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할 때였다.

 

 

가출했다가 며칠 만에 돌아와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던,

편의점에서 담배를 6보루나 훔쳤다가 CCTV에 찍혔던,

화가 나면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며 개를 보고 달려가

연필 깎던 칼을 휘둘렀던,

수업시간에 “씨발”이라고 말을 던지던,

 

 

그리고...

너무나 학교에 오기 싫어했던 녀석들이 있었다.

 

 

새벽까지 술주정과 체벌을 하는 아빠,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오는 부모,

밤에 일해야 하는 부모들로 인해

녀석들의 가슴은 메말라 웃음도 눈물도 없었다.

 

 

이런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들고 수업에 억지로 참여하게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는 듯 했다.

 

 

아이들의 멘토가 되고 싶었지만

담임인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내가 하는 많은 활동을 거부하는 녀석들.

 

. . . . . . . . . .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녀석들의 마음의 변화를 위해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여러 놀이들을 함께 하게 됐다.

교과서를 높게 쌓아보기도 하고,

신문지를 맨발로 찢어보고,

몸을 신나게 움직이게 만드는 최면술놀이 등

교실놀이와 연극놀이의 세계로 녀석들을 초대했다.

 

어색해 하던 녀석들은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즐거움 가득한 비명소리는 늘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 대한 경계심 또한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 녀석들이 삶을 바라보는 눈을 바꿔주고 싶어서

색다른 수업들을 구상하게 됐다.

온 몸에 화장지를 감고 신문지와 함께 찢어보기도 하고,

석고붕대로 손을 떠보기도 했으며,

날달걀을 종일 들고 다니면서 부모가 갓난아이를 키울 때의 마음을 체험해 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눈물 흘리기 시작했고,

때론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교사인 나의 어떤 생각과 노력이 있느냐에 따라

반 아이들의 변화 또한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됐다.

 

 

 

함께 보낸 시간들 속에서 녀석들이 원했던 것은

사랑과 관심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인정받고 싶고 존중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존중해 주고, 들어주고, 믿어주자 녀석들 뿐만 아니라

 반 전체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러다 보니 난 더 이상 권위적일 필요가 없었다.

 내가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지 분명하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 경험을 토대로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이젠 심리극(사이코드라마)와 상담, 가족세우기와 관련된 일들을 하고 있다.

자살을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만들어 주고,

무기력한 아이들에게 내면의 에너지를 확인시켜주며,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생명과 사랑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나와 만나는 아이들의 인생이 긍정적으로 변화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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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1년 대한민국은 갑자기 급식 문제로 들끓었다.

. . .

 

 교육감선거와 지방선거에서 불거진 무상급식과 관련된 찬반 논쟁이 뜨거웠다.

 이른바 보수는 유상급식을, 진보는 무상급식을 지지했다.

 그 와중에 어떤 논객은 “아이들 급식 못 주겠다며 울먹이는 어른들은 처음 본다”며 혀를 찾다.

결국 무상급식을 반대하던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 문제를 주민투표로 결정하자며

승부수를 띄었고 최종투표율 25.7%로 투표함을 개봉할 수 있는 투표율 33.3%를 달성하지 못해

 투표함을 열어보지도 못했다.

 

주민투표에서 패배할 경우 시장직을 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던 오세훈 서울시장은 결국 시장직을 버려야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 사건은 결국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젊은 세대의 적극적인 투표 참가로 박원순 시장을 새로 뽑았다.

 

단순히 서울시장 보궐선거로 끝난 게 아니라 정치에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했던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투표권 행사 권리의 힘을 객관적으로 스스로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어질 선거에 대한 관심과 각성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단순히 서울의 시장을 새로 뽑는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정치 전반에 대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제 더 이상 무상급식 문제를 따지지 않는다.

무상급식 하면 나라가 절단 날 듯 떠들던 여당조차 자신들의 정책과

 선거 공약에 그 문제를 태연히 내세운다.

이전의 반대에 대한 자기비판은 물론 없다.

가히 ‘이미 끝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끝난 문제가 결코 아니다. 끝난 문제여서도 안 된다.

그 논쟁의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찬성과 반대의 논리가 난무했다.

 

그러나 그 논쟁의 과정을 보면 척박하고 천박한

우리 시대의 이성적 논리적 허약성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반드시 되돌아봐야 한다.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 따른 견해를 주장할 수 있다.

그건 건강한 시민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하지만 감정적이고 몰이해적인 판단 근거에 휘둘리지는 않았는가?

나는 정치적 스텐스나 경제적 태도 여하를 떠나 한 인문학자로서

이 문제를 지켜보면서 우리 시대의 사유와 소양이 부박하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소소한 주장과 그 논거는 우리가 익히 들었던 것들이니 여기에서는 재론하지 말자.

찬반 논리의 핵심만 다시 따져보자.

 

첫째, “이건희 회장의 손자에게 무상급식을 해야 하는가?” 라는 주장이다. 얼핏 보면 돈 있는 사람들이 밥값 내는 건 마땅해 보인다. 그렇다면 수업료도 내는가? 논리적으로 비일관적이다. 교육은 단순히 수업만 지칭하는 게 아니다. 교육은 학교에서의 일 전체를 뜻한다. 그게 최소화 의미로서의 교육이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른바 선별복지 혹은 부분적 무상급식 논리다.

이 주장은 얼핏 그럴 듯하다. 하지만 사실은 매우 위험한 주장이며

단지 감성적 동조만 이끌어낼 뿐인 빈약한 논리다.

왜 그런가? 돈 있는 사람은 제 돈 내고 밥 먹도록 해야 한다는 걸 반대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숨어있다.

