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4.02.25 청춘고전 - 생각하는 청춘은 시들지않는다
  2. 2013.12.27 인문학은 밥이다
  3. 2013.11.26 실루엣
  4. 2013.10.04 가을밤
  5. 2013.09.24 행복
  6. 2013.05.22 지금은 행복을 복습하는 시간
  7. 2013.03.22 봄맞이
  8. 2013.01.23 새해 첫 날마다 쓰는 유서
  9. 2013.01.16 뭉뚝한 칼의 지혜
  10. 2012.11.30 왜 성찰이 요구되는가?

'청춘'이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설레입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소중한 시간입니다.

하지만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청춘을 누릴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나 또한 돌아보니 그때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세상과 나 자신과 싸우던 시간이었습니다.

 

 

주위를 돌아볼 틈도 없었습니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늘 쫓기듯 달렸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불안감과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책과 가까이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책과 그리 가까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책과 더욱 친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누구나 지난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은 클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간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 그런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봤으면 합니다.

 

 

인생이란 긴 터널 속에서

우리는 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럴 때 ‘고전’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인생을 만나고, 지혜의 글들을 찾을 수 있다면...

 

 

 

  

이 책은

청춘들이 지금 읽으면 좋을 책들에 대해서

3가지 주제어로 간추려

책 소개와 그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일깨워 주고 있다.

 

 

<고전을 읽는 청춘의 주제어>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관계와 감정들 : 행복, 단점, 가족, 사랑, 완벽함.

흔들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줄 가치들 : 희망, 독립적 삶, 고독, 사색, 감성, 여행.

나와 세상을 바꾸는 작지만 위대한 생각들 : 놀이, 유머, 아집,정의, 앎, 죽음

 

 

 

이 주제어들과 관련된 책들을 통해서

청춘들은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를 찾아야 한다.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열렬한 사랑의 <로미오와 줄리엣>

초월적인 사랑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사랑의 유효기간은 18개월이란 말도 있지만, 하루 하루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새로운 사랑의 <천일야화>

빗나간 사랑인 <폭풍의 언덕>

왜곡된 사랑이 빚어낸 비극인 <위대한 개츠비>....

 

 

청춘들이여..

한 달에 한 편의 고전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가져 보면 어떨까?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인생의 한 부분, 한 부분들.

그 때 마다 자신에게 맞는 고전을 읽는다면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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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

고고하고, 지식 높은 사람만의

전유물이란 생각을 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 살수록 인문학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하고, 나의 존재를 풍성하게 하는

그 어떤 학문보다도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실용학문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 즈음, 만나게 된 책이

<인문학은 밥이다>이다.

 

 

 

 

  인문학의 다양한 분야를 한꺼번에 다루어

제법 두꺼운 책 량에 입이 떡 벌어지지만,

믿을 수 없을만큼 술술 읽힌다.

 

 

유행처럼 밀려온 상업적 냄새가

풍기는 인문학적 책이라기보다

인문학의 기본기를 다지고,

인문학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책.

 

 

많은 사람들과 이 책을 공유하길 바라며...

책 내용 중에서 괜찮은 문장 몇 개를 뽑아봤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질문 속에 이미 답의 반은 들어있다.

 

 

철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방식이다.

 

 

종교는 죽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두려워해야할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펜을 쥐게 하면 칼 든 망나니보다 위험하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니 과거와는 거의 상관없다.

사실 역사가 강력한 힘을 갖는 까닭은 우리 안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말 그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과학으로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인터넷은 비트로 치장한 옷차림의 구세주가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이 우리가 현실에서 겪고 있는 억압과 차별

그리고 소외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의 구현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은 분명하다.

 

 

고전이란 제목은 알지만 내용은 모르는,

혹은 제목은 들어봤지만 정작 읽어보지 않은 책이다.

 

 

말과 글은 우리의 사고를 결정한다.

그리고 사고는 우리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것은 단순히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고리가 아니라

나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현대미술은 우리에게 낯익은 세상을 다른 시선과 다른 각도로 볼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세상은 늘 그렇게 낯설게 오게 마련이다.

 

 

시는 사람을 계발하고, 예는 사람을 성립시키며, 음악은 사람을 완성한다.

 

 

현대음악의 흐름과 변화를 눈여겨보면 뜻밖에 세상에 대한 너른 시야를 가질 수 있다.

