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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대한민국은 갑자기 급식 문제로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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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감선거와 지방선거에서 불거진 무상급식과 관련된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이른바 보수는 유상급식을, 진보는 무상급식을 지지했다.
그 와중에 어떤 논객은 “아이들 급식 못 주겠다며 울먹이는 어른들은 처음 본다”며 혀를 찾다.
결국 무상급식을 반대하던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 문제를 주민투표로 결정하자며
승부수를 띄었고 최종투표율 25.7%로 투표함을 개봉할 수 있는 투표율 33.3%를 달성하지 못해
투표함을 열어보지도 못했다.
주민투표에서 패배할 경우 시장직을 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던 오세훈 서울시장은 결국 시장직을 버려야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사건은 결국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젊은 세대의 적극적인 투표 참가로 박원순 시장을 새로 뽑았다.
단순히 서울시장 보궐선거로 끝난 게 아니라 정치에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했던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투표권 행사 권리의 힘을 객관적으로 스스로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질 선거에 대한 관심과 각성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단순히 서울의 시장을 새로 뽑는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정치 전반에 대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제 더 이상 무상급식 문제를 따지지 않는다.
무상급식 하면 나라가 절단 날 듯 떠들던 여당조차 자신들의 정책과
선거 공약에 그 문제를 태연히 내세운다.
이전의 반대에 대한 자기비판은 물론 없다.
가히 ‘이미 끝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끝난 문제가 결코 아니다. 끝난 문제여서도 안 된다.
그 논쟁의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찬성과 반대의 논리가 난무했다.
그러나 그 논쟁의 과정을 보면 척박하고 천박한
우리 시대의 이성적 논리적 허약성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반드시 되돌아봐야 한다.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 따른 견해를 주장할 수 있다.
그건 건강한 시민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하지만 감정적이고 몰이해적인 판단 근거에 휘둘리지는 않았는가?
나는 정치적 스텐스나 경제적 태도 여하를 떠나 한 인문학자로서
이 문제를 지켜보면서 우리 시대의 사유와 소양이 부박하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소소한 주장과 그 논거는 우리가 익히 들었던 것들이니 여기에서는 재론하지 말자.
찬반 논리의 핵심만 다시 따져보자.
첫째, “이건희 회장의 손자에게 무상급식을 해야 하는가?” 라는 주장이다. 얼핏 보면 돈 있는 사람들이 밥값 내는 건 마땅해 보인다. 그렇다면 수업료도 내는가? 논리적으로 비일관적이다. 교육은 단순히 수업만 지칭하는 게 아니다. 교육은 학교에서의 일 전체를 뜻한다. 그게 최소화 의미로서의 교육이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른바 선별복지 혹은 부분적 무상급식 논리다.
이 주장은 얼핏 그럴 듯하다. 하지만 사실은 매우 위험한 주장이며
단지 감성적 동조만 이끌어낼 뿐인 빈약한 논리다.
왜 그런가? 돈 있는 사람은 제 돈 내고 밥 먹도록 해야 한다는 걸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숨어있다.
첫째, 그런 주장을 펴던 사람들이 평소에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자기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먼저 물어야 했다.
종합부동산세를 폐지시켰던 사람들이 국가재정 악화를 초래했다느니
하는 문제는 차치하자. 그들이 내세우는 이건희 회장이 제대로 상속세를 냈는가? 아니다.
탈세와 감세와 불법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제 새끼들 밥값은 내겠단다.
얼핏 보면 참 가상한 태도다.
하지만 ‘고작’ 몇 천 원 밥값 내는 일일 뿐이다.
이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건전한 부자들의 건전한 사회적 역할과 의무의 수행이 선행되었어야 한다.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보수 우파 진영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논리는 과도한 복지가 국가 재정을 뒤흔들고 건강한 근로 의욕마저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도한’ 복지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제시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부분적 문제점만 침소봉대하여 자신의 논거로 삼았다.
그러나 수출 1조 달러를 돌파한 OECD 국가인 대한민국이
그 정도의 최소한의 복지마저 외면해야 하는 당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나라는 스웨덴과 핀란드 두 나라뿐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립학교까지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나라일 뿐이다.
31개 OECD 회원국 가운데 20개 나라, 그러니까 65%의 나라가
공립학교 무상급식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논거는 부분적인 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또한 복지가 건강한 근로 의욕을 타락시킨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역사적으로 복지는 재정이 남아돌아서 퍼준 게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힘들 때 사회가 붕괴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 실시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복지는 근로의욕을 상실시키거나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호신뢰와 인간에 대한 가치의 연대로 사회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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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죽만 보는 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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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경제적 능력과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밥값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이건 훨씬 더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
부자 아이는 돈 내고 먹는다는 게 그럴싸한 논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는 제 돈 내고 밥 먹는다는 차별성과 자기합리화를 이끌어낸다.
고작(?) 제 새끼 밥값이나 내면서 자신은 사회적 책무에 아주 충실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게다가 자기는 밥값 냈으니 그 문제가 야기할 모든 사안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여길 수 있다.
모든 사회적 책무와 연대 의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자기합리화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우려했던 것은 이른바 진보세력이 내세운 논리의 한계였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눈칫밥을 먹이지 말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그것도 죄 없고 애꿎은 아이들이 눈칫밥 먹게 하는 건 부끄러운 논리다.