첫째, 그런 주장을 펴던 사람들이 평소에 사회적으로 기여하고

자기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먼저 물어야 했다.

종합부동산세를 폐지시켰던 사람들이 국가재정 악화를 초래했다느니

하는 문제는 차치하자. 그들이 내세우는 이건희 회장이 제대로 상속세를 냈는가? 아니다.

탈세와 감세와 불법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제 새끼들 밥값은 내겠단다.

얼핏 보면 참 가상한 태도다.

하지만 ‘고작’ 몇 천 원 밥값 내는 일일 뿐이다.

이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건전한 부자들의 건전한 사회적 역할과 의무의 수행이 선행되었어야 한다.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보수 우파 진영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논리는 과도한 복지가 국가 재정을 뒤흔들고 건강한 근로 의욕마저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그들은 ‘과도한’ 복지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제시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부분적 문제점만 침소봉대하여 자신의 논거로 삼았다.

그러나 수출 1조 달러를 돌파한 OECD 국가인 대한민국이

그 정도의 최소한의 복지마저 외면해야 하는 당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나라는 스웨덴과 핀란드 두 나라뿐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립학교까지 무상급식을 실시하는 나라일 뿐이다.

 

 31개 OECD 회원국 가운데 20개 나라, 그러니까 65%의 나라가

공립학교 무상급식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논거는 부분적인 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것이다.

또한 복지가 건강한 근로 의욕을 타락시킨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역사적으로 복지는 재정이 남아돌아서 퍼준 게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힘들 때 사회가 붕괴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 실시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복지는 근로의욕을 상실시키거나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호신뢰와 인간에 대한 가치의 연대로 사회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

 

 

. . .

거죽만 보는 눈들

. . .

 

둘째, “경제적 능력과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밥값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이건 훨씬 더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

부자 아이는 돈 내고 먹는다는 게 그럴싸한 논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는 제 돈 내고 밥 먹는다는 차별성과 자기합리화를 이끌어낸다.

고작(?) 제 새끼 밥값이나 내면서 자신은 사회적 책무에 아주 충실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게다가 자기는 밥값 냈으니 그 문제가 야기할 모든 사안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여길 수 있다.

모든 사회적 책무와 연대 의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자기합리화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우려했던 것은 이른바 진보세력이 내세운 논리의 한계였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가난한 아이들에게 눈칫밥을 먹이지 말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그것도 죄 없고 애꿎은 아이들이 눈칫밥 먹게 하는 건 부끄러운 논리다.

하지만 이 주장의 근원적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다.

문제를 더 파고들면 본질과 핵심이 보인다.

그런데도 거죽만 보니 그 논리만 내세운다.

 

“부자 아이들에게도 공짜 밥을 먹여야 한다”라는 논리를 내세워야 했다.

이건 단순한 평등의 논리나 개념이 아니다.

물론 무상교육의 큰 틀 안에서 무상급식은 당연하게 따라하는 목록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교육은 단순히 수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적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산 운운하는 자들의 논리는 오히려 정반대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수출 1조 달러에 세계 무역 순위 10위권이라고 선전만 해댈 게 아니라

그 정도의 경제력이면 이미 진작부터 무상급식이 시행되었어야 했던 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돈 타령만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자, 이제 이 모든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자.

진보세력의 논리였던 ‘가난한 아이들 눈칫밥 먹이지 않기’가 아니라

‘부자 아이들 눈칫밥 먹이기’다. 이건 무슨 봉창 뜯는 소리냐고? 아니다.

부자 아이들에게도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

그 아이들이 공짜로 밥을 먹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쪽 팔린다고 여길까? 조금은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교육을 통해 바르게 생각할 수 있게 이끌 수 있다.

 

부자 아이들이 공짜 밥을 먹으면서 느끼게 되는 건 바로 ‘사회적 연대감’이다.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만 공짜로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통해

 체득하게 되는 건 바로 사회적 비용으로 자신들도 무료로 밥을 먹는 걸 알게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사회적 유기성에 대해서도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노블리세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가장 확실한 교육 방법이다.

지금의 시대에 계급이 있어서 귀족들이 전쟁터에 솔선해서 나가 전투하는 따위의 현실은 없다.

대신 사회적 직위와 경제적 능력 등에 따라 그런 역할이 수행되어야 한다.

 

‘왜 우리 할아버지와 아빠가 부자인데 내가 공짜 밥을 먹을까?’

 이렇게 스스로 자문하면서 ‘이게 바로 어른들의 세금으로 이뤄지는 것이구나.

 많이 벌면 많은 세금을 내서 이렇게 쓰이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혹은 스스로 그런 자각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교육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교육적 효과요 의미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자연스럽게 사회적 연대감과 책무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을 마다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진보 진영의 논리에서 이런 걸 찾기 어려웠다.

보수의 논리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혹은 그것을 포용하면서

 더 큰 것을 뱉어낼 수 있는 그릇을 보여줬다면 얼마나 멋졌을까?

그만큼 우리의 사고가 좁다는 방증이다.

보수에게 필요한 건 용기고, 진보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다.

부당한 이익을 포기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른 합법적인 결과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기득권은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안을 보다 넓게 그리고 근원적으로 살피고 따지며 반대편도 수긍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

그게 되지 않으니 아까운 100분을 전파 낭비할 뿐이다.

 

김창완의 <<인동일기>>에 나오는 시구 ‘만나서 재어보는 우리들의 거리감’이란

대목처럼 편협하게 자기편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천박함과 척박함이

무상급식에 관한 토론에서 그대로 보여졌다는 게 참 안타깝다.