요즘 떠들썩한 이른바 ‘한류’나 ‘K팝’도 넓은 관점 아래 훨씬 더 생산적인 상품이 될 수 있다.

관습과 통념을 깨야한다.

 

 

일찍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정치는 결코 정치가들의 일이거나 나와는 무관한 별개의 대상이 아니다.

삶 자체가 하나의 정치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가 진정한 보수적 가치를 실천한 적도,

진보가 참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한 적도 없다고 볼수 있다.

미래의 한국정치와 사회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라도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해는 필수적이다.

 

 

자연은 결코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법이 없다.

인간은 우주와 자연의 질서에서 삶의 질서를 배운다.

 

 

자연이 살면 인간도 살고,

자연이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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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보다

비춰진 모습이나 실루엣을 보는 것이

더 진솔할 때가 있습니다.

 

 

두려워서 응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빤히 바라보기만 하기보다는

그 속살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뭉뚱그려진 그림자로서의

실루엣이 더 또렷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 코, 입 그 모양과 색깔을 봐야만

그를 아는 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때론 그것에 함몰되어 전체 윤곽조차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러니 실루엣은 단순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도 하지요.

 

 

수연재는 남동향으로 앉은 좋은 방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코앞에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눈앞에는 싱싱한 논이 펼쳐졌으며

드문드문 농가가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면 멀찌감치 가야산이 넉넉하게 산자락을 펴놓고 있습니다.

 

 

제가 수연재에 와서 누리는 큰 호사 가운데 하나는

해넘이를 창밖 가득 본다는 점입니다.

흔히 해넘이는 바알간 해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푸른 서쪽 바다에 풍덩 몸을 던지거나 수줍게 산등성이로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시간은 생각보다 무척 빠르게 지나버립니다.

 

 

우리는 해 아랫도리가 조금 사라질 때서야

황혼의 절경을 느끼며 환호합니다.

그런데 수연재에서는 해넘이의 시간이 무척 길게 이어집니다.

늦은 오후가 되면 눈앞 창밖은 이미 해넘이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해가 기우는 각도만큼 논이며 산자락이 뱉어내는 색깔이 시나브로 달라집니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해넘이는 그저 해만 바라보기 쉽지만

반대편에 비추는 해넘이는 마치 달이 해를 되비치듯

속속 변하며 감춰졌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해넘이를 넉넉하게 품는 가야산 자락은 마치

화가의 팔레트처럼 온갖 색의 조화를

마음껏 부리며 고단한 해를 보내줍니다.

그게 어찌 해넘이에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사람도 세상도 같은 이치라고 여깁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늘 마주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약이 아니라 독이기 쉽습니다.

금세 지질리거나 본질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친구도 가족도 마찬가지이겠지요.

 

 

해넘이를 받아주는 맞은 편 산자락처럼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어도 서운해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드러내는 너그러움이 필요하겠지요.

 

 

누군가에게 눈앞에 보이지 않더라도 생각만 해도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것만큼 고마운 일은 흔치 않을 겁니다.

물론 응축된 시간 속에서 농밀하고 진수를 파고드는 시선도 필요하겠습니다.

어찌 늘 변두리만 맴돌거나 변죽만 울리고 살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순간에는 모든 존재를 다 투사하여 농밀하고

직관적으로 파악해야 하겠지요.

 

 마르케스는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한 순간의 화해란 평생 동안의 우정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농축의 시간, 그런 교감의 순간이 없다면

아무리 오래 마주보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시간이 오래 되었다고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건

아닐 수도 있는 듯합니다.

 

때론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너그럽게 상대를 바라보고 기다리며

그의 색깔을 받아내는 아량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너무 정면으로 바라보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누군가에게 비수를 꽂는 통증일 수 있다면,

직설보다는 에둘러 말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지혜가

나이듦의 선물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진짜 사랑은 기다려줄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어찌 모든 게 다 마음에 들고 입맛에 맞을 수만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대가 지닌 절대질량을 이미 재고 있다면,

그 질량을 확신한다면 조금은 물러서서 기다릴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지루하거나 화가 날 까닭이 없을 듯합니다.

 

 

그렇게 한 해를 서서히 마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섣달 마지막 주 되어서야 동동거리며

분주하게 마감하는 호들갑 물리고,

서면으로 겸손하게 선 산자락이 해넘이를 너그럽게 받아내듯

조금씩 정리하고 마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도, 세상도, 삶도 그렇게 조금은 너그럽게 품어가면서 말이지요.