하지만 이 주장의 근원적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다.
문제를 더 파고들면 본질과 핵심이 보인다.
그런데도 거죽만 보니 그 논리만 내세운다.
“부자 아이들에게도 공짜 밥을 먹여야 한다”라는 논리를 내세워야 했다.
이건 단순한 평등의 논리나 개념이 아니다.
물론 무상교육의 큰 틀 안에서 무상급식은 당연하게 따라하는 목록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육은 단순히 수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적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산 운운하는 자들의 논리는 오히려 정반대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수출 1조 달러에 세계 무역 순위 10위권이라고 선전만 해댈 게 아니라
그 정도의 경제력이면 이미 진작부터 무상급식이 시행되었어야 했던 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돈 타령만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자, 이제 이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자.
진보세력의 논리였던 ‘가난한 아이들 눈칫밥 먹이지 않기’가 아니라
‘부자 아이들 눈칫밥 먹이기’다. 이건 무슨 봉창 뜯는 소리냐고? 아니다.
부자 아이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
그 아이들이 공짜로 밥을 먹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쪽 팔린다고 여길까? 조금은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교육을 통해 바르게 생각할 수 있게 이끌 수 있다.
부자 아이들이 공짜 밥을 먹으면서 느끼게 되는 건 바로 ‘사회적 연대감’이다.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만 공짜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통해
체득하게 되는 건 바로 사회적 비용으로 자신들도 무료로 밥을 먹는 걸 알게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사회적 유기성에 대해서도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노블리세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가장 확실한 교육 방법이다.
지금의 시대에 계급이 있어서 귀족들이 전쟁터에 솔선해서 나가 전투하는 따위의 현실은 없다.
대신 사회적 직위와 경제적 능력 등에 따라 그런 역할이 수행되어야 한다.
‘왜 우리 할아버지와 아빠가 부자인데 내가 공짜 밥을 먹을까?’
이렇게 스스로 자문하면서 ‘이게 바로 어른들의 세금으로 이뤄지는 것이구나.
많이 벌면 많은 세금을 내서 이렇게 쓰이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혹은 스스로 그런 자각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교육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교육적 효과요 의미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자연스럽게 사회적 연대감과 책무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을 마다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진보 진영의 논리에서 이런 걸 찾기 어려웠다.
보수의 논리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혹은 그것을 포용하면서
더 큰 것을 뱉어낼 수 있는 그릇을 보여줬다면 얼마나 멋졌을까?
그만큼 우리의 사고가 좁다는 방증이다.
보수에게 필요한 건 용기고,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다.
부당한 이익을 포기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른 합법적인 결과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기득권은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안을 보다 넓게 그리고 근원적으로 살피고 따지며 반대편도 수긍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
그게 되지 않으니 아까운 100분을 전파 낭비할 뿐이다.
김창완의 <<인동일기>>에 나오는 시구 ‘만나서 재어보는 우리들의 거리감’이란
대목처럼 편협하게 자기편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천박함과 척박함이
무상급식에 관한 토론에서 그대로 보여졌다는 게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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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자체가 훌륭한 교육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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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시간마다 준비물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미술 시간에 개인이 따로 준비물을 마련하지 않는다.
미술실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데, 거기에는 도화지, 물감, 붓, 크레파스, 종이 등
다양한 미술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다.
물론 공짜다.
공짜로 제공되는 미술 교육 재료들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기도 할 것이다.
당연히 내 것 아니니 낭비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생각이 머물고 말면 이 프로그램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서 이것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그야말로 가장 교육적인 훈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여러분, 이 모든 재료들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께서 세금으로 내신 겁니다. 공공의 자산입니다.
나 혼자 마구 쓰면 다른 사람이 쓸 수 없지요.
게다가 그냥 여러 장에 성의 없이 그린들 그게 제대로 된 그림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한 장에 열과 성을 다해 그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여러분들은 세금을 낸 어른들에게 고마워하고,
최선을 다해 그림 그리면 그것이 가장 좋은 보답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함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아껴 쓰면 허튼 세금 낭비 없을 것이고, 그러면 세금 부담도 줄어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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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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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 읽고 칠판에 쓰고 그걸 공책에 받아 적고 달달 외는 게 교육이 아니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따지고 문제를 다양하게 풀어가는 방식을 터득해가는 과정이다.
미술 재료가 무료로 제공된 미술실이 그렇고 무상급식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엉뚱한 낭비 줄여서 제대로 교육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부분에
투자하면 훨씬 더 가치 있는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교육은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힌 공간이 아니라
사회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미래의 사회를 만들어 갈 학생들을 길러내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 핵심 사항은 쏙 빼먹고 공짜 밥을 먹이느니 마느니 하는 따위의
시시한 문제로 난리법석을 떨고 정치공학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자들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게다가 그런 자들이 이른바 사회지도층 운운하며 권력과 재력을 움켜쥐고
그것을 공유하려는 거짓 언론을 앞세워 한심한 논쟁을 일삼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논리와 주장들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척박한 것인지 되돌아볼 때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무상급식 문제를 더 이상 떠들어대지 않는다고 문제가 끝난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보인 우리들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 사족 하 나|
이건희 회장의 손자에게 무상 급식을 해야 하는가?”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아는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사립학교 다닌다.
애당초 무상급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논쟁을 보면서 과연 뭐라고 느꼈을까?
각자의 상상에 맡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