 

. . .

그것 자체가 훌륭한 교육 과정이다

. . .

 

미술 시간마다 준비물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미술 시간에 개인이 따로 준비물을 마련하지 않는다.

미술실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데, 거기에는 도화지, 물감, 붓, 크레파스, 종이 등

다양한 미술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다.

물론 공짜다.

 

공짜로 제공되는 미술 교육 재료들이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기도 할 것이다.

당연히 내 것 아니니 낭비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생각이 머물고 말면 이 프로그램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서 이것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그야말로 가장 교육적인 훈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여러분, 이 모든 재료들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께서 세금으로 내신 겁니다. 공공의 자산입니다.

나 혼자 마구 쓰면 다른 사람이 쓸 수 없지요.

게다가 그냥 여러 장에 성의 없이 그린들 그게 제대로 된 그림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한 장에 열과 성을 다해 그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여러분들은 세금을 낸 어른들에게 고마워하고,

최선을 다해 그림 그리면 그것이 가장 좋은 보답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함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아껴 쓰면 허튼 세금 낭비 없을 것이고, 그러면 세금 부담도 줄어들겠지요?”

 

. . .

교육은 바로 그런 것이다.

. . .

 

그냥 책 읽고 칠판에 쓰고 그걸 공책에 받아 적고 달달 외는 게 교육이 아니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따지고 문제를 다양하게 풀어가는 방식을 터득해가는 과정이다.

미술 재료가 무료로 제공된 미술실이 그렇고 무상급식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엉뚱한 낭비 줄여서 제대로 교육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부분에

투자하면 훨씬 더 가치 있는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교육은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힌 공간이 아니라

사회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미래의 사회를 만들어 갈 학생들을 길러내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 핵심 사항은 쏙 빼먹고 공짜 밥을 먹이느니 마느니 하는 따위의

시시한 문제로 난리법석을 떨고 정치공학적으로만 이해하려는 자들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게다가 그런 자들이 이른바 사회지도층 운운하며 권력과 재력을 움켜쥐고

 그것을 공유하려는 거짓 언론을 앞세워 한심한 논쟁을 일삼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논리와 주장들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척박한 것인지 되돌아볼 때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무상급식 문제를 더 이상 떠들어대지 않는다고 문제가 끝난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보인 우리들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 사족 하 나|

이건희 회장의 손자에게 무상 급식을 해야 하는가?”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아는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의 자녀들은 대부분 사립학교 다닌다.

애당초 무상급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 논쟁을 보면서 과연 뭐라고 느꼈을까?

각자의 상상에 맡기자.

 

 

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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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사건들...

그 사건들의 문제로 거론 되는 것, 바로  ‘교사의 자질’ 이었다.

 

. . . . .

왜 교사들은 문제를 제기한 학생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으며,

문제가 발생한 초기에 그 문제를 바로 잡지 못했을까?

. . . . .

 

교사, 그들이 학교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국민들은 처참한 사건 소식을 들으며 궁금해하고 있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업무 현장을 들여다봐야 한다.

고교 교사의 하루는 교육 연구보다 행정처리 업무에 비중이 더 크다.

 학급당 학생 수가 많을수록 잡무가 더 늘어나

 야간자율학습 지도에 전산입력까지 수업준비보다 잡다한 일에 시간을 더 많이 쓰는 것이 현실이다.

 

. . . . .

외국의 경우에는 학생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1차적으로 담임이 조사를 한다.

. . . . .

 

이후 해결 범위가 커질 우려가 있으면

교장이 나서서 학생과 개별 면담으로 일을 처리하는 시스템이다.

행정업무도 행정 담당자가 일괄 처리하며 우리나라처럼 야간자율학습도 없으니

교재연구와 충전의 시간이 허락된다.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교과서를 줄줄 읽고 밑줄 치는 일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교과서 이외의 생활 지도까지 끌어낼 수 있어야

 진정한 교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정책과 현장의 괴리를 최소화하는 것은 정책 입안자들의 책무이다.


. . . . .

공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한다.

. . . . .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 부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주체가 움직여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정부다.

예산을 집행하고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공교육에 정부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학교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는 불편하고 껄끄러운 경우가 많다.

이런 두 주체들의 미묘한 갈등 구조에 ‘참여기회 보장’이라는 명분으로

 학생 학부모가 교사를 비판하고 평가하는 구조로 바꾸려는 사이

 정부는 비판의 사각지대로 숨어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은 아닐까?

 

과연 교사 탓만 한다고 교육의 질이 향상될 수 있는가?

정부는 학생과 교사, 학무모와 교사 간의 문제 뒤에서 나와 해결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  [최고의 학교] 중에서 -남승희 저

 

[최고의 학교] e-book 보기  http://www.viabook.net/promotion/bschool

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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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아무 대책 없이 버스 정류장에서 배차 간격 뜸한 버스를 기다리며 거위처럼 목을 길게 빼고 도로 왼쪽만 하염없이 바라봐야 했지만(물론 저는 아직도 그러고 있지만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자신이 기다리는 버스가 정확하게 몇 분 뒤에 정류장에 오는지 알기 때문에 허튼 시간 버리지도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지도 않습니다. 갈수록 그렇게 편리함의 속도는 빨라지겠지요. 물론 그렇다고 그게 마냥 부럽기만 한 건 아닙니다.