초겨울 저녁달이 선연하게 비춥니다.

가을걷이 끝나 바리캉 댄 민머리처럼 휑한 논매미에도 달빛이 가득합니다.

종일 심술부리던 먹구름도 잠시 자리를 내줘 그 교감을 허락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선연함이 교교함으로 조금씩 바뀌는 모습입니다.

 

 

그런 밤입니다.

 

 


김경집 |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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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아직 달이 완전히 꽉 차진 않았지만 이미 휘영청 밝은 가을밤입니다.

수연재 창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에도 꼬리를 문 전조등과

후미등의 불빛이 이어집니다.

 

 

 

멀리 그리고 오래 떨어져 있다가도 이렇게 한 날을 잡아 모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바람 등을 나누며

모처럼 한 솥의 음식을 먹는 명절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런 초가을 밤입니다.

 

 

예전과 달리 교통수단이며 통신시설이 있어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연락하고 오갈 수 있지만

이렇게 무모하게(?) 고향으로 달려가는 건 참으로 대단한 일이지요.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두보(杜甫)의

 <<악양루에 올라(登岳陽樓)>>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고향인 장안 일대가 적의 여전히 적의 점령하에 있어서

가지 못하는 애절한 심정을 담았지요.

 

 

만년에 가족과 헤어져 장강을 정처 없이 떠돌다

우리의 추석에 해당하는 중양절에 지었던

<<등고(登高)>>는 절절하게 애잔합니다.

 

 

그 시가 중국의 시 가운데 최고의 반열에 오른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담겨진 그의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더욱 다가옵니다.

예전에는 그저 시험공부로 배웠을 뿐 정서적 공감은 솔직히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시심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습니다.

 

<<두시선집>>을 읽다가 한 수를 읽어봅니다.

 

 

못 가는 고향

 

강물이 푸를수록

새하얀 물새

청산엔 타는 듯

붉을 꽃떨기...

 

이 봄도 그렁저렁

가고 있는 걸

이 몸은 어느 해나

돌아가련고?

 

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何日是歸年

 

 

 

불과 스무 자 한 자 한 자마다 꾹꾹 눌러 담긴

곡진한 사연과 애절함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그리고 행간마다 서린 깊은 속내의 절절함이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고향을, 부모를, 동기간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정체성의 뿌리를 상실하는 것이고,

그래서 늘 자신을 다잡고 보듬는 원형의 자궁을 본성적으로 그리워하는 것이겠지요.

 

 

여우도 제 고향을 바라보며 머리를 둔다지요.

우리의 수구초심(首丘初心)도 유전자 속에 이미 깊이 내재된 모양입니다.

그곳에서 자랐건 그저 부모님의 고향이건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이며

고향집이 주는 독특한 가족사의 연대감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명절이 주는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어머니까지 지난해에 돌아가신 뒤

명절이 주는 느낌은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정서로 다가옵니다.

언제든 통화할 수 있었고,

 당신이 몸 져 누우시고 귀도 어두우셔서 통화는 하기 어려워도

 아무 때나 달려가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어머니가 떠나신 후

이제 당신의 묘에 가야만 만날 수 있게 되니 이전의 추석이나 성묘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지난 주말에 형제들 모여 소분(掃墳, 흔히 벌초라고 하는)을 했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선산 지키시던 작은아버님이 해주셨고,

돌아가신 뒤에는 사람을 사서 했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하기로 했습니다.

 

 

예초기를 준비하긴 했지만 묘에 오르는 길목 주변에 잡목이 자라서 길부터

정비해야 했기에 모두 도회의 손방들인 우리 형제들은 겁이 나서

예초기는 아예 차에 모셔두고 낫을 들었습니다.

 

 

솔직히 낫질이라곤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으니

요령보다는 힘으로 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다행히 둘째형님이 낫질을 잘해서 아마도 절반 이상을 했을 겁니다.

 

 

그렇게 산에서 부모님을 뵙는 소회가 애잔했습니다.

이제는 그곳에 가야만 뵐 수 있습니다.

