다. “요새 애들하고는 잘 지내요?” 아들하고는 그냥저냥인데 중학생 딸하고는 영 별로란다. ‘중2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질풍노도와 같은 중학생, 그것도 딸하고 비뚤어졌다면 상황은 대략 난감하다고 봐야 한다. 도대체 얼굴 볼 시간이 없다고 했다. 새벽에 나와서 자정 무렵에 들어가고 주말에는 주말대로 바깥 일이 많아서 도무지 짬이 안난단다. 아닌 게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네 아버지들은 ‘좀’ 아니, ‘많이’ 아니, ‘너무’ 바쁘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면서 문득 한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10년쯤 된 일이다. 강원랜드에 골프장이 막 만들어졌을 무렵, 고등학교 동창생 하나가 시범(공짜) 라운딩에 초청되었다. 당시 막 골프를 시작했던 동창생 네 사람이 뭉쳤고, 우리는 새벽 3시에 집을 나섰다. 편도 5시간이 넘는 운전에도 힘든 줄 모르고 당일치기로 정선을 다녀왔다. 부산출신이었던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바쁘다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 못 찾아뵙는다는 건 다 핑계”라는 데 입을 모았다. 서울~부산 운전시간이 그날 걸린 시간과 맞먹었으니 말이다.
골프를 꽤나 즐기던 A선배 역시 국물을 들이키면서 이 에피소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어느 책에서 읽었던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의 이야기도 생각난다. 윤여준씨는 어느 날 고3이 된 아들의 하교 길을 같이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들이 고3을 마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정 무렵 아들의 학교 교문앞에서 아들을 기다렸고, 야간자습을 마치고 나오는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국회의원에 환경부장관까지 된 윤여준씨가 시간이 늘늘해서 이런 정성을 보였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아들은 뒷날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풍문에 시달리는 윤여준씨에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버지를 비난해도 저는 믿어요. 제게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분입니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라고 아버지를 위로했다고 한다.
그릇이 바닥을 보일 때쯤, A선배에게 일과 가정에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하고 있냐고 물었다. “100% 일!”이라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굴지의 방송사에서 선두주자로 달리고 있는 사람다운 답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PGA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했던 필 미켈슨이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활짝 웃고 있던 사진, 그리고 재선에 성공했던 오바마 미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부인과 두 딸과 나란히 서서 웃고 있던 사진이 떠올랐다. 가장 공적인 순간에 가족들과 함께 하는 서구의 아버지들과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돌진하는 A선배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일과 가정생활에 어느 정도로 노력과 시간을 분배할 것인지, 나름대로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재테크에만 포트폴리오가 필요한 게 아니라 가정과 직장 생활 사이에도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찔려’ 하는 눈치다. 그래도 A선배의 ‘100% 일’은 너무 심했다.
후식으로 나온 과일을 먹으면서 “그래 가지고 나중에 아이들과 어떻게 지낼 작정이냐?”고 근성있게(?) 물었다. 그랬더니 “다 필요없고, 나 혼자 살거야!” “그럼 그리 혼자 살면 행복하겠수?”라고 했더니 “그래 갖고 행복할 놈이 어딨냐”라며 버럭 한다. ‘알긴 아네!’ “아니 그럼 왜 그리 살아요?” 자식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그리고는 화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 어디 그리 한가하냐?”와 “마음먹기 나름이다” “니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할 자신이 없고, 그냥 일에나 전념하겠다. 그래서 내 할 도리를 다하고 그 뒤에는 자식들이 알아주든 말든, 나 혼자 살겠다” 뭐 이런 식의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채워졌던 것 같다. 지금은 미국 특파원으로 나가있는 A선배의 미국 생활이 자못 궁금해진다. 지금은 일과 가정생활의 포트폴리오가 어떻게 변했을지.
김혜준 KACE 아버지다움연구소 소장
출처 경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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