 

우리처럼 아날로그의 끝자락과 디지털의 첫 단추를 동시에 걸쳐 있는 세대는 아날로그의 온기와 디지털의 속도를 함께 누릴 수 있는 나름의 특권도 있지요. 물론 아날로그에서 온기를 누리거나 품지 못하고 디지털에서 속도를 즐기거나 만들어내지 못하는 얼치기가 되지는 않아야 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랜 동안 청산통신도 접고 마감해야 할 원고들과 새롭게 펼치기 시작한 원고들에 치대어 보내다가 갑자기 해미로 떠나고 싶었습니다. 언젠가 머지않아 그곳에서 움터를 마련해서 그저 읽고 쓰는 일에만 파묻혀 지내고 싶은 곳이기에 항상 마음 한 켠 자리 잡고 있는 곳이지요. 그러나 며칠 전 길을 떠난 건 해미가 아니라 운산의 마애석불 때문입니다.

 

흔히 ‘백제의 미소’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어서 정말 그게 백제인의 모습이려니 하고 각인될 만큼 소담한 마애불입니다. 그걸 보호한답시고 닫집을 만들어 자연 채광으로 드러내는 미소의 아름다움은 박제되고 어설픈 인공조명으로 비추는, 굳은돌이어서 마음이 시렸는데, 얼마 전 마침내 그 닫집을 걷어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야지, 가마 하면서도 정작 쉽게 떠나진 못했습니다. 자동차를 갖고 있지 않아서 그 길이 사실 그리 만만하지 않아서 늘 마음에만 담고 있다가 날 풀리는 봄날 몸살 하듯 내처 떠나고 보자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마침 고등학교 동창이 함께 가자 해서 그 친구 차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비는 추적추적 쉼 없이 내렸지만 자동차의 편리함은 그것쯤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얼마쯤 지나 운산의 계곡에 우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과연 쓸데없는 옷을 뒤집어쓴 채 어색하게 웃던 부처님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서 한걸음에 올랐습니다. 말끔하게 닫집을 벗고 마침내 본디 모습으로 잔잔하게 웃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이 얼마나 반갑고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해마다 들러본 곳이면서도 사뭇 달랐습니다. 정작 제 모습을 왜곡한 채 보호라는 명목으로 감금되었던 부처님도 비로소 제대로 웃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벼르고 벼른 끝에 찾아간 마애불에서 머문 시간은 고작 20여 분에 불과했습니다. 방사능비가 무서워서도 아니고 눈맞춤했으니 그걸로 족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내친 김에 개심사와 해미읍성까지 둘러볼 마음으로, 아니 모처럼 떠난 길, 본디 꽃구경 좋아하지 않지만 비인 마량포구의 동백 숲까지 가볼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동백 숲엔 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저 마음만 바쁘고 시간만 축냈을 뿐입니다. 물론 풀밭에 뚝 떨어진 동백의 자태가 흠씬 아름답긴 했지만 말입니다.

 

동행한 벗이 함께 길 떠나기에 참 좋은 친구였기에, 그 덕에 편하게 가본 참에 좋아하는 개심사와 읍성까지 안내하고 싶었기 때문이긴 했습니다. 필요할 때는 서로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길을 걸을 수 있는 동행은 분명 고마운 복입니다. 그런 친구였기에 아마 어쩌면 더 많이 들러보게 하고 싶기도 했을 겁니다. 물론 저 역시 쉽게 가지 못하는 길, 이왕이면 한 묶음으로 꿰고 올 생각이었습니다.

 

발단은 욕심에 동백 숲까지 간 데서 비롯되었던 것을 돌아오는 길에 깨달았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마애불까지 가려면 터미널에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내려 한참을 기다렸다가 하루에 서너 차례만 오가는 시골 버스를 타고서야 가능합니다. 어차피 다음 버스까진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까닭에 엎어진 김에 쉬었다 가는 심정으로 몇 시간이고 그 작은 계곡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니 좋든 싫든 내내 마애불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요. 그것만으로 하루를 다 보내거나 운 좋아 버스 시간 맞으면 개심사까지 들르곤 했습니다.

 

여행을 나타내는 낱말 travel의 어원인 라틴어 travail의 뜻이 ‘고생하다’ 라는 걸 불현 듯 깨달았습니다. 옛사람들은 힘들게 찾아간 곳에서 잠깐 일별하고 다시 길을 떠나지는 못했겠지요. 그저 그거 하나 찾아갈 일념으로 반나절이나 한나절 내내 걸어갔을 겁니다. 다른 건 들여다볼 생각일랑 아예 품지 못했기에 오로지 그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걸어가지는 않아도 몇 시간 동안 버스 갈아타며 찾아간 그곳에서 그렇게 짧은 방문으로 마감하진 못했겠지요.

 

참된 사랑은 오롯하고 직수굿하게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그런 사랑은 효율도 떨어지고 다양성도 딸립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 하나에 대한 확실한 마음과 애틋함은 마음껏 누리고 채우겠지요. 그게 사람이건 사물이건 다르지 않겠지요. 이것저것 들쑤시고 욕심만 내면서 정작 하나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사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돌아봅니다. 마음만 앞서고 조바심만 내면서 말입니다.