보듬고 쓰다듬던 손길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으로 아주 가깝게 느껴지는 어떤 교통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부모님의 존재는 당신들이 기거하시는 곳이 아니라

당신들과 마음과 뜻이 통하고 이어지는 곳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둔한 저는 그것을 어떤 물질적 공간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90 평생을 늘 당신 자식들 걱정하고 기도하시던 어머니가

이젠 쉰 중턱 어느 결에 넘어선 아들의 가슴 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아, 부모가 바로 고향임을 알았습니다!

당신이 이제 더 이상 계시지 않는데도 그 먼 길 달려가는 건

이젠 당신의 혼령이 머무는 그 곳이 바로 고향 자체임을 알았던 거지요.

 

 

물질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 공간이 훨씬 더 너르고 깊다는 걸

어찌 미욱하게 이제야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묫길에만 만날 수 있다는 좁은 소견으로 어찌 이 세월 살아왔는지

참 부끄럽고 어리석습니다.

 

 

어쩌면 이것도 나이가 들어가는,

애들 눈으로 보면 늙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하겠지요. 너무 일찍 그걸 알고 느끼면서 어찌 정신없이 살아 갈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모두 제 나이에 걸맞게 깨닫고 느끼며 살아가라고

그렇게 절묘하게 시간의 칸을 질러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추석 한가위 명절이라 해도 흥분이나 설렘은 없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를 뵐 수 있으니 이미 마음은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적당히 선선하고 맑은 가을바람이 은근쩍 소슬한 기운까지 들먹입니다.

길고 맵던 여름 무더위 때는 이 시간이 올까 싶더니

그래도 제 시간 맞춰 물러가는 겸손은 갖췄습니다.

 

 

저 또한 그런 겸손과 너그러움을 이 가을에 배워야겠습니다.

휘영청 꽉 찬 보름달에 아직은 테두리 하나쯤 덜 찬 달이지만 그 빛은 교교합니다.

그 달빛 쏟아지는 읍성 한 바퀴 거닐며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모든 이의 마음에 고향이 주는 푸근함과

너그러움의 위로가 지친 삶의 피폐함을 덜어 내주는 그런 명절 밑이기를 빌어봅니다.

 

 

여전히 꼬리를 물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행렬 위에도 부드러운 달빛이 쏟아집니다.

그 달빛 가득 안고 세세히 빚어 가으내 우리 모두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빌어봅니다.

달빛이 참 곱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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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김경집| 완보완심 2013.09.24 13:47

여러분은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나요?

맛있는 음식 실컷 먹고, 예쁜 옷 잔뜩사고, 친구랑 놀러 다닐 때?

아니면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왔을 때?

다음 노래의 주인공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상쾌한 바람이 부는 아침에
한껏 여유 부릴 때
유난히 안색이 좋아 뭘 입어도
다 잘어울리고 다 예뻐 보일 때

좋아하는 노랠 들으며 걸어갈 때
시간 맞춰 버스를 탈 때
유난히 사람이 많은 출근길
딱 내 앞에서 자리 났을 때

예상대로 일이 술술 풀려갈 때
이제부터 뭐든 내 멋대로 맘 먹을 때
아주 맛있는걸 먹었을 때
세상에나~ 힘도 안 줬는데 쾌변
오 보너스 휴가 떠날 때


사랑하는 그대도 함께
모두 상상만 해도 정말 기분 좋아
잊지 말고 Happy Happy Things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을 때
괜히 기분이 좋아서 혼자 막 춤 출 때
아주 머리가 잘 돌아갈 때
말도 안돼~ 공부 안 했는데 백점
오 누군가 보고 싶을 때
그대가 내 맘 알아줄 때
모두 상상만 해도 정말 기분 좋아
Happy Happy Things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모두 상상만 해도 정말 기분 좋아
잊지 말고 Happy Happy Things

 

-제이레빗 <Happy Things>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네요.

이럴 때 우리는 기분좋다,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죠?

그렇지만 이러한 상태가 늘 유지되는 건 아닙니다.

어떤때는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어떤때는 그냥 시들하기도 하지요.

오히려 실컷 울고 난 뒤에 행복해 질 때도 있습니다.

행복이란 도대체 어떤 걸까요?

 

행복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힘들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행복을 삶의 목적이 아닌,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 저절로 따라오는 결과물이라고.

결국 행복은 매우 성스러운 또하나의 큰 가치처럼 보이지만

그저 내 삶을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있게 채워가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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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꿈을 버리거나 잃고 사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오히려 꿈을 품었다간 청맹과니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꿈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무망함과 한꾸러미로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건 연어가 강물 거슬러오르는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꿈을 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싶습니다.