 

모처럼 떠난 길 서둘지 말고 욕심내지 말고 차분하게 누리고 오지 못했습니다. 마애불 초입의 산중턱 관리소 기와집 마루에서 무심하게 걸터앉아 아무 말 없이 그저 처마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낙수 소리에 취해서 맞은 편 산기슭의 나무들에도 눈길을 나눌 수 있어도 좋았을 것이고,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며 마음에 품었으면서 정작 잘 꺼내보지 않아서 조금은 낯설기도 할 이야기들도 두런두런 나누지 못하고 돌아온 게 아쉽고 동행한 벗에게도 미안한 하루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건 쉽게 떠날 수 있는 편리한 자동차. 그러나 정작 한 곳에 집중할 마음을 상실한 게 그런 편리함 때문이라는 걸 미련스럽게도 돌아온 뒤에 확인합니다. 여행의 본디 뜻이 고생함이라는 걸 겸손하게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조금은 미련하게 느긋하게 다가서고 지켜볼 수 있는 고생스러운 넉넉함을 생각합니다. 정말 만나고 싶은 건 꽃도 아니고 멋진 날씨도 아니며 바로 시간이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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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00만명(통계다이어그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노예제는 먼 고대에서 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합법적으로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노예상태에 처해있는 인구는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세계 인권선언에 명기(노예제도 금지)되어 있는 내용이 무색할 정도로 반인권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승자 싹쓸이(winner take all)' 현상을 가져왔지요.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이 함께 쓴 '승자 싹쓸이하는 사회'를 읽어보면
세계화가 불균형 증대에 얼마나 큰 몫을 해내고 있는지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 반노예상태에서 인권탄압을 받으면서 일하는 이민노동자들..
감금노동
노예적 결혼제도.
아동노동 착취
성매매
인신매매................................................................


미국에서만 매년 평균 15,000명이상이 노예상태에 빠지고(늘어나고) 있으니..



27,000,000


아직 인간의 광기는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권교육. 너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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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 구요
~?

소나 돼지 같은 가축들도 배변 훈련을 시킬 필요가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에서 출발했습니다.

 

국내에서도 하천/수질오염 등의 이유로 강 주변에서 가축의 축사를 운영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대만에선 이러한 가축으로 인한 수질오염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대만에선 약 650만 마리의 돼지들이 강변에서 사육되고 있는데, 엄청난 수질오염을 초래한다는 거죠. 수질오염의 원인은 다름 아닌 가축들의 분뇨!

가축들의 배설물로 인해, 오염된 수질이 개선되기 위해선 엄청난 돈과 물이 필요로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들에게 축사운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정답일까요?’

 

대만정부는 해결책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돼지들에게 배변교육 (potty training)을 시키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해진 장소에서 가축들이 배변을 하면, 배설물로 인 수질오염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가축이 한 두 마리도 아니고..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드려보자면,

 

대만 정부는 돼지를 사육하는 농민들에게 ‘Litter box’라는 것을 설치 하게 했습니다.

지원금 까지 줘가면서 이 일을 독려 했다고 하니, 수질개선에 소요되는 비용보다 리터박스를 만들어 주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효율적이기 때문일까요? ^^

리터박스 라는게 뭘까요?

 

(최대한 비슷한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이 리터박스는 금속제질의 창살로 만들어 집니다. (꼭 감옥 같이..)

그리고 돼지우리 중앙에 설치 됩니다.

이 배변시설을 설치한 농민들은 다음과 같이 돼지들의 배변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1.     리터박스  안에 돼지 들을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거름 등을 깔아 줍니다.

2.     돼지들을 그 안에서 사육시킵니다.

3.     사육을 하다 돼지들의 배설물이 어느 정도 쌓이면 돼지들을 다른 리터박스로 이동시켜서 다시 그 곳에서 배변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듭니다.

4.     농민은 이 전의 리터박스 위에 쌓인 배설물을 특수 진공청소기에 위해 빨아드리고, 그 토양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여 돼지들을 우리 안에서 돼지들을 사육시킵니다.

과정을 들으니 어떠신가요? 돼지들에게 배변 교육을 시키는 게 그리 어려운 과정인 것 같진 않습니다.   

일반적인  돼지사육 시설을 이용하는 것보다 이렇게 돼지 우리 안에 분뇨 처리시설을 만들어 돼지를 사육하면, 분뇨를 통한 토양오염을 상당부분 없앨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 분뇨가 토양에 침착 되기 전에 바로 바로 치울 수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실제로 모든 대만의 돼지농장들이 이 시설을 사용하게 되면, 매일 약 75,000톤의 물을 절약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환경 뿐만 아니라, 돼지들의 건강에도 더 좋다고 합니다. 이런 시설 안에서 키워지는 돼지들은 생존률도 올라라고, 좀 더 건강해지고, 병이 걸릴 확률도 적어진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화장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돼지들에게 생긴 멋진 화장실,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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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기자들이 온몸으로 체험하면 펴낸, 빈곤 노동체험기 '4천원 인생' 이 책으로 엮어 나왔었다.
책 부제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시대의 노동일기'.

70~80년대 소위 운동권 학생들의 위장취업의 21세기 버전이랄까?
왜 열심히 일해도 가난할 수 밖에 없을까?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업종이다. 그렇지만 그런 직업이 없다면 사회는 어떻게 돌아갈까?
힘든 일, 모두가 피하는 직업을 묵묵히 자신의 가족과 생계를 위해 일하는 비정규직 분들...

'4천원 인생'은 그런 의미에서 4천원 인생보다 더 값진 사람들의 속살과 만날 수 있다.
인생을 돈으로 평가하는 금권사회에서 노동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의 언론인 출신들이 쓴 빈곤체험기가 떠올랐다.


가난한
사람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노동을 직접 체험하면서 빈곤한 사람의 입장에서 빈곤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쳐 보여준 두 권의 책 '거센된 희망'과 '빈곤의 경제'.


 


'거세된 희망'. 영국 가디언의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인 폴리토인비(Polly Toynbee)는 빈곤퇴치교회운동에서 보내온 편지 한 장의 제안으로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나 홀로 빈곤체험”을 시작한다. 그 세상 속에는 기존에 누렸거나 가졌던 일할 능력, 집, 연금, 가족과 친구들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공공임대주택에서 살림을 꾸려가며 각 종 임시직 노동현장에서 빈곤한 사람의 시각으로, 빈곤한 사람들 스스로가 말하는 빈곤의 문제를 얘기하기 시작한다. 책의 행간을 들여다보면 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아니 포기 할 것이 없는 벼랑 끝에서 저임금 임시직 노동을 해야만 하는 현실의 지면에는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와 환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비정규직 차별 문제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빈곤의 문제가 개인의 무능과 불성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오늘날 저임금 노동자는 30년전 보다는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정치인이 국민 앞에 알린다면, 공정한 최저생계임금을 놓고 국가적인 토론이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밝히고 있다.



다른 한 권의 책 '빈곤의 경제'는 저널리스트이자 문화비평가인 바바라 에렌라이히(Babaea Ehrenreich)가 체험한 미국의 빈곤체험기 이다. 작가는 한달 집세보증금과 식료품비 등 1,300달러로 저임금 노동체험을 시작한다. 저임금 노동자의 현실 속으로 들어간 작가는“풍요속의 빈곤” 현장의 거친 호흡들을 들려준다. 경제적, 인권적 불평등을 체험한 작가는 말한다. 빈곤의 실상조차 모르면서 경제성장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성장이 먼저이냐, 분배가 먼저 이냐 라는 우선정책의 갑론을박은 우문(愚問)이다. 어리석음을 판단이기 이전에 의문이 든다. 문제는 실상을 파악하는 시선의 문제이다. 분배의 실마리는 이미 제공되어 있다. 문제는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사회적 합의를 위한 토론과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면 실패 할 수밖에 없다. 편 가르기 속의 방어적 시각으로는 그 어떤 문제도 풀 수 없다. 밥그릇 챙기기로 빠질 수밖에 없는 지난 역사의 과오를 우리 국민은 보아 오지 않았는가.

 소득과 지위의 공정한 분배를 통해 사회적 단합을 이끌어 낸 유럽의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의 모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모델이 있으면 철저한 분석을 통해 우리 실정에 맞는 모델을 개발하고 제시를 하고 제도를 마련하거나 정비해야 한다. 정의가 바로 세워지면 경제 성장에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빈곤체험기가 사치스러운 자의 자기합리화나 일회적인 이벤트로 보여 질 수도 있겠지만 보다 촘촘한 사회안전망을 만들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 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끼니를 굶고 있는 어린 벗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빈곤문제가 선거철 때나 사건으로 터져 언론이 떠들 썩 할 때 마다 보이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끼니를 해결 해주는 것 못지않게 우리가 속한 공동체 속에서 차별 없는 시각과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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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현동이 데려올게유치원 끝날 시간에 맞춰 아들을 데리러 가는 베트남 새댁 옥디엠 씨가 현관문을 나서며 이렇게 소리친다. 마치 친정집에 얹혀사는 막내딸 같다. 칠순이 넘은 시어머니는 있는 일이라 그냥 그러라고 대답할 뿐이다. 한국에 시집온 5년째인 옥디엠 씨는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게다가 반말 투다. 하지만 이들에게 이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어머니란 말이 발음하기 어려워요. 그냥 엄마라고 부르면 편해요."

발음이 어렵다고 하니 격식을 따지라고 다그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며느리 변명에 시어머니는 "친정이 멀리 떨어져 있어 외로울까봐 엄마라고 부르라" 한단다. 그이도 며느리의 베트남 이름이 발음하기 힘들어 그냥 "새아야!"하고 부른다. 사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정확한 이름을 모른다. 남들이 며느리 이름을 묻기라도 하면 그저 "김옥김인가?" 한다. ' 옥디엠'이라는 낯선 이국 이름의 '어머니' 발음이다. 이렇게   격식을 떠나 서로 편한 선택을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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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등에 기대는 며느리와 거뜬히 등이 되어주는 어머니



올해 26세인 씨는 스물한 살에 지금의 남편(44, 회사원) 만났다. 유치원에 다니는 5살배기 아들과 6개월 뒤에 태어날 둘째 아이도 있다.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첫눈에 반했고 반대가 심했던 친정부모를 졸라 허락을 얻어냈다. 신랑감이 18 연상인데다 어린 딸이 나라로 시집가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없었을 것이다. 결혼한 5년이 지나고 나니 마음을 조금 놓으셨단다. 베트남에 있는 언니들이나 친정엄마는 TV 드라마에서 구박받는 며느리를 보면 자신들의 동생과 딸도 그런 대접을 받는가 하여 전화할 때마다 "시어머니가 해주냐" 번씩 물어본다. 친정부모의 걱정과 달리 씨는 "시엄마가 없으면 살림살이나 아이 키우는 것을 제대로 없다" 시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런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는 '귀엽고 예쁜 막내며느리' 아닐 없다. 시어머니는 손자가 글씨를 읽고 쓰기를 한다며 "엄마를 닮아 똑똑하다" 자랑한다. 여느 시어머니들은 잘난 아들 덕분이고 못난 며느리 탓이라고 하기 쉬운데 그이는 며느리 사랑이 남다르다.