 

 

 

 

아이들마저 꿈 버린 어른처럼 쉬 메마르고

무미해지는 세태입니다.

일찌감치 꿈 잃은 어른이 아이에게

꿈을 심어줄 수 없는 노릇이겠지요.

 

 

그러면서도 내 아이만큼은 나보다

더 행복하게 꿈을 실현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내가 꿈을 다시 담을 수 있어야 아이도 꿈을 담겠지요.

그걸 위해서라도 어른들이

다시 꿈을 되찾아 새롭게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새로운 시작이 꼭 아니어도

지금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꿈을 품고 살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오랫동안 꿈의 별을 간직하길 바랍니다.

적어도 나보다는 더 오래 간직하며 살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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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봄은 왔습니다.

그런데 동해안 북부에는

 때 아닌 폭설이 내려

 설악동에는 눈꽃이 만개했다지요?

 

서울에도 어제 그제 잠깐씩

어설픈 빗발과 풋눈이 섞여 내리더니

오늘은 영하의 날씨로 뚝 떨어졌습니다.

 

 

 

남쪽에는 매화니 동백이 활짝 폈고

산수유는 언덕과 마을을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있다지만

여전히 서울은 꽃은커녕 봉오리조차 채 맺지 못한 봄꽃들이

입을 앙다물고 있으니

꽃샘추위라는 말이 조금은 어색한,

3월 하순의 추위입니다.

 

삶은 덧셈과 뺄셈이 섞여 있는 것을,

덧셈은 잊고 뺄셈에만

신경 곤두세우지는 않았는지

이 어색한 매운 봄바람이 일깨우는 것만 같습니다.

 

사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도 가끔

겨울의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을볕의 날씨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타박하거나 탓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보이는

꽃샘추위에 대해서는 유난하게 타박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에 겨울을 기다리는 마음보다는

겨울에 대한 대비를 하는 처지에서

잠깐의 볕과 따뜻함은 고맙게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에 반해 매운 겨울 털고 고대하던 봄의 길목에서

심술궂게 찾아온 반짝 추위가 조금은 야속도 하겠지요.

 

하지만 자연은 시간의 길목에서 조금씩 엇박자를 둬서

우리에게 그냥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기다리는 것을

얻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때론 굴곡도 있고 때론 너르게 뻗은 대로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조금만 아쉽고 매워도 야속하고 원망스럽지요.

그리고 정작 이따금씩 느끼는 행복은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게다가 그 행복이라는 것도 예전과 같은 것이면

도무지 만족하려하지 않지요.

 

조금 더 크고 많은 행복에만 마음을 뺏깁니다.

그래서 행복도 복습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롤러코스트처럼 정신없이 치솟다가

곤두박질치는 삶은 버겁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삶에는 높낮이가 두루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잔망스럽게 조금만 오르면 희희낙락하고

잠깐 내려가도 호들갑 떠는 것을 보면

참 잔망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 겨울 유난히 맵고 길었습니다.

어지간하면 잠깐 볕 날 때 정신줄 놓은

개나리 몇 봉오리쯤은 일찍 꽃을 내밀었다가

화들짝 놀라 질겁하던 일이 허다했는데,

올 겨울은 아예 한 녀석도 그런 것을 보지 못했으니

춥긴 어지간히 추웠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우리네 삶이 신산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느낌에 비례해서 봄의 희망과 기다림의 부피는

어느 때보다 더 큰 것 아닌가 싶습니다.

 

춥고 매운 날씨를 겪어봐야 볕의 따사로움이

그런데도 봄꽃은 예년보다 1주일쯤 일찍 핀다지요?

어쩌면 그리 매운 겨울 겪었기에,

꽃들도 그걸 이겨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서둘러 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봄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에게

힘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기특한 뜻이 담겨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올봄 꽃구경은 다른 해에 비해

느낌이 조금은 더 진할 듯합니다.

매운 겨울 이겨낸 기특함과 씩씩함을 확인하며

삶에서도 그런 가치들을 새삼 되살리고 싶을 테니 말입니다.

 

아직은 제대로 봄은 아닌 듯합니다.

그야말로 봄은 봄이되 봄 같지 않은 그런 때이지요.