씨는 남편보다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다. 아침밥은 씨가 차린다. 남편이 출근하면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준다. 이때 시어머니는 청소를 한다. 청소는 거의 시어머니 담당이다. 씨는 4 넘게 같이 살았지만 쓸고 닦고 정리하는 한국 집안일이 아직도 어렵기만 하다. 베트남 여성들 대부분 아침에 간단히 청소를 마친 밖에 나가 일하고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기에 하루 종일 집안에서 걸레 들고 이곳저곳을 닦는 한국 여성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한다. 낮에는 이웃 공장에서 일감을 가져와 시모와 며느리가 함께 부업을 한다. 자동차 부속품을 다듬는 일인데, 가끔 현동이도 일을 거든다. 온종일 일해서 하루 2 정도 벌이를 한다. 저녁 식사 준비는 사람이 함께 한다. 씨가 가장 하는 매운탕과 찜류다. 시어머니에게 요리를 배운 덕에 이제는 도움 없이 혼자서도 척척 해낸다.

농사철에는 시어머니와 함께 밭일을 한다. 반찬거리를 길러 먹는 텃밭 치고는 규모가 조금 편이다. 수확하면 자신들이 먹을 것에 조금 넘쳐 있는 남는 정도다. 시어머니가 거의 도맡아 하지만 씨는 친정에서도 농사일을 해왔기 때문에 무리 없이 해낸다. 현동이를 낳고 기를 때도 시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처음 겪는 일이라 산후조리에서 아이 키우는 것까지 시어머니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만간 둘째 아이가 세상에 나올 텐데, 시어머니는 아이와 산모를 보살펴주는 일을 당연히 당신의 일이라고 말한다. 며느리의 돌봄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으련만, 며느리를 탓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럴 며느리도 "우리 엄마 정말 좋아요. 엄마 손이 닿는 음식은 신기하게 맛있어요"하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세운다.  낯선 사람들과 살면서 외로움을 탓을 법한데 오히려 시어머니에게 살림을 배우며 외로움을 있었다.
 


"
많이 하는 베트남여성에 비해 한국 여성들 여유로워요"
 

한국에 시집온 4년의 세월이 지나는데 그이는 한국 여자로 사는데 얼마나 익숙해졌을까. 이제 법적으로도 한국 사람이 되었고 한국말도 곧잘 하지만 씨는 아직도 베트남 여성들과 한국 여성들의 생활을 비교하게 된다."베트남 여자들은 어릴 때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돕는다. 농촌에서는 들에 나가 일하는 시간이 길어 집안 살림은 새벽 잠깐과 저녁 이후 잠깐 해요. 베트남에선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일을 많이 해요." 한국 여성들이 집안 살림을 많이 하는 것에 비하면 베트남 여성들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차이점이라고 한다. 씨도 12세부터 집안일을 도왔고 물이나 물건을 지게에 담아 나르느라 어깨 근육이 유난히 발달해 있다. 한국에 시집와서도 다문화 공동체운동을 펼치는 <국경 없는 마을>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통역을 했다. 지금은 둘째를 임신해 일을 접어 두고 있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다시 취직할 생각이다. 그동안 컴퓨터 한글 문서 작성법을 배웠고 앞으로 업무에 필요한 컴퓨터교육을 받으려고 한다.  씨는 일에 대한 욕심이 많다. 베트남여성들이 대개 그렇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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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원 숙제할 엄마 노릇하기 힘들어요"
 

하루 일과 씨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은 아침저녁으로 아들 현동이와 함께 유치원에 오가는 일이다. 걸어서 5분만 가면 되는 곳이라 통학용 셔틀버스에 태워 보내는 대신 아들 손을 잡고 유치원을 걸어서 오간다. 오후 4 즈음.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찬바람이 매서운 날이라 아이를 일찍 데려오려고 여느 날보다 1시간 먼저 유치원에 갔다. 엄마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들 현동이는 유치원 문을 박차고 뛰어나온다. "엄마" 하며 달려오는 아들과 벌려 맞이하는 엄마 모습이 마치 오래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난 사람들처럼 각별하게 살갑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고루 느껴지는 생긴 아들이다. 아들을 대하는 씨의 표정과 말투가 다른 때보다 정교하다. "오늘 간식은 먹었어? 재미있었어?"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엄마에게 현동이는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늘어놓는다. 엄마가 한국이 아닌 베트남 사람이고 말이 조금 어눌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현동이는 부족함이 없다엄마와 유치원 숙제도 하고 동화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씨도 여느 엄마들처럼 직접 동화책을 읽어준다.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저절로 한글 공부가 되는 것도 있지만, 읽는 것에 자신이 있어서다. 쓰기는 씨에게 아직 어렵다. 하지만 다행히 아들의 한글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 늘고 있다.

현동이는 엄마와 함께 베트남 외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마침 이번 설에도 외가를 방문할 예정이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현동이에겐 이번이 번째 베트남 방문이다. 씨는 현동이에게 할머니 할아버지께 전할 베트남 인사말을 가르쳐주었다. 곧잘 따라하고 외운다. 이번 친정 나들이는 둘째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인사하려는 것이다. 친정 엄마가 편찮다는 소식을 들어서인지 씨의 마음은 벌써 베트남의 고향에 있다. 명절이면 보통 며느리가 시댁의 차례 상을 차려야 하지만 시어머니는 개의치 않고 며느리의 친정방문을 허락했다. 어느 해보다 추위가 매서워 더운 나라에서 자란 씨가 곤혹스러워한 것도 시모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씨는 젊은 새댁답게 20대의 순진함과 씩씩함으로 동네에서 집안에서 재미를 찾으며 살아간다. 동네에서 현동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똘똘 굴러가는 발음으로 말을 걸기도 하고, 반말 투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이웃들과는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사람들처럼 허물이 없다. 이국사람에게 있을 법한 서먹함이 전혀 없었다. 시숙과 형님들에게도 그이는 스스럼없는 막내 제수고 동서일 뿐이다. 씨가 베트남 요리라고 만들어 내놓는 월남 쌈과 튀김 전병인 짜요를 먹으면서도 시댁 식구들은 전혀 낯설어 하지 않는다. 지난 4년이 가족들의 사이를 그만큼 좁혀 놓았다.