전한(前漢) 말기 흉노의 선우에게

정략결혼으로 시집간 왕소군의 심정을 대신해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虬)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노래한 것처럼,

시간으로는 봄이지만,

도무지 봄 같지 않으니 조금은 안타깝고

약간은 섭섭함이 느껴지는 그런 절기이지요.

 

그러나 어찌 봄이 오지 않겠습니까?

기어코 봄은 오게 마련이지요.

그게 자연의 질서이지요.

그런데도 조그만 돌덩이처럼 뜻하지 않은

자잘한 돌출에도 성마른 우리는 짜증을 냅니다.

어쩌면 그런 우리에게 사람 노릇 제대로 하라고

자연이 가르쳐주기 위해

꽃샘추위를 마련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힘든 일은 오래 기억하고 좋았던 일은 쉬 잊거나

더 좋은 일이 있어야 겨우 만족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성정이

이 꽃샘추위를 불평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에서 겨울 넘어갈 때 잠깐 따뜻해지는 건

탓하거나 의식하지 않으면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때

잠깐 추워지는 것에 예민해지는 건

공평한 일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꽃샘추위는

우리에게 삶의 겨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갈무리했는지 묻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냥 시간의 흐름으로 저절로

봄의 꽃과 잎을 누리는 게 아니라

겨울의 신난한 기억들을 하나하나

고마워하고 삶의 봄을 맞으라는 신호인 듯싶습니다.

 

이제 겨우내 옷장 속에

조용히 접어두었던 봄옷들을

하나씩 꺼낼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추위끝 때문에

겨울옷도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니 겨울과 봄이

너그럽게 공존하는 기간이기도 하지요.

 

고통과 소생의 극단적 대비가

두 계절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할 것 같지만,

자연은 그마저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소통할 수 있도록 마련합니다.

 

저 의례적인 소임의 교대가 아니라

봄은 겨울에게 모질어서 야속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더 진한 꽃 피우고

더 많은 잎을 낼 수 있었다며

고마워하고 겨울은 봄에게 견뎌낸 힘을

격려하고 축하하는 너그러움으로 교환함을 배워야겠습니다.

 

아직 바람끝이 매운데도

나무들은 이미 제 봉오리를 터뜨릴 채비를

마무리하고 있나봅니다.

겨울을 잊지 않아야 봄의 진가를 제대로 누릴 수 있음을

이 짧은 꽃샘추위의 시기에 곰곰 생각해봅니다.

야속했지만 고마운 겨울에게 애썼다고 도닥이기 위해

 이 저녁 밖에 나가볼까 합니다.

 

두 계절의 화해를 축하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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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게 한 해의 어느 다른 날과

 무에 그리 다를 까닭이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새로운 해를 열면서

아무런 바람도 다짐도 없이 지나는 것은

 좀 허허로운 일이지요.

 

 

 

저는 늘 새해 첫날 첫 새벽에 유서를 써왔습니다.

조금 섬뜩하고 엽기적이라 여기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십년 넘게 그렇게 해왔습니다.

 

 혹여 갑자기 저의 삶이 마감되면 어찌 해야 할지,

 저의 죽음에 대한 바람은 어떤지를

적어두어야 아이들이 당황하지 않겠다 싶어서

시작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진짜 속내는 그런 순간이 결국 찾아왔을 때

최소한 부끄럽지 않게 받아들이기 위한

 저 나름의 약속입니다.

 

올해도 첫날, 유서를 썼습니다.

그 전날, 그러니까 한 해의 마지막 날 작년 첫날에 썼던

유서를 차분히 읽었습니다.

받을 일보다 갚아야 일과 빚이 더 많으니

여전히 부끄러운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고,

조금이라도 좋은 일 하려고 애쓰며 살았던 것 같아

스스로에게 애썼다며 위무도 했습니다.

 

작년 마지막 날, 눈이 가득 내린 서오릉을 걸으면서

허물은 반성하고 애쓴 보람의 일에는 감사했습니다.

물론 이 한 해가 마감되는 날,

다시 그 순례를 하고 싶은 건 여전합니다.

 

누구에게나 시작은 설렘과 긴장이 함께 찾아옵니다.

금연이니 금주니 하는 다짐은 고작 사흘도 넘긴 적이 없어서

이젠 아예 그런 다짐은 내밀지도 않을 만큼 노회해진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다짐과 바람을 세워봅니다.

 

비록 그 다짐이 금세 무너진다고 해도

그러한 다짐을 세운 것은 이미 살아오면서

스스로 느낀 바 있고 값을 속으로 매겼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설령 그 다짐을 끝까지 실천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인식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견하다 여길 수 있는 아량도 필요하겠다 싶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다짐도 자꾸만 소박해져갑니다.

건강을 유지하고 싶고, 자리에서 떨려나지 않기를 바라고,

자식들 다치지 않고 제 길 잘 나아가 주기만 빌 뿐입니다.

그러나 이미 건강은 작년과 다르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 무서워서가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살림살이가 갈수록 으스스해지니

아무리 버티려 해도 재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자식들 다치지 않고 커주는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행복했습니다.

나무처럼 자라나는 그 녀석들의 성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먹지 않고도 배가 불렀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더 차가워지는 세상은

녀석들이 제 앞가림조차 하기 어렵게 돌아갑니다.

아비들이 누렸던 젊은 시절의 낭만과 호기는

이미 구석기 시대의 신화처럼 화석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혼과 출산은커녕 마음 놓고 낭만적인 연애조차도 사치고

공포인 이 젊은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못난 선배인 우리가 세상 잘못 살아서 그런 거지요.

그렇다고 어찌 우리가 허튼 삶을 살기나 했습니까?

 

그야말로 전투적으로 살았지요.

우리의 부모 세대보다는 안락한 삶을 누렸지만

우리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훌쩍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우리의 아이들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상태로 엎어져있습니다.

눈물조차 흘릴 여유마저 없이 말입니다.

 

새해의 문을 열면서 저의 가장 큰 바람은

젊은이들이 숨이나마 제대로 쉴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저라고 무슨 용빼는 재주 있겠으며,

나라가 못하는 걸 무슨 힘으로 그리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어설프게 달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적어도 그들로 하여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을

억울하게 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올 한해는 인문학자로서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대의 각성을 인문학을 통해

일깨워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젊은이들과 우리의 미래에 대해

성숙한 관심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려 합니다.

 

그건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이고 사명이겠습니다.

정말 우리의 아이들이 자존감과 주체성을 가지고

무릎을 곧추 세우고 일어설 수 있어야

우리가 행복하게 자리를 비워줄 수 있겠지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라는 유명한 사진작가의 말이 떠오릅니다.

“사진을 찍을 때 한 쪽 눈을 감는 이유는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이다.”

이제 우리가 한 쪽 눈을 감아야겠습니다.

그게 인문 정신입니다.

 

올 한 해는 그 바람을 실천할 수 있는 글을 쓰고

가르칠 수 있는 일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정말 하고 싶고 쓰고 싶은 일은 따로 있지만

 명색이 인문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외면할 수는 없겠다 싶습니다.

 

그 일이 바람대로 이루어질지는 저도 모릅니다.

세상일이라는 게 어디 제 맘먹은 대로 이뤄지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늘 그런 바람 지니고 살다보면 조금은 그 뜻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겠지요.

 

금연이니 금주니 하는 다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지킬 수 있을지 자신도 없거니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생각보다 맵고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한 해를 마감할 때 새해 첫날 써둔 유서를 다시 읽어보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대견해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적 몫을 묵묵히 해야겠습니다.

 

속고 또 속은, 절망 속에서

다시 선택한 비극을 탓하기보다는

다시는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밝은 눈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여깁니다.

 

살다보면 꺾이는 일도 있을 것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구렁에 빠지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래도 그걸 이겨내고 버텨낼 수 있는 힘은

 단단한 다짐에서 오는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해 첫날 나름대로 그런 다짐을 하는 것이겠지요.

똑같은 하루의 몫일 뿐이지만 그래도 따사로운 것은 바로

그런 다짐을 세울 수 있는 각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첫 문을 열었습니다.

다시 길을 나서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외롭지 않은 것은 첫날 다짐해둔

 바람의 견고한 힘 덕분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짐작해봅니다.

 

올 한 해도 여러분들의 바람과 다짐이

모두 이루어지고 그 행복을 두루 누리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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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스승이 두 사람에게 한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칼 두자루를 주면서 그 칼이 잘 들도록

길들이는 사람을 당신의 제자로 삼겠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날마다 열심히 칼을 갈았습니다.