씨는 자신이 뿌린 내린 한국을 알아가려고 애를 쓴다. 며느리, 아내, 엄마 노릇을 모두 제대로 하려고 고민한다. 쉼없이 부업을 하는 것도 남편에게 부담을 덜어주려는 마음에서다. 베트남 새댁 씨는 자신의 자리에 맞는 '노릇하기' 열중하는 평범한 한국의 젊은 새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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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다문화가정은 얼마나 될까?

서로 다른 국적인종문화를 가진 남성과 여성이 만나 이룬 '다문화가정'이라는 용어는 이전에 쓰던 혼혈인혼혈 가정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대신하기 위해 2003 건강시민연대가 제안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2009 5 현재 결혼이민자 수는 16 7 명이고  가운데 여성이 89.7% 전체 인구의 0.3% 달한다이들  한국 국적을 얻은 사람은 4  명으로 75.2% 아직 외국인 신분이다출신 국적은 한국계를 포함한중국이 46.9% 가장 많고베트남이 29.4%, 필리핀이 6.6%순이다다문화가정을 이룬 이들은 이제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전라남도의 경우 해마다 농어업 종사자의 50% 가까이가 이주 여성들과 다문화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한다취업 등의 이유로 이주해 우리 사회의 '다문화구성원으로 함께 살고 있는 이들은 20106 현재 120 8 544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2.3%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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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재활용 쓰레기 수거날이 다가오면, 한주동안 보고난 신문들, 잡지들을 쓸어담아 낑낑대며
밖에 나가 버리고 오곤 하죠.

한번 보면 다시 볼일 없는 잡지들, 그리고 신문들. 버리기도 귀찮고, 집에 쌓아놓자니 지저분해보이고.
이 골치덩어리들을 재활용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을 소개해드릴게요.


신문, 잡지들을 돌돌 말아 모아놓으니 작은 스톨 의자가 됐습니다. 딱딱하고 불편해보이지만, 간단한 소품 가구 정도로는 괜찮아보이죠? 좀 딱딱해보이니, 방석 정도는 깔아두는 센스는 필수.

네덜란드의 Delft 대학의 도서관에 가면 이보다 더 무시무시한(?) 재활용 가구가 있다고 하는데요,


얼핏 봐도 좀 특이한 도서관처럼 보이긴 하는데...쇼파나 의자가 심상치는 않죠?
하지만 더 놀라운건 바로 데스크에 있습니다.

바로 헌책으로 만든 데스크입니다. 


알록달록한게 도서관의 무거운 분위기를 한층 살려주는 것 같네요. 이 도서관에서는 책이 오래되서 더이상 볼 수 없거나 훼손되면, 책을 버리고 소각시키는 대신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책을 재활용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오는 방문객들이나 학생들의 반응도 매우 좋다고 하네요.


이렇게 헌책을 차곡차곡 쌓아만든 블록은 데스크 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데요,
사실 Delft 대학 도서관의 헌책 데스크보다 앞서서, 올해 여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국제 가든 페스티벌에서는 이른바 '헌책 정원'이 소개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알록달록한게 놀이공원 같기도 하고, 주변의 녹색 나무들과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죠?
무려 40,000개의 헌책이 이 블록들을 쌓는데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헌책으로 쌓여진 블록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게 중간중간 버섯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버섯도 키우고, 그늘에서 휴식도 취하고, 맘에 드는 헌책이 있으면 그 자리에 앉아 책을 읽어도 되고...
게다가 알록달록 아름답기까지.

책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보지 않는 헌책들, 짐이라 생각하고 버리지 말고,
이렇게 간단한 아이디어로 톡톡 튀는 디자인 소품으로 재탄생시켜보는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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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에듀앤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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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캄보디아에서 Sra Pou라는 이름의 직업학교 건물이 완공되었습니다.
겉보기에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학교 건물과는 달리 알록달록한 이 건물이 특별한 이유는,
그저 예쁜 겉모습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로 학교가 자리잡은 지역의 자연에서 온 재료들을 이용해 지역 주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인데요,
지역 주민들이 집짓는 작업에 대한 교육을 받은 뒤 직접 손으로 지은 '핸드메이드' 학교라고 합니다.




스라 포우 Sra Pou마을은 프놈펜에서 외곽의 시골로 재배치되면서 많은 가정들이 취약한 기반시설과
안전성을 보장받지 못하는 주거환경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특별한 학교가 생겨남으로써
이 마을에는 변화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이 학교를 디자인한 핀란드의 건축사무소 Arhchitects Rudanko + Kankkune의 Hilla Rudanko와
Anssi Kankkunen는 2010년 봄, 캄보디아 아달토 대학에서 수업를 받기 위해 캄보디아에 왔다가
이 학교 건물을 디자인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수업 내의 작은 프로젝트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의욕적으로 자금을 유치한 덕분에 실제 건물 완공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고 하고요.



 
큰 창문이 여러개 있는 이 2층짜리 건물은 주민들이 직접 햇볓에 말려 만든 벽돌로 지어졌고,
바람도 잘 통하고 채광도 잘되게 하기 위해 벽돌 사이에 구멍이 뚫려있기도 합니다.
현관은 지역주민들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충분히 넓게 만들어졌고요.



사전에 직업교육을 받은 주민들의 손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이제 지역의 비영리단체가 운영하면서
주민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이 함께 모여 모임을 갖고 지역공동체를 위한
회의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습니다.



 

학교 건물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행복해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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