 

마침내 검사를 받는 날,

한 사람의 칼은 바람에 스치는 옷깃마저 그대로 잘라낼 만큼

날카롭게 날이 섰지만,

다른 한 사람의 칼은

오히려 내 준 칼보다 더 무뎌지다 못해

뭉툭한 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스승은

날이 무딘 칼을 내놓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칼을 갈다가 칼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그 사람은

일부러 칼을 무디게 만들었던 겁니다.

 

어렸을 때에는 열심히 칼을 갈았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그때 날이 잘 선 칼로

누구든 맞서는 사람과

억압하는 못된 사람을 베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정의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자비와 용서는 미처 배우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꺾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내 칼보다 더 예리한 칼이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칼을 거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의 진정한 의미를 꺠닫는

지혜는 그렇게 늦게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입보다 귀를 더 많이 열어두는 법도 알게되었습니다.

 

나를 내세우기보다 상대방을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면서

삶의 진지함과 성숙함을 겨우 알게되었습니다.

이제는 아주 조금씩이지만 더 너그러워지기 위해

애쓰며 사는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깨닫습니다.

 

 

- 김경집 [나이 듦의 즐거움]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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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이며

능동적일 때 존립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교육이 비주체적이고, 타율적이며,

수동적이기 때문입니다.

12년 넘게 그렇게 교육받았고,

학교 밖으로 나온 세상 또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거기에 잘 적응된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적응’이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철저하게 텍스트 추종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의심도 질문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불필요하고 오히려 짐만 된다고 여길 뿐입니다.

 

 

텍스트는 분명 그럴만한 가치와 용도가 있습니다.

인류의 지성이 오랫동안 축적해온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 체계입니다.

 

 

그것이 지적 바탕을 마련하여 보다 나은

지식을 생산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그것만을 요구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텍스트 추종에만 매달리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텍스트 자체가 권력이 되어

갈수록 텍스트 의존이 높아지고,

그 텍스트를 차지한 사람이 권력과 부를 쥐고

텍스트를 통해 지배하려 합니다.

 

 

텍스트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체계입니다.

그러므로 텍스트 추종의 교육은 자칫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게 만드는 독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힘 있는 사람들은 결코 텍스트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육을 망친 진짜 이유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주체성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텍스트는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지식체계입니다.

내가 그 텍스트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텍스트는 그 자체가 답이기 때문에 그냥 수동적으로 따르기만을 요구합니다.

그 답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세상에 답은 하나뿐이라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답만 추종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질문은 바로 나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질문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개인’, ‘주체적 자아’를

원천적으로 포기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 교육에서 이렇게 질문을 말살한 것은

결국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격으로서의 나를 억압하고 있는 셈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바로 참된 나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이 발표의 중심주제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성찰은 근사하게 느껴집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성찰은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마음이나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찰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적어도 오늘 우리의 전체 주제에 비추어볼 때,

바로 주체적 인격의 회복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인문학적 가치이기도 합니다.

앞서 우리의 시끄러움과 요란함을 무한도전을 빗대 말씀드린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체적 인격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성찰을 위해서는

차분하고 조용하게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까 고독은 ‘자발적 고립’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찰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자아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익명의 타자 속에 아무리 함께 묻혀 있는 한 진정한 자아는 결코 만날 수 없습니다.

 

 

사전적 의미로서의 성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면

성찰은 바로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종일 뛰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만 생각할 뿐 정작 누가, 왜 달리고 있는지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에도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가끔은 천천히 걸을 수 있어야 비로소 자신의 그림자도 살갑게 만나게 됩니다.

세상을 우리에게 무조건 달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약간의 보상도 마련합니다.

그렇게 달려서 얻은 게 한 뼘이라도 넓은 집, 좀 더 크고 성능 좋은 차,

그리고 남들이 부러워할 지위입니다.

 

 

그러나 그게 진짜 우리가 원하는 삶의 목적일까요?

물론 그것만으로도 뿌듯하고 대견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 삶에 대한 성찰조차 마련하지 못하면서

달려간 사람이 끝내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서,

인격의 주체로서 성취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성찰은 내가 나 자신이 되는 중요한 과정이고 정신행위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인격으로 대면하고 인격으로 대화하고 고민함으로써

부족한 삶을 반성하고 보다 참된 나를 지향하는 힘의 바탕입니다.

 

 

조용히 물